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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8.21 [06:01]
V. 루터의 종교개혁, 그 업적과 확장
- 종교개혁사 5 -
 
김의환

종교개혁에 있어서 루터의 업적을 논할 때 많은 면을 손꼽을 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독일어 성경 번역’이다. 1521년 시작된 신약성경 번역이 구약까지 전부 완간된 것은 13년 후인 1534년의 일이었다. 루터는 그가 가진 탁월한 모국(독일)어 사용 능력으로 이해하기 힘든 성경을 독일어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번역했다.

또한 그는 번역의 과정에 있어서 특수한 용어들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이들에게 찾아가 물었는데, 예를 들면 제사에 쓰이는 짐승의 내장(內臟) 용어들을 번역할 때에는 푸줏간 주인을 찾아간다든지, 계시록 등에 기록된 보석의 이름들을 번역할 때에는 보석상을 찾아가기도 하는 등의 심혈을 기울였다.

성경 번역에 녹아 있는 루터의 사상

루터의 성경 번역엔 그의 성경관(sola scriptura, 오직 성서만이 개혁 신학의 최고의 권위라는 관점- 편집자 주)의 원리와 기독론 중심의 원리가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정경 배열 순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벌게이트 판에 나타나는 전통적인 배열 순서를 따르지 않고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등을 끝부분으로 돌렸다. 그는 특히 야고보서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본질 중 그 어느 것도 소개하지 않기 때문에 그 유명한 ‘지푸라기와 같은 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루터의 이러한 입장은 후대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쳐 ‘정경 속의 정경’(canon in canon)을 찾으려는 독일 학자들의 경향을 만들었다. 그러나 모든 계층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성경을 번역함으로써 루터는 종교개혁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루터파적 국교주의의 영향

루터는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교회가 국가의 간섭과 보호를 받아야 할 것을 주장했다. 교회의 행정권은 국가에게 맡겨 영주나 지방도시의 시의회에서 교회 행정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 그들이 교회를 운영해야 한다고 했다. 국가는 종교세를 징수하여 교회를 재정적으로 돕고, 행정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독일의 루터파적 국교주의는 교권과 속권을 혼동시켜 교회를 영적으로 약화시킨 원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재침례파(再浸禮派)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훗날 경건파 운동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루터는 종교개혁 운동의 ‘제 1인자’임은 틀림없으며, 그의 업적은 실수를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정도로 크다 할 것이다.

점차 확산된 종교개혁 운동

루터의 종교개혁은 처음부터 시련과 반발의 연속이었다. 그가 고향 ‘아이슬레벤’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치는 순간(1546년 2월 18일)에도 가톨릭과의 소위 ‘슈말칼덴 전쟁’(schmalkaldischer war,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종교 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1531년 2월 독일의 헤센 백작, 작센 선거후(選擧侯)를 비롯한 신교도(기독교) 제후와 마크데부르크, 브레멘 등의 독일 신교도 세력의 대부분이 동맹을 맺고 일으킨 전쟁. 그러나 신교도 측은 가톨릭 측인 카를 5세에게 대패했다.- 편집자 주)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루터가 죽은 후에도 종교개혁 운동은 독일의 국경을 넘어 유럽의 여러 나라로 확장, 진행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낳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세 가지 고백적 교회, 즉 루터파 교회, 개혁파 교회 및 영국 교회를 낳았다.

중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종교개혁 운동

중세의 전체주의 체제는 종교개혁 이후 개인주의적 경향으로 기울어지면서 다양성(多樣性) 속의 단일성(單一性)의 현상을 빚었다. 중세의 집단주의(collectivism)가 정(靜)적이었다면, 프로테스탄트 시대의 개인주의는 동(動)적이고 다이내믹한 특색을 보였다.

종교개혁이 단일 교회를 이루지 못하고 세 가지의 고백 교회를 낳은 것은 결단코 불행한 것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없다. 중세의 집단주의 및 획일주의에서 새로운 개인주의 및 다양주의 시대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신교 교회의 형성이 보인 다양성은 필연적인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항상 발전은 경쟁에서 일어나며, 경쟁은 개인주의적 노력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운동 이후의 신교 교회 형태

종교개혁의 원리는 같다 할지라도 그 원리를 받아들이는 곳의 형편에 따라 신교의 고백적 표현 및 제도적 표현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게 되었다.

루터파는 주로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지방에 확산되었고, 교리적으로는 기독론(基督論, christology, 그리스도의 인격에 신성과 인성의 결합 관계에 관한 것으로 성서에 근거한 기독론의 정통적 교의는 ‘한 인격 안에 참되고 바른 신성과 인성이 확실히 구별된 가운데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편집자 주)과 이신득의(以信得義,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로마서 1장 17절을 바탕으로 한 사상- 편집자 주) 사상을 강조하였다.

개혁파는 스위스와 화란(네덜란드), 스코틀랜드에 널리 확장되었으며, 교리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강조하며 복음의 사회적 적용을 중시하였다.

 영국 교회는 영국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과 밀착되어 프로테스탄트 교리와 가톨릭 의식을 융합시켜 신학적으로는 중용을 택하고, 제도적으로는 국교(國敎) 형식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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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11/03 [10:23]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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