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엑스플로 '74 50주년 회고와 전망]에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가 기고한 글이다.(뉴스파워)
▲ 남서울교회 은퇴선교사 은퇴식에서 홍정길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뉴스파워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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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C는 나의 인생에서, 나의 신앙에 있어서 젊은 날 그 자체였다. 주님의 크신 사랑은 충격으로 다가왔고, 서툴렀으나 나를 열정으로 가득하게 했다. 서서평 선교사의 복음 전도로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는 특별한 은혜가 있었지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방황했던 어린 시절을 떠나 대학 시절 입석수양회를 통해서 만난 주님은 나의 삶을 온전하고도 확연하게 변화시켜 주셨다. 그러했기에 CCC는 나의 젊은 날 그 자체인 것이다.
I) 젊은 날의 우리 시대
공허한 젊은 날
안타깝게도 처음 고향 함평에서 부푼 꿈을 않고 서울로 대학을 오게 된 나의 현실은 젊음이라는 단어처럼 싱그럽거나 빛나는 형태는 아니었다. 이는 비단 개인의 현실뿐 아니라 1960년대의 우리나라의 모두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도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당시 한국 사회는 부족했고 혼란스러웠으며 공허했다. 국가는 전쟁으로 인한 나라의 재건에 정신이 없었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생존하는 문제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러한 현실을 염려하고 변화된 미래를 꿈꾸고자 했던 젊은이들에게는 안타깝게도 한 줄기의 희망도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목마른 시대였다.
때로는 인간에게 배고픔보다 희망에 굶주림이 더 크게 다가온다고 했던가? 덩치만 컸지 늘 배고픈 젊은 대학생들을 그래도 조금이나마 위로했던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당시는 젊은이들이 갈 곳이 부족한 때였다. 요즘처럼 볼거리가 넘쳐나고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의 유흥을 제공하는 한국의 모습을 보면 도저히 지난날이 연결되지 않는다. 서울이 세계 유행의 중심이라는데, 1960년, 당시 나에게 최고로 큰 도시였던 그 서울에 처음 생긴 다방이 규모가 작은 ‘돌체’와, 규모가 큰 ‘르네상스’에서 음악을 듣는것이 우리의 유일한 여가였다.담배 연기가 자욱한 다방에 대형 스피커를 걸어놓고 음악을 틀어주면 갈 데 없는 젊은이들은 입추의 여지 없이 좁은 공간에 앉아 명곡을 듣곤 했다. 이렇게 집중되는 현상은 4.19로 학교가 문을 닫고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자 더 심해졌고, 그렇게 나는 테너 비욜링을 알게 되고 영화음악에 심취하며 사회자의 해설을 듣고 음악을 앎으로 공허한 마음에 위안을 삼았다.
이렇게 음악다방이라도 가지 않으면 갈 데 없는 학생들은 기껏해야 또 할 수 있던 것이 등산이었다. 지금은 등산로도 좋고 산림도 잘 가꾸어졌지만, 당시는 전쟁으로 산이 헐벗고 등산로도 제대로 닦이지 않았건만 도봉산에 오르면 그나마 막혔던 숨통을 조금 트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좌를 경청하는 것이다.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어려웠던 것은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대학을 진학했건만 지식에 대한 목마름이 시원하게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 교육전문가가 전무했다. 6.25를 기점으로 지식인을 포함한 많은 사상자가 있었고 그나마 있던 지식인들은 대부분 북으로 갔기에 남겨진 이 땅의 교육자의 수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것도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대다수의 대학교 교수는 고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현저하게 부족한 숫자로 인해 대학 강의를 하게 된 분들이다. 내가 전공한 철학계에도 고등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치시던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시대에 학교 밖에서 간혹 들여지던 강좌는 우리에게 그 암담한 시대에 귀를 열고 들어야 할 지식의 보고 그 자체였다. 젊은이들은 오늘 어디에서 강좌가 열린다면 모두 열 일을 제쳐두고 가서 강의를 들으며 지식의 목마름을 해소하고자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대표적인 강사가 몇 분 있는데 유영모, 노평구, 함석헌 선생 그리고 경동교회의 강원용 목사이다.
