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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종교개혁자 츠빙글리 종교개혁의 확장
주도홍 교수(역사신학, 백석대 전 부총장) 506주년 종교개혁주일 기념 칼럼
 
주도홍   기사입력  2023/10/27 [17:56]

오는 10월 31일은 종교개혁 50주년 기념일이다. 주도홍 교수(역사신학, 백석대)가 쓴 '개혁교회 종교개혁자 츠빙글리 종교개혁의 확장'을 게재한다.(뉴스파워)

▲ 주도홍 박사(기독교통일학회 설립회장)     ©뉴스파워

 

 

베이커는 옥스퍼드대학교가 1996년 펴낸 종교개혁 백과사전, 4이 제시하는 “Zwinglianism”에서 츠빙글리 종교개혁의 지리적 확장과 개혁교회 전통의 출발을 설명한다. 1520년대 후반 츠빙글리 종교개혁은 스위스 다른 연방으로, 몇몇 독일 남부 도시, 무엇보다 스트라스부르와 콘스탄츠, 독일의 헤센(Hessen)과 뷔르템베르크(Wuerttemberg), 1540년 이후 프랑스, 헝가리,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스코틀란드로 확장되었다. 베이커는 츠빙글리주의의 전개를 전반적으로 3단계로 소개한다. 1단계는 루터주의(Lutheranism)와는 구별된 개념으로 1520년대와 1530년대 취리히 츠빙글리와 그의 후계자 불링어를 중심으로 일어난 스위스 종교개혁을 일컬으며, 2단계는 1540년대부터 16세기 말까지 개혁파 개신교가 츠빙글리주의와 칼빈주의(Calvinism)의 거대한 영향을 받는 단계이고, 마지막으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기에 이르기까지 츠빙글리주의가 많은 지역으로 퍼지면서 칼빈주의 정통주의로 통합되는 단계다.

 

무엇보다 츠빙글리주의는 특별히 세 가지 주제에서 루터주의와는 차별성을 보였는데, 성찬론, 기독교적 공동체, 도덕법이었다. 츠빙글리는 루터가 주장했던 성찬의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께서 살과 피로 함께한다(real presence)는 공재설을 부정하며,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며(signify),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한다”(152910M. Luther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라고 주장했다. 루터와 츠빙글리 등 종교개혁자들이 1529년 독일의 마르부르크 성에서 함께 만나 이에 대해 토의했으나, 일치를 보지 못했다. 당시 모인 각 편의 인물들은 루터를 지지하는 인물로는 루터의 동역자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비텐베르크의 장로 요나스(Justus Jonas), 뉘른베르크의 오시안더(Andreas Osiander), 슈바벤의 브렌츠(Johannes Brenz), 아우그스부르크의 아그리콜라(Stephan Agricola)였고, 츠빙글리 측 세 인물로는 927일 미리 도착한 스위스 바젤의 외콜람파드(Johannes Oekolampad), 스트라스부르의 부쳐(Martin Bucer)와 헤디오(Caspar Hedio)였다. 비텐베르크에서는 930일 도착했으며, 남부 독일에서 온 루터 측 브렌츠, 아그리콜라, 오시안더는 회담이 이미 진행 중인 102일에 왔다. 그들은 모두 성주 필립이 숙식을 제공하는 회담 장소 마르부르크 성에서 함께 묶었다. 1531년 츠빙글리가 세상을 떠나고, 1536년 불링어가 주도적으로 작성한 제1 스위스 신앙고백(The First Helvetic Confession, 1536)이 발표되었는데, 여기서 불링어는 츠빙글리의 성찬 이해를 재확인하였다. 같은 해 후반 독일 루터의 비텐베르크와 스위스 츠빙글리의 취리히의 일치를 위해 부처의 수고로 나온 비텐베르크 일치 신조’(Wittenberg Concord)를 불링어는 거부하면서, 츠빙글리와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불링어는 일생 츠빙글리와 같은 입장에 섰다.

 

두 왕국론을 주장한 루터와는 다르게, 츠빙글리의 기독교공동체(Christian Community)를 향한 이해는 그냥 단면적이다(single sphere). 츠빙글리는 당시의 행정관료와 신약 시대의 장로를 다르지 않다고 보았는데, 곧 세속 재판정과 교회 재판정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 결국 츠빙글리의 기독교공동체를 향한 이해는 가장 독특하며, 츠빙글리주의 전통을 마지막까지 대변했다.

