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저 온 통일’, ‘인권의 증인’을 넘어 동등한 시민으로 ‘환대’하기 -
들어가는 말
‘북한이탈주민의 날’(이하 ‘탈북민의 날’)이 7월 14일 국가기념일로 전격 제정됐다. 북한이 남북한을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로 선언함에 따른 즉흥적 반작용이었다. 충분한 여론 수렴 없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정치적으로 결정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당사자인 탈북민은 물론, 다수의 국민들도 기념일 제정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좀 더 일찍 제정됐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차제에 기념일 제정의 의미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요구된다. 북한에 대한 대한민국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정치적 의미인가? 아니면 탈북민의 정착과 국민통합을 위한 체계적 준비과정인가? 기념일 제정이 탈북민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와 인식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면서 ‘탈북민의 날’ 제정의 배경, 의미, 문제점 및 향후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탈북민의 날' 제정 배경
‘탈북민의 날’로 제정된 7월 14일은 1997년에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북한이탈주민법)이 시행된 날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북한의 대남 주적 명문화와 관련해서 “한국을 위협하는 것은 북한 정권이지 북한 주민이 아니다”라는 인식으로 기념일 제정을 지시했다. 탈북민도 대한민국 국민임을 상기시키면서 통일의 대상이 북한 정권이 아닌 북한 주민임을 부각시키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 김씨 일가의 생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듯이, 한국에서도 탈북민 기념일을 제정함으로써 탈북민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북한 주민에게도 충격과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박충권 국회의원(국민의힘)이 ‘탈북민의 날’을 대통령령이 아닌 법률로 격상하고, 1주일간 북한인권 교육주간을 신설하자는 요지의 북한이탈주민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다.
제1회 ‘탈북민의 날’ 행사에는 기념식을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주요 행사는 남북한 주민 간 통합 및 북한인권 기념식이다. 특히 탈북과정에서 희생된 탈북민을 기억할 수 있는 추모행사와 북한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포럼 개최 등이 주목된다. 더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의 성공적 정착 경험을 나누는 토크콘서트, 특별전시회, 공연 및 체육활동 등 남북한 주민이 함께 참여하는 다양한 행사가 예정돼 있다. 일각에서는 남북한 간 첨예한 대결 구도하에서 정치적 의미로 제정된 측면이 있다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한다. 탈북민들의 권익을 증진하고 국민들의 인식변화를 위해 좀 더 일찍 제정됐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탈북민의 날' 의미 재성
기념일 제정의 핵심 키워드는 ‘탈북민 포용과 정착지원’, ‘탈북민 및 북한 주민의 인권’, ‘통일인식의 제고’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탈북민의 포용과 정착지원
한국 사회는 이제 3만 4천명의 탈북민 시대를 맞이했다. 1997년 북한이탈주민법이 제정된 이후 다양한 제도와 사업이 시행되고, 지원 방향도 ‘보호’에서 ‘자립능력 향상’으로 점진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는 양적인 정착 지표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준다. 취업률과 고용률이 꾸준히 증가하고, 기초생계 수급률도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탈북민 출신 국회의원도 이미 4명을 배출했고 분야별로 전문가층도 두터워지고 있다. 공무원, 연구원, 교수,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도 늘고 있으며 서비스업, 제조업, 전자기계, 농축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창업가로서, 직장인으로서 안착해가고 있다.
그럼에도 탈북민이 현실에서 체감하는 경제적 수준이나 삶의 만족도는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 외형적 정착의 이면에는 내면적 어려움이 엄존한다. 정착의 질적 지표가 이를 대변해 준다. 탈북 과정과 재정착 과정에서 겪는 위기적 사건들로 인해 우울증,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같은 심리정서 및 정신건강의 어려움을 호소한다. 또한 일반 국민에 비해 기초생계 수급율이 상대적으로 높으며 탈북민의 자살률과 범죄율도 상대적으로 높다. 성공한 창업가로서 세간의 주목받았던 청년의 예기치 않은 자살 소식, 사망한 지 몇 개월이 지나서야 발견된 고독사 소식 등은 우리 모두에게 충격을 준 가슴 아픈 사연들이다.
대다수의 탈북민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은 정체성과 시민권의 문제다. 한국에 입국함과 동시에 헌법에 의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법적·정치적 시민권을 부여받지만 이러한 외형적 요건과 달리, 북한 출신이기 때문에 자신의 고향과 사회·문화적 배경을 부인해야 하는 정체성의 고민에 직면한다. 분단 체제하에서 북한의 적대적·공격적 이미지가 자신들에게 투사되어 편견과 차별의 대상이 되곤 한다. 역사와 언어와 정서를 공유한 같은 민족이면서도 경제적·사회문화적 소수자로서 취급되기도 한다. 한국 국민들이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배제하고 자본주의식 인식에 젖어 탈북민을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등 국민’으로 취급할 때, 강한 거부감과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탈북민의 날 제정 의미는 탈북민의 정착이 법적·제도적 지원체계를 넘어 사회통합과 포용을 준비할 때임을 부각시키는데 있다. 정치적 시민권을 넘어서 사회문화적 시민권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2) 탈북민 및 북한 주민의 인권
탈북민은 북한 인권의 실상을 보여주는 산증인이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기간에 수십만의 북한 주민이 아사하고 대량 탈북과 인권유린이 있었던 아픈 경험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정부는 기념일 제정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롭고 번영된 미래에 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민족분단의 고통을 가장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탈북민을 통해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를 일깨우고자 함이다.