내 눈에 비쳤던 유영모 선생은 신선과 같은 분이었다. 그분을 뵐 당시는 74세의 어르신이셨는데, 인왕산을 병풍처럼 뒤로한 체 자문 밖에서 백발에 흰 수염이 가득하고 두루마기 차림으로 강의했기에 90이 넘은, 아니 신선 같은 외모라고 생각했다. 동양사상을 바탕으로 서구문화 그리고 기독교를 해석하는 강의는 지금 생각해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려야 될 일이지만 그분의 위엄에 눌려 모든 것이 이해된 것처럼 느껴지는 매력을 주곤 했다.
거기와 비교하면 노평구 선생의 강의는 쉬운 전달력과 함께 조용히 스며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김교신 선생의 무교회주의 입장에서 로마서를 설명했는데, 목요일(일요일)마다 YMCA에서 강의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의 깊은 연구는 우치무라 간조의 사상에 뿌리를 두어 서구학자들과 다르게 동양적 전략으로 청중을 인도했기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그의 메시지를 곱씹으며 자주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함석헌 선생은 노평구 선생처럼 YMCA에서 자주 강좌를 했는데 동서양을 넘나드는 사고와 지식이 담긴 메시지가 당시 뜻있는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특별히 그의 방대한 독서 범위는 듣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을 주었다. 쉘리, 휠덜린, 토마스 칼라일, 칼릴 지브란 등 서구의 저명한 시인, 철학자, 명상가들의 사상을 통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힘 있게 말해주었고, 청년들이 가장 애독하던 잡지인 ‘사상계’에 계속해서 나왔기에 당시 사상가 중에서 그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그의 사상은 더 깊이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
교회 안에서는 경동교회의 강원용 목사가 유일하게 청년에 대한 메시지가 있었다고 기억된다.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이 교회와 교리라는 틀에 갇혀 메시지를 전했기에 의문이 많은 청년들이 ‘사회보다 왜 기독교는 이처럼 왜소한가?’, ‘왜 경직되어 있는가?’라는 고민을 할 때에 그는 청년의 시선에 맞추어 신학 안에서 자유롭게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내일
젊은이들이 이처럼 강좌를 찾아다니며 귀를 기울였던 것은 지식에 대한 목마름도 컸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날마다 신문 사회면에 지난날 발생한 아사자에 대한 소식이 있는 지독하게도 가난한 나라였다. 젊은 시절 내 월급이 8,000원이었는데, 당시 환율이 450~480원 정도였으니 달러로 계산하면 18달러가 고작 내가 받은 월급이었다. 어떻게 그런 박봉으로 살았는지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가난을 겪어서인지 나중 아프리카 최빈국에 가게 되었을 때 우리 젊은 날의 어려움이 떠올라 돕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치 환경은 혼란 그 자체였다. 시시각각 변하여 사람들은 놀라고 분노했으며 두려워했다. 사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에 이어 일제강점기를 지났기에 자유 민주주의라는 뜻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실행한 이승만 전 대통령 역시 지금의 눈으로 보면 아쉬운 부분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통하여 우리나라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으나 민주주의가 들어섰다. 민주주의. 눈으로 본 적도 실행한 적도 없던 사람들이 방향도 모른 체 대통령의 지도로 시작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갈등과 또 서로가 서로에 대한 적대감으로 투쟁했던지 국민들은 정치에 아무런 생각을 실을 수가 없었고 희망을 품을 수가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하와이로 떠났다. 다음으로 윤보선 대통령에 장면 총리가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4.19가 일어나고 1년이 채 못 되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으며, 어설프게 뿌리를 내린 민주주의의 기초 위에 군부독재 시대를 맞이하여 대학가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정변이 일어날 때면 학교는 자연스럽게 문을 닫고 청년들은 더욱더 갈 곳을 잃어버렸다. 휴교령이 내려지면 그나마 고향이 서울인 친구들은 집으로 갔으나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언제 다시 휴교령이 철회될지 몰라 고향 집으로 돌아갈 수도 무작정 하숙집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처음 집을 떠나 타향살이하며 외롭고 힘듦은 정치적 혼란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정치, 경제, 사회적 현실은 젊은이를 더 외롭고 공허하게 했으며 고통스럽게 했다.
