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 보이는 게 많다. 닫힌 공간에서 책만 보고 있다거나 자동차를 타고 질주했다면 어떻게 개구리밥, 잠자리, 털 강아지를 닮은 쐐기를 구경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내 발로 직접 걸어본 곳만 기억에 남는다는 말이 사실이다.
▲ 구부러진 길을 통해 인생 길에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님을 배운다. © 공학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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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을 걷는 일이란 오감을 충족시키는 총체적 경험이다. 숲에서 나는 새소리를 들으며, 풀냄새를 맡기도 하고, 나뭇잎을 만져보기도 한다. 벤치에 앉아 먼 하늘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편다. 걷다 보면 시각, 후각, 촉각, 청각, 미각이 만족스러워진다.
걸으면 분주했던 마음이 비워지고 내면의 맑아짐을 느낀다. 누구나 산책하면 철학자가 된다더니 걸으면 자연만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마음을 조율해 주므로 평온하고 균형 잡힌 마음을 얻게 해준다.
▲ 걸으면 개구리밥도 볼 수 있다. © 공학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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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은 나에게 글과 사진의 소재를 얻게 하는 보물창고다. 글은 손으로 쓰지만 글의 출처는 발바닥인 셈이다. 자연과 가까이하면서 예상치 않던 생각의 확장을 얻는다. 걸으면 자연의 넓이만큼이나 사고하는 능력도 향상된다.
베토벤은 자연을 산책하며 창조적인 영감이 얻었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도 산책하며 사과가 떨어짐을 통해서 얻었다. 아이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도 산책하면서 아이디어를 얻고 회의도 했다고 한다. 글이 막힐 때 걸으면 글 문이 열리기도 한다. 그래서 괴테는 “더 나아지고 싶다면 길을 떠나라”고 했나 보다.
▲ 걸으면 빨간 고추잠자리도 만날 수 있다. © 공학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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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 빈 의자를 보며 누군가에게 쉴 자리를 제공해 주려는 배려의 마음을 읽고, 구불구불 곡선으로 이어지는 산책길을 보며, 인생이란 순탄하게 일직선만 이어지는 게 아님을 배운다. 어떤 지점에서는 되돌아가야 할 때도 있음을 깨우친다.
현대인들은 너무 바쁘다. 바쁠수록 일상을 잠시 멈추고 자연 속을 유유자적하게 걸어보면 어떨까? 여유가 있어서 걷는 게 아니라 걸으면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큰 족적을 남긴 자들도 오롯이 자기의 내면과 마주하는 경험이 없었더라면 그 웅숭깊은 사유가 우리에게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 보기드문 좀작살나무도 산책길에 만날 수 있었다. © 공학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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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걸으며 사색함에서 그치지 않는다. 걸으며 기도할 수 있다. 자연과 마주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다. 풀과 꽃들에게 말을 걸어볼 수도 있다. 자연인들의 운동을 위한 걷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상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일생을 두고 딱 한 번만 잠시 나귀를 타본 것 외에 모두 걸으셨다. 교통수단이 없어서만은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할 수도 있는 분이셔도 늘 걷기를 고집하셨다. 걸으면서 가르치고, 전도하셨다. 걷는 것이 느려 보여도 비효율적이라고 여기지 않으셨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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