북한 주민과 함께 탈북민은 우리 국민이 보호해야 할 대상임을 국내외에 알리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그동안 북한 인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실질적인 결실을 맺는데 기여해 온 측면이 있다. 그러나 과도한 관심이 제3국에 있는 탈북자들의 인권에 악영향을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탈북 과정에서의 무분별한 언론 노출이 이들의 생명과 안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사회 내 탈북민에 대한 인권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정착 과정에서 탈북민이 무관심, 혐오, 편견, 차별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이들의 인권에 주목해야 한다.
(3) 통일인식의 제고
우리 정부는 “탈북민의 성공적인 한국 정착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고 사회통합은 통일을 준비하는 것이며, 탈북민의 날은 국민의 통일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탈북민이 성공적으로 정착해 남북주민 간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이 한국 주도의 통일을 견인할 수 있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의 공식 입장을 떠나, 탈북민은 그 존재 자체로 이미 국민들의 통일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통일에 대한 무관심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탈북민에게 통일은 간절한 소망일 수밖에 없다. 북한 땅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으로서 언제나 가고 싶고, 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난과정과 고난극복의 스토리텔링을 ‘통일’이라는 거대담론과 함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전 세계에 전파하는 적극적 전달자일 수 있다. 더 나아가 탈북민의 존재는 남북분단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분단을 뛰어넘어 남북한 간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새로운 자원임에는 틀림없다. ‘탈북민의 날’이 탈북민과 한국 국민 간 연대의 계기가 되어 견고한 통일팬덤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책제언: 동등한 시민으로 환대하기
(1) 탈북민과 자녀 세대에게 다양한 기회의 사다리가 보장되는 사회여야 할 것이다.
대다수의 탈북민은 한국사회에 온 것에 감사하며 성실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 중국과 제3국을 거쳐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고난을 경험하고 이를 극복하는 성공신화를 이룬 분들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과 가족, 특히 자녀세대들에게 바라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자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부모 세대의 경제적 자립과 함께 자녀 세대의 미래에 대한 보장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탈북민의 날을 계기로 중국 등 제3국에서 낳은 탈북민 자녀에게도 대입 특별전형, 대학 학자금 지원 등 교육지원이 이뤄진다는 소식은 반가운 일이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부모·자녀 세대 모두에게 교육, 문화, 취업 등 기회의 사다리가 제공돼야 할 것이다.
(2) 탈북민의 포용과 정착지원을 강조하는 것이 이들의 특수성을 부각해 통합에 저해 요인이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기념일이 탈북민의 의미를 확산하고 권익을 향상하는 것이지만 국민과 차별되는 특수성이 강조될 수 있다. 현 정착지원정책과 체계는 탈북민의 특수성에 기초하고 있어 이들을 시민사회로부터 분리시키고 주변화할 수 있다고 비판받고 있다. 이들을 ‘특별대상’에서 ‘일반대상’으로 전환하자는 논의도 제기되는 실정이다. 이들의 존재가 역사적 특수성을 가지지만 이로 인해 시민사회로부터 분리, 배제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기념일의 의미가 지역주민과의 교류를 확대하면서, 탈북민을 나와 동등한 시민이자 이웃으로 인식하고 포용하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다. 이날이 7월 행사로 그치지 않고 국민 전반의 인식을 전환하고 우리 사회의 변화를 견인해야 할 것이다.
(3) 북한 인권 강조가 탈북민을 피해자, 약자 프레임 강화로 이어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탈북민은 재북 및 탈북과정에서의 인권 침해를 알리는 인권의 산증인이다. 자신들과 북한 주민의 인권 상황을 증언함으로써 국내외에 관심을 제고하고, 인권 개선을 유도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북한 인권의 강조가 자칫 탈북민을 수동적인 희생자로 정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피해자, 약자, 수동적 존재로 인식하다 보면 이들의 강점, 주체성이 간과될 수 있다. 이는 남북주민의 상호 기여자, 동반자로서 동등한 인식과 역할이 가려지고 사회통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탈북민의 강점, 주체성, 적극성이 강조되는 임파워먼트 정착 정책과 홍보가 병행돼야 할 것이다.
(4) 탈북민은 ‘먼저 온 통일’, ‘인권의 증인’이기 때문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존재 자체로 ‘환대’ 받아야 할 것이다.
탈북민을 우리 사회의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고 환대하는 통일환경이 마련되길 기대한다. 한국 사회는 이들을 ‘귀순용사’, ‘먼저 온 통일’, ‘북한인권의 증인’, ‘통일의 가교’ 등으로 불렀다. 이들에 대한 지원과 포용은 ‘먼저 온 통일’이라는 통일 대상으로서 수용되었지만, 함께 살아가는 우리 이웃으로서는 적극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존재가 북한 인권 개선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또는 북한 주민에게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이나 자유통일의 필요성을 알릴 수 있는 존재라는 도구적, 정치적 이유로 환영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들은 존재 자체로 존중받고 소중하게 여겨져야 한다. 특히 하나님 나라에서는 북한 주민, 탈북민도 하나님의 백성이자 자녀이다. 크리스찬들은 ‘탈북민의 날’을 한국 사회에서 이방인일 수 있는 탈북민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접하고 환대를 실천하는 날로 기념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한반도평화연구원 웹진에 실린 글을 재게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