이런 무기한 답답함 속에서 간혹 학교 문이 일시적으로라도 열리면 교수님들의 강좌를 놓칠세라 들었다. 철학 입문은 김형석, 윤리는 안병옥, 미학은 조요한, 칸트는 박종호 교수께 배웠고 김태길 교수도 특강으로 자주 뵈었다. 조가경 교수는 당시도 유명한 석학이었는데 다시 독일로 가셨고, 김주헌 교수는 사실 학력이 없었는데 영어 구문론을 잘 강의하셔서 좋은 수업을 하시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학문적으로 뛰어난 교수가 많지 않았으나, 그래도 그분들에게 사람으로서 살아야 할 도리와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으로서 가져야 할 올바른 사고를 데카르트의 사상으로 배웠다.
젊은이들은 잦은 휴교령에 지식의 부족분을 개인적으로 책을 통해서 채워갔는데 마침, 정음 출판사에서 세계 명작 시리즈를 출간하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훌륭한 번역본은 아니었다. 기존에 일본에 출판된 역서를 다시 한글로 재번역하여 책이 출간되었기에 한 달에 한, 두 권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2년 뒤에는 을유문화사라는 곳에서도 책이 나와 더딘 속도가 조금 빨라지긴 했어도 여전히 부족했다. 목마른 자가 수도꼭지에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라도 갈급하게 목을 축이듯, 우리는 급급 책이 나오는 대로 읽었는데, 토마스 만의 ‘선택된 인간’,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선택된 인간’, 셰익스피어, 괴테, 플라톤의 책을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해,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깊이 고뇌하고 사색할 수 있었다. 사실 어찌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습득해야 할 지식의 분량에 한계가 있었기에 책장이 닳도록 정독에 정독할 수 있었고 더 깊이 사색하며 어려운 현실과 부딪히며 씨름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혼란기에서 학업이란 참 어렵고도 고난 그 자체였기에 단순히 책 속에만 존재하는 지식이 아니었다.
꿈꾸는 선지자, 김준곤
이런 희망이 없던 혼란의 어느 날, 한 친구가 명강사가 있다고 함께 가서 듣기를 청했다. 친구를 따라 정동 태극당 앞에 갔더니 김준곤이라는 목사가 강좌를 열고 있었다. 다양한 청년들이 많이 모이기 시작했다. 앞서 서울 내에 강좌란 강좌는 다 다녔던 나였기에 새로운 강사가 과연 무슨 소리를 할지 궁금한 마음에 주변인에게 저 사람은 어떤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귀에 속삭이고 마음에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이전에 많은 강사들은 지성에 호소한 설명이었고, 의지를 향한 권면이었다. 그런데 김준곤 목사의 메시지는 이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듣는 이의 마음속에 조용히 들어왔고, 강의를 듣고 나면 새로운 힘을 경험하게끔 하였다. 그래서 나는 기존에 다니던 강좌에서 발걸음을 돌려 그의 강좌를 듣다가 결국 나중에 CCC에 출석하게 되었다. 누군가 비욜링의 오페라를 듣고 ‘그의 노래는 떨어지기 직전에 고여 있는 눈물의 아름다움과 깊은 슬픔의 연약함이 있는가 하면 범접할 수 없는 강함으로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주는 힘이 있다.’고 평했는데, 김준곤 목사의 강의가 꼭 그러했다. 대개 다른 강사들은 행동과 사고의 방향을 제시하며 강조했다면, 그는 나사렛 예수께 나의 시선을 이끌어 주었다. 소망의 빛이었다. 이것이 김준곤 목사 강의의 특별함이었다. 그는 민족의 장래에 대한 비전을 우리로 보게끔 눈을 뜨게 했고, 그 결과 4~5백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매주 태극당 앞을 꽉 채웠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그 찬송처럼 꿈꾸는 복을 제시하는 선지자 같았다. 그 꿈이, 그 소망의 빛이 우리가 가진 현실적인 어려움을 일시에 걷어내고 우리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시켰다.