 

츠빙글리주의가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시점은 대략 1540년대부터 16세기 말까지로 보는데, 츠빙글리와 불링어의 종교개혁은 프랑스, 헝가리 그리고 오스트리아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주었는데,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지역으로는 먼저 스위스를, 그리고 하이델베르크를 위시한 독일의 라인란드팔츠, 네덜란드, 영국, 스코틀랜드를 들 수 있다. 1540년대 츠빙글리주의는 스위스 종교개혁을 일컫는 말이기도 했는데, 1536년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통해 츠빙글리주의에 비교되면서, 츠빙글리주의는 무엇보다 세 가지 면에서 차이점이 드러났는데 성찬론, 예정론, 교회 훈육에서였다. 그렇지만, 예정론과 교회 훈육과는 다르게 성찬론에서 칼빈과 불링어는 서로의 우정에 힘입어 세 주제 중 가장 수월하게 일치를 보았는데, 그것은 1549‘Consensus Tigurinus’였다. 칼빈의 이중예정론과는 다르게 불링어는 만인예정론에 근거하며 단일 예정론을 제시하였는데, 칼빈이 예정론으로 볼세크와 논쟁할 때 불링어는 칼빈을 매섭게 비판하였다. 예정론은 츠빙글리주의자들과 칼빈주의자들 사이 합의점에 이르지 못한 채, 17세기 아르미니우스 논쟁으로까지 이어져야 했다. 기독교 훈육(치리)의 주제와 교회 안에서의 시민 행정관의 역할은 일치를 보지 못한 가장 신랄한 논쟁거리였다. 칼빈은 바젤의 종교개혁자 외콜람파디우스의 입장, 곧 교회 치리와 출교를 위해 교회 법정 컨시스토리(Consistory)를 세우는 일에 동의했는데, 이는 세속정부로부터는 독립적이고, 교회의 순수성을 위해 그리고 선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죄인들을 회개하고 돌아오기 위해 요구되는 일이었다.

 

16세기를 통틀어 츠빙글리 사상은 영국에 칼빈주의와 비교할 때 훨씬 강력한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언약 신학과 기독교공동체에서 그러했다. 틴데일, 커버데일, 후퍼 같은 이들은 취리히와 직접 교류하며 언약 신학을 발전시켰다. 1530년대 초 틴데일(William Tyndale)의 언약 사상은 츠빙글리 사상의 영향을 받았는데, 언약 사상은 16, 17세기에 걸쳐 영국교회의 사랑을 받았다. 1570년대 초기 기독교공동체 사상은 칼빈주의가 등장하기까지 영향을 주었는데, 트라버스(Walter Travers)와 카트라이트( Thomas Cartwright)가 제네바에서 베자(Beze)에게 배운 칼빈주의에 근거한 장로회주의를 대변하기까지였다. 이에 반해 와이트기프트(John Whitegift)와 후커(Richard Hooker)는 츠빙글리주의를 따랐다. 그렇지만 1600년 이후 칼빈주의 영향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영국을 강력하게 정복하였다. 1500년대 50종에 달하는 불링어의 저서가 영국에서 영어로 출판되었으나, 1600년 이후 단 한 권만이 출판되었을 뿐이다. 커버데일(Miles Coverdale)1541년 불링어의 Der alt glaub(옛 신앙)를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으며, 후퍼(John Hooper)1547년부터 1549년까지 취리히에서 불링어와 함께 생활했으며, 켄터베리의 대주교 크랜머(Thomas Cranmer)의 신학은 츠빙글리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메리 여왕의 박해 시절 20명의 영국 학자들이 취리히로 피신하였다. 불링어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드 1세를 대적한 교황의 칙서에 대한 답을 써서 1571년 라틴어로, 영어 번역은 다음 해 1572년 발간되었다. 불링어의 설교집 ‘Decades’가 열 설교를 한 묶음으로 하여 전 5장으로 이뤄졌는데, 1577년 링컨(Lincoln) 교구에서 1588년 켄터베리 지역의 목사안수를 받는 목회 사역을 위한 교재로 출판되었다. 이처럼 16세기 영국교회가 취리히와 긴밀하게 관계를 갖게 되었고, 츠빙글리주의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T. Wayne Baker, “Zwinglianism”, The Oxford Encyclopedia of the Reformation, Vol. 4, 323-327).

