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신학자로서 고난받는 민중의 역사 가운데서 예언자 신학을 고취하고, 교육자로서 해직과 옥고를 겪으면서도 평생 학생들의 교육에 전념했으며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헌신한 소원(笑園) 김찬국 교수의 15주기 추모 행사가 지난 19일 오후 7시 연세대학교 신학관 예배실에서 열렸다.
▲ 소원(笑園) 김찬국 교수 15주기 추모 행사 열려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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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국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이번 행사는 1부 추모예배, 2부 추모 음악회, 3부 ‘창조신앙 어떻게 볼 것인가’ 출판기념회 순서로 진행됐다.
한일웅 목사(청포교회 은퇴)의 사회로 진행된 1부 추모예배에서는 황건원 목사(계동교회)의 기도, 이나경 회장(연세대 신과대학여동문회 회장), 민영진 목사(대한성서공회 전 총무)의 설교, 박덕신 목사(수유감리교회 원로)의 축도로 마무리 됐다.
우진희 선생의 사회로 진행된 2부 추모음악회는 정승민 학생(리라초 5), 어린이노래그룹 작은평화, 김다영 학생(동덕여대 실용음악과), 최현철 바리톤의 무대가 있었다.
천사무엘 목사(연세대 신과대학총동문회 회장, 한남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3부 출판기념회에서는 허호익 목사의 출판경위보고 이후 정대화 상임위원(국가교육위원회 상임위원, 상지대 전 총장)과 이부영 전 위원장(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 위원장)의 회고담과 조성진 대표(마임씨어터 빈탕노리)의 노래가 있었다.
‘기억과 전승’이라는 주제로 설교한 민영진 목사는 “선생님은 재직기간과 퇴직기간 내내 가방 속에 여러 책을 넣고 다니면서 학생들에게 판매했고 판매 대금으로는 옥에 갇힌 제자들의 영치금을 내줬다”고 말하며 “선생님의 그 모습을 보고 성경에 나온 이사야가 묘사한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고 말했다.
‘창조신앙 어떻게 볼 것인가’ 출판기념회에서는 제2이사야의 창조신앙을 재조명한 김찬국 교수님의 업적을 기리며, 오늘 한국교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창조신앙의 의미를 다시 묻는 자리가 마련됐다.
고 김찬국 교수는 1927년 경상북도 영주군에서 태어나, 1954년 연희대학교 대학원 신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미 뉴욕 유니언 신학교 대학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우리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감리회 목사로 활동했다. 유신 정권 당시, 독재에 맞서 자유와 정의를 외치다 1970년대 최고의 조작사건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조종 범인으로 몰려 1974년 갑자기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됐다. 반정부인사로 낙인찍혀 옥고를 치르고 1975년 3.1절 특사로 석방됐다.
김 교수는 무려 9년을 해직교수로 견디며 거리의 스승이자 민주주의 외판원으로 살았다. 마침내 1984년 연대동산으로 돌아와 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독재의 군홧발에 신음하다 구속된 제자들을 찾아가 영치금을 넣고, 학생들 석방을 위해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그리고 폭력진압과 고문으로 희생된 학생, 노동자, 농민의 병실과 빈소의 자리를 함께했다. 독재정권은 그의 몸은 가두었으나 그의 제자 사랑은 묶을 수 없었다.
1988년 우리 대학 교학부총장을 거쳐 1992년 정년퇴임한 뒤 1993~1999년 상지대 총장을 지내다 2009년 8월 19일 소천했다.(소원 김찬국 교수 아카이브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