세월이 흘러 나중에 그의 생애를 곰곰이 들여다보니 그는 정말 꿈꾸는 선지자였다. 나도 젊은 날부터 그분과 함께 사역했지만, 동역하셨던 또 다른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확실히 꿈꾸는, 비전의 사람이었다. 대개 사람들이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본다. 그런데 김준곤 목사는 그 흘러가는 구름이 땅에 내려온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사람들이 깜빡 속지만. 그래서 모두 그를 꿈꾸는 소년 같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한번은 CCC를 떠난 한참 뒤인 1995년에 나에게 찾아오시더니 함께 세계 선교사대회를 준비하자고 눈물로 호소하시는 간절함에 대회를 준비한 적이 있다. 전 세계의 선교단체 책임자들이 다 모였고, 주 경기장에 7만 2천 명의 학생들이 모여 함께 찬송하고 춤추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장면을 목도했다. 그렇게 그는 80이 넘는 삶을 사셨다.
최근에 아주 오랜만에 나사렛 형제들이 모여 김 목사님과 함께했던 민족복음화운동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내가 처음 CCC에 갔을 때 그가 민족이 복음화되는 꿈을 강력하게 설파하던 것을 지근거리에서 듣던 일을 형제들과 함께 나누었다. 그는 민족이 복음화 되는 꿈을 직접 실현하기 위해 온 생애를 헌신 했는데, 교회 밖의 일이라도 민족 복음화를 이루는 일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만들거나 돕고 성장시켜 나가는 분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국가조찬기도회를 창설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도로 모이게 했고, 당시 ‘CCC편지’라는 소식지를 발간하고 있던 강용원 간사도 국가조찬기도회 준비를 담당했다.또한 박정희 대통령이 자언을 요청할 때면 도움을 주곤 했는데, 당시에 군대 내 좌익 침투에 대한 우려가 있어 대통령께서 고민하자, 김준곤 목사는 신앙 전력화가 군대 내 반공 운동과 정신력 무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조언하여 대통령의 동의하에 전군신자화운동을 전개했다. 그 외에도 꿈 많은 두 분은 만나면서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을 건설 등 민족을 부흥케 하는 꿈을 현실화시키는 대화를 자주 나누었다. 물론 대다수가 그 꿈에 반대했다. 그 외에도 나라를 위한 40일 금식 기도, 기독교 법조인 기도회, 창조과학회, 북한 사역 등 평생을 쉼 없이 일해 왔는데 노년에 뵐 때도 마치 처음 뵌 그날처럼 민족복음화의 꿈을 설파하는 것을 보고 역시 내가 생각한 대로 그는 꿈꾸는 선지자가 맞았다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소천하시던 날 연락을 받고 하던 일을 제쳐놓고 서둘러 갔으나 임종을 지키지 못했지만, 그는 나의 그리고 공허한 시대의 이 땅 젊은이들의 영적인 아버지요, 스승이었다. 더 이상 이 땅에서 그분과 함께 할 수 없으나 민족복음화의 꿈을 나사렛 형제들, 동지들과 함께 갖게 된 이 감동은 전적으로 김준곤 목사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두 노년의 나이에 이르러 젊은 날의 꿈이 이야기하고 또 천국 소망의 꿈을 꾸는 복을 허락하신 주님. 공허한 젊은 날을 풍족한 노년으로 채워주시니 진정으로 복된 삶을 선물로 받았다.