 

또한 탁월한 칼빈 연구자 독일의 노이저(W. Neuser, 1926-2010)는 유드(Leo Jud), 외콜람파드(Johannes Oekolampad, 1482-1531),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 초기 불링어(H. Bullinger, ), 카피토(Wolfgang Capito, 1478-1541), 1536년에 작성된 제1 스위스 신앙고백(Confessio Helvetica Prior, Das Erste Helvetische Bekenntnis) 그리고 마르틴 부쳐(Martin Bucer)가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서술한다(HDTh, BD2, 197-238).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 교수로서 츠빙글리 연구자 갭블러(Ulrich Gaebler, 1941- )는 불링어를 자신의 시대 개혁교회를 지지하는 연방에서 츠빙글리 신학을 신앙고백의 근원으로 확고히 세운 자로 서술한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빈(J. Calvin) 역시 대표적으로 예정론과 국가론에 있어 츠빙글리와 차이를 부정할 수 없지만, 츠빙글리의 신론, 율법 이해, 참회, 칭의와 구원의 협업 등 이에 관한 모든 주제를 루터와는 다르게 츠빙글리의 입장에 서있는데, 이러한 칼빈의 모습은 기독교강요를 통해서 제시되는데, 이는 결국 개혁교회의 전형으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곧 츠빙글리는 불링어와 칼빈을 통해 칼빈주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렇다면 츠빙글리야말로 개혁파 개신교의 설립자 중 한 사람으로서(as one of the founders of Reformed Protestantism) 간주 될 수 있다는 것이다(Gaebler, 158-160). 위스콘신대학교의 역사학 교수 완들(Lee Palmer Wandel, )은 옥스퍼드대학교가 1996년 펴낸 종교개혁 백과사전(The Oxford Encyclopedia of the Reformation) 4권에서 츠빙글리를 개신교 종교개혁자요, 개혁신학 전통의 설립자로서일컫는다. 루터와 대척점에 섰던 츠빙글리의 성찬 이해는 당시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후에 개신교 많은 예전에 스며들었는데, 무엇보다 영국 성공회의 예전 형성에 직접적 원천이 되었다. 루터교회나 칼빈에 의해 형성된 교회처럼 츠빙글리 교회가 형성되지 않았지만, 츠빙글리 신학은 개혁파 전통을 근원적으로 형성했다. 세상에서의 그리스도 현존의 속성 이해로서 정치와 윤리에서의 역동적 실천 그 자체로서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것으로 이해했다(L.P. Wandel, 320-323).

 

영국의 교회사가 리어돈(Bernard M. G. Reardon)은 츠빙글리의 중요한 동역자 두 사람을 일컫는데, 독일 태생으로 바젤에서 활약했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한 타고난 신학자 외콜람파디우스와 츠빙글리의 취리히 그로스뮌스터교회의 후임 목사 불링어다. 152212월 외콜람파디우스는 츠빙글리를 만난 몇 달 후 츠빙글리와 급속히 가까워졌고, 1529년부터 종교개혁을 바젤로 받아들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성찬에 실지로(substantively) 임재하지 않고 영적으로(spiritually) 임재한다라고 믿는 츠빙글리 입장에 섰다. 국가와 교회는 츠빙글리와는 다르게 온건한 구별이 이뤄졌는데, 교회는 내적이며 교육적이지만(educative), 국가는 외적이며 보복적(retributive)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국가는 죄를 지은 자에게 상응한 벌을 내리지만, 교회는 양심에 호소하고 교육하는 역할을 하는데, 성직자는 권위로 성도를 다스리는 것보다 말씀으로 호소한다. 츠빙글리가 죽은 지 몇 주 후 역시 같은 해 외콜람파드는 15311123일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물론 리어돈은 외콜람파드의 가까운 친구로서 한동안 바젤대학교의 교수를 했고 스트라스부르로 종교개혁을 확산시켰던 카피토도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은 자로 제시된다(B. M. G. Reardon, Religious Thought in the Reformation, 1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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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3/10/27 [17:56]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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