II) 대지를 뚫고 새순이 올라오다.
강좌에서 김준곤 목사님의 메시지에 매료된 나는 CCC에 다니기 시작했다. 64년 여름에 있었던 입석 수양회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이를 계기로 CCC 강좌와 모임에서 달라진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과 평안을 가지고 이야기했고, 나는 여전히 강의는 강의라는 생각과 이따금 강의에서 들은 멋진 생각, 좋은 이야기에 감동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자세로 모임에 출석했다. 주님을 믿고 결단하라는 권유에도 어떻게 영접하고 초청하는지에 대해 한 번도 반응하지 않았다.
65년 4월경에 이르러서야 그래도 무언가 나를 흔드는 영향력 조금씩 느끼고 두려워서 CCC를 갔다가도 다른 모임에도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6월에 김준곤 목사님이 입석 수양회에 관해 설명하면서 꼭 참석해야 한다고, 생애 중요한 기회라며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을 강조했다. 장소 역시 시내가 흐르고 녹음이 우거진 경치가 좋은 곳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들면서 내심 ‘사람이 어떻게 하면 저렇게 말에 자신이 있는지?’ 하다가도 강요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여름이 되었고, 7월 20일, 입석 수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처음은 도심을 벗어나니 기분은 좋았다. 도착하자마자 친구들과 신나는 마음에 배구를 했는데, 그만 다쳐서 발가락 사이가 파상풍에 걸려 그분이 말하던 경치 좋은 곳에서 꼼짝도 못 하고 누워만 있는 신세가 되었다. 게다가 비가 내려 돌아가고 싶어도 길이 끊겨 갈 수도 없었다. 수양회 첫날부터 상처는 크게 환원되어 3~4일을 앓기만 했고, 내 마음도 불만으로 가득 차올라 집회에서 일어난 은혜는 경험조차 하지도 못했다. 그랬던 나였는데 뜻밖에 주님은 나를 찾아와주셨고, 마지막 순간에 나도 주님을 은혜로 만났음을 고백할 수 있었다. 그때 다들 간단히 고백하는데 혼자서 얼마나 길게 고백했던지 강용원 형이 마치고 따로 불러서 설명이 너무 길었다고 꾸중 들었던 것도 이제 추억이 되었다. 수양회 이후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계속해서 경험하는 것에 감격하고 기뻤던 일들이 어제처럼 새롭다.
CCC에서는 나처럼 극적으로 주님을 만난 형제들도 있었고, 어떤 이는 사영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 수많은 권유에도 영접도 안 하고 끝까지 버티다가 나중에 개인적으로 영접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형태는 다 달랐으나 그 변화는 모두 동일했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CCC를 통해 차별 없이 똑같이 구원의 기름을 부어주시고 그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공동체로 만들어주셨다. 이것은 구원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교제하게 되는 축복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동일한 축복과 영광이 지속되는 삶을 살고 있다. 기독교는 교훈이 전부가 아니다. 또 교리나 신학적인 책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며 기독교의 초점이 되지 못한다. 기독교의 중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인생에 초청하여 그분과 구체적인 사귐과 교제가 시작되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이 전부다. 그것이 우리를 지혜롭게 하고, 그것이 우리 삶을 축복의 현장으로 만들어주며, 그것이 나로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는 영광도 주는 것이다.
이런 CCC에도 중대한 문제가 한 번 있었다. 1964년, CCC에서 ‘Medical Society(아가페)’라는 모임이 생겼다. 간호학과와 의학과 학생들이 동아리 이름을 짓다가 그렇게 정했다. 김경수, 홍덕원 할 것 없이 많은 의대생과 간호학과 학생이 모여 함께 시골로 봉사를 다녔다. 그러던 와중에 1965년에 ‘Economic Welfare Society(EWS)’, 경제 복지를 꿈꾸는 그룹이 생기더니 CCC에서 주요 활동을 하던 박성준 부회장, 한명숙 여자 부회장, 김근태, 이창식, 서경석 할 것 없이 CCC 내의 엘리트 모임이 결성되었다. EWS의 회장은 박성준이, 상대 선배이자 당시 육사 교관이었던 신영복의 주도로 유명 강사를 섭외하고 좋은 강좌를 마련했다. 이 모임에는 호소력이 있어서 그런지 곧 젊은이들이 모이는 숫자가 증가하였고, 모임 중에 사회와 경제 중심의 토론과 강의 모임이 시작됐다. 둥지 안에서 또 다른 둥지를 튼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며 기독교인의 사회 운동을 강조하던 열성적인 EWS와는 달리, 그 외 다른 형제들은 사영리를 들고 학교 밖을 나서서 개인 전도를 하던지 농촌 전도를 하면서 성경 공부에 주력하였다. 나는 후자 그룹에 있었는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성경이었다. 그래서 CCC는 내부적으로 사회활동을 하는 그룹과 성경을 강조하며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전도그룹으로 자연스럽게 나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일제 강점기에도 있었는데, 교회 안에 민족과 국가를 위한다는 사람들 가운데 복음에 중심을 둔 무리와 새로운 세계, 새로운 학문을 추구하는 문화기독교 무리로 나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교회가 조선의 독립을 꿈꾸는 진원지라 결론을 내리고 엄청난 핍박을 가했다. 그때 문화기독교를 믿던 사람들은 모두 교회를 떠났다. 이광수, 명석하기 그지없던 주요한 선생 등, 민족의 뛰어난 수재들이자 인간적으로 위대한 면모가 있었던 그룹들, 문화인들은 모두 기독교를 떠났다. 그러나 예수가 내 생명이라고 확신했던 참 그리스도인들은 죽어가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다가 생애를 마쳤다. 당시를 경험했던 한 그리스도인은 가라지는 사라지고 알곡만 남은 순전한 그리스도의 교회였다고 고백했다. 그 핍박 속에서 시금석이 된 것은 우리 역사에 중요한 사건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예수 생명과 연결된 사람들은 끝까지 오직 예수. 오직 복음. 오직 성령을 붙잡고 CCC 안에 있었고, 사회 복지를 생각했던 사람들은 결국 예수 복음을 전하는 것에 지겨운 나머지 CCC를 떠났다. 그때 CCC는 고통스러웠지만 이 일로 결국 우리는 온전한 예수 공동체로 거듭났을 뿐 아니라, 그 공동체가 필요 없는 사람들은 모두 정리가 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진정한 씨알들만 남아서 민족 복음화의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게 되었다. 우리는 몰랐지만, 그런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꼭 붙잡아야 할 것과 버려도 되는 것을 정리하는 시기였다.
III) 메시지 그리고 훈련
1960년대 한국 사회, 경제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농본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이제껏 경험하지 않았던 큰 변화에 무척 혼란스러워했다. 비록 나는 산업화한 곳에서 경제활동을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고향 함평에서 대도시 서울로 온 나 역시 그 변화를 몸소 충분히 느끼고 있던 터였다. 사회는 확장되었으며, 내가 자란 시대와 달리 이윤을 추구하며 빠르게 변화하는 대도시에서의 혼자 고립된 삶은 삭막하고 외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가운데 CCC에서 받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메시지는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메시지는 성경 전체를 요약해서 전할 때 가장 쉬운 메시지인데, 그 시대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능력으로 파고들었다. 그냥 길가의 조약돌처럼 아무렇게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분이 나에 대한 놀라운 계획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격하며 자연스럽게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1968년, 공동체 순과 사랑방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는 민족 복음화를 위한 가장 작은 단위의 모임으로, 이 작은 모임이 대학과 민족의 구석구석까지 조직되어 기도가 끊이지 않게 했으며,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전도하면서 교회가 없는 마을에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김준곤 목사님은 미국 유학 중에 민족 복음화에 대한 소망을 두고 캠퍼스 선교를 통해 CCC를 설립했는데, 순과 사랑방 운동으로 그 범위가 점점 확대되자 1970년 12월 31일 CBS 재야 방송을 통해 ‘민족 복음화 운동’을 공식 선언함으로써 그 꿈은 가속화되었다.
당시에 미국 CCC에서 나일스 베커 선교사 부부를 LTC(Leadership Training Course) 강화를 위해 한국으로 파견하였다. 그는 강의를 통해 사영리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체계적으로 강의하며 한국 복음화를 도왔는데, 하루는 CCC 본부 총무를 맡고 있던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홍 총무, 한국 사람들을 보니까 굉장히 헌신적이고 열정이 대단합니다. 이런 민족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늘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훈련받는 것을 싫어하고 팀을 배려하기보다는 스스로 결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의견을 받아 김준곤 목사님은 LTC의 극대화 및 가속화를 위해 교사를 지도자로 훈련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이미 가르치는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기에 일반적인 직군의 사람들보다 효과가 빠를 것이라는 이유여서였다. 김 목사님의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우리는 조를 나누어 전국 각지에서, 군 단위, 면 단위까지 쫓아다니며 초, 중, 고, 대학 교수까지 신앙을 가진 선생님을 초청하여 교회에서 청년들과 함께 LTC를 했다.
그러던 와중에 1970년 12월 겨울, 민족 복음화 운동 훈련 요원 강습회로 서울대 수원 캠퍼스에 공동체가 모였다. 집회가 무르익었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게 하셨고, 마지막 날, 폭설이 내리는데도 마치 전쟁을 앞두고 사기를 북돋는 군무를 추는 전사처럼 우리는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이제 민족을 향해 나가는 결의를 다지며 춤을 추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인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고 마치 거지처럼 전도를 하기로 결의했다. 전도의 주 대상은 학교 교사들이었다. 교사들을 전도하고 또 기존 신자인 교사들에게는 LTC를 권하는데, 앞서 수원 강습회에서 거지 전도에 이미 헌신된 우리는 복음에 불이 붙어 곳곳으로 나아갔다. 마치 모라비안처럼, 수도사처럼, 거지처럼 아무것도 없이 주의 말씀만 붙잡고 나아갔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정말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네 아버지인 것을 믿으면, 또 그분이 너의 모든 길을 인도하시고 필요를 채워주심을 믿는다면 아무것도 없이 전도 길에 오르자.’ 정말 많은 젊은이가 거지 전도로 교회에서 쪽잠을 자면서 사영리로 복음을 전했더니, 대접을 받고 적은 액수지만 노잣돈까지 받아가며 전도를 한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 참 놀라운 일이었다. 이렇게 전도에 불이 붙은 우리는 도시에서 시골까지 어디라도 복음을 전하며 다녔는데, 우습게도 다들 가난하여 김준곤 목사님 외에는 아무도 차가 없었다. 물론 운전도 못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부산에 있던 원정희 간사가 자원하여 내가 살던 서울 수유동 맞은편 집으로 이사를 와서 우리는 그분 차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하나님은 참 신기하게도 때마침 경부고속도로를 개통시켜 주셔서 전국 각지에 LTC를 청하는 학교, 교회가 있다면 신나게 달려가게 하셨다. 아니, 미친 듯이 달려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광주지구를 담당하던 김안신 간사는 우리 모두 목사님을 모시고 당나귀를 타는 산초처럼 뒤따라가자며 너털웃음을 주어 우리는 피곤을 잊고 전국 각지를 돌았다. 민족 복음화를 꿈꾸는 돈키호테 김준곤 목사 그리고 그를 따르는 산초 CCC 형제들. 그들은 한국교회에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갔고 그렇게 전해진 복음의 불씨는 대형 집회로 이어져 수많은 군중이 성령을 체험하는 시대를 열었다.
1971년 8월,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훈련 요원 강습회를 열기로 했다. 훈련생 1만 명을 목표로 한 초대형 집회였다. 이런 규모의 집회는 이제껏 대한민국에 없던 규모였다. 그래서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대부분 목사님의 대답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너희들이 아직 뭘 몰라서 그렇지 어떻게 1만 명이 모이나? 모두 할 수 없는 일이라 단정을 지었다. 그런데 오히려 너무 큰 어른이라 생각되어 만남조차 어렵다고 생각했던 한경직 목사님은 자애로운 미소로 맞이해 주시며 젊은이들은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이라 격려를 해주었고, 이화여대 김활란 총장은 열심히 기도하겠다며 우리를 지지해 주었다. 그렇게 두 분이 고문으로 도와주시자 도움의 손길이 점점 늘어나 집회가 열리게 되었다. 사실 우리가 1만 명을 목표로 집회를 준비하긴 했으나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올 줄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우리의 염려와는 다르게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대전 충무체육관이 빈자리 하나 없이 가득 찼고,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 젊은 청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다는 사실에 서로가 놀라고 기뻐했으며 감격했다. 모임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동과 기쁨을 충만히 누리는 집회였다.
대전 강습회는 CCC의 다음이 되는 중요한 기폭제였다. 여기서 축적된 영적인 힘은 이제 CCC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단계에 이르게 하여, ‘춘천 성시화 운동’을 시작으로 각 도시에 성시화 운동이 일어났고, 1972년 김준곤 목사님이 미국 달라스 EXPLO ‘72에서 EXPLO ‘74 한국개최를 선언하여 2년 후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EXPLO ‘74를 개최하였고323,419명이 등록했다. 당시 한국 기독교 인구가 약 300만 명이었는데, 등록 수는 32만 명이 넘었으나, 밤에는 100만여 명이 모여서 집회하고 철야기도를 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축복 속에서 참석한 수많은 사람이 성령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했으며, 이는 교회를 위한 전도 운동으로 이어져 한국에 영적 부흥을 일으켰고, 5만 9천 마을 대부분에 교회가 세워졌다.그렇게 EXPLO ‘74의 은혜는 하나님의 인도로 계속되었고 한국의 경제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 교회의 발전과 한국 경제의 발전은 동일한 그래프를 그리며 급상승했고, 1980년대 800만 크리스천으로 전 국민의 25%가 예수를 믿는 나라로 성장할 때까지 계속 힘차게 부흥의 현장을 걸었다. 이어서 문화, 체육 할 것 없이 발전하여 이제는 세계에서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성장하여 자유민주주의의 복을 누리는 나라가 되었다.
간혹 나의 지난날을 뒤돌아보며 주변의 역사도 함께 볼 때면 어떻게 이런 시간이, 이런 변화가 우리에게 있었는지 믿을 수가 없다. 가까운 나라인 중국만 보아도 하나님이 없고 자유가 없는 사회가 문화혁명과 같은 사건을 일으키며 얼마나 무섭고 억압된 사회로 퇴보하는지 보면서, 비슷한 시기에 영적 부흥을 경험한 축복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혁명이 우리에게 있었음을 고백한다.
가난하고 공허했던 나의 젊은 시절, 나는 CCC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을 뿐인데, 주님은 나를 위로하셨으며 소망을 주셨고 민족 복음화 운동의 꿈을 현실로 실현해주셨다.
이제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많은 사람이 주님 나라에 앞서갔고, 나도 얼마가 있으면 뒤따라갈 터인데 아마도 천국에서도 이 땅에서 받은 은혜는 계속 기억하고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리지 않을까 싶다. 나의 삶을 풍성하게 하신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