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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암 선교사 후손 감리회본부방문. 광복절에 건국포장 받아
공주영명학교 설립자로 윤대통령이 직접 후손대표에게 수훈
 
심자득   기사입력  2023/08/20 [07:16]

 

 

공주영명학교 설립자인 우리암(禹利岩·Franklin E C Williams·1883~1962)선교사가 지난 815일 광복절기념식에서 건국포장을 수훈했다. 이번 101명의 수훈자들 중 유일한 외국인이고, 선교사였고, 우리암 선교사의 사연을 전해들은 윤대통령이 직접 후손대표에게 수훈했다. 감리회 선교사로선 헐버트 이래 74년만이다.

▲ 내한한 우리암의 후손들. Bronwen Spencer Rutter(68세), Kaia Walsh (7세), Cora Walsh (5세), David Walsh (42세), Tamara Walsh (39세), Brayden Walsh (1세), Kenneth DeLee Williams Jr(63세), Grafton Addison Williams(21세). Alfred Withers WilliamsMale(57세), Brenda Jean Wright(61세), John Harmon Wright(62세)  © 당당뉴스 캡처

 

 

윤 대통령은 건국포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미국인 선교사 프랭크 얼 크랜스턴 윌리엄스 선생은 충남 공주에 영명학교를 설립한 후 30여 년간 교장으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면서 “1943년 인도 전선에서 광복군의 한·영 연합 작전을 도왔고 광복 직후엔 미 군정청의 농업 정책 고문으로 발탁돼 활동했다고 업적을 소개했다.

 

이에 앞서 Bronwen Spencer Rutter(68,) Kenneth DeLee Williams Jr 11명의 후손들이 지난 12일 감리교회 본부를 방문했다. 만남의 자리에 감리회본부에서 이철 감독회장, 태동화 선교국총무, 유성종 기획홍보부장이, 역사보존위원회에서 이광섭 목사, 황규진 목사, 민관기 목사가 참석했다. <우리암/우광복 기념사업회>의 이성복 회장(사업회 재정팀장), 구재서 장로(전 논산훈련소장), 전용수 집사(운트바이오 회장. 의정부기독실업인회 회장), 조평식(운트바이오전무, 통역), 최수연대표(이레팜) 등이 배석했다

 

이날 만남은 우리암/우광복기념사업회로부터 우리암 선교사의 건국포장 수훈 소식을 접한 후, 지난해에 이어 후손초청행사가 있음을 확인하고 감리회와의 만남 일정을 약속해 이뤄졌다.

 

우리암 선교사(Franklin Earl Cranston Williams)와 아들 우광복(George Zur Williams)선교사

 

우리암 선교사(禹利岩·Franklin E C Williams·1883~1962)1906년 미국 덴버대학을 졸업한 후 23세 약관의 나이로 조선에 파송되어 1909년 충청남도 최초의 근대학교인 공주영명학교 설립하고 1940년 강제추방(1942년 폐교)될 때까지 34년간 감리교 충청 지역 선교 책임자 및 공주 영명학교 교장을 지냈다. 우리암은 윌리엄즈를 우리말 음역한 이름이다.

 

우리암 선교사(禹利岩·Franklin E C Williams·1883~1962)

 

윌리엄스 선교사는 영명학당 설립이념 전도, 애국, 개화, 민주주의네 가지 교훈 중에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몸바치는 애국자를 기른다는 내용을 두 번째로 넣을 정도로 철저히 민족교육을 시켰다. 일제의 탄압을 이겨 내면서 민족 교육을 시켜 온 결과, 충청남도의 3·1 독립운동은 그의 제자들과 그가 세운 영명학교 교사들이 주도했다. 대한민국 내무부 장관을 지낸 조병옥 박사와 유관순 열사는 물론 그의 오빠이자 독립운동가인 유우석 지사, 중앙대학교 설립자 임영신, 한국인 최초 여자목사 전밀라, 여성교육의 박화숙, 한국인 최초 여자 경찰서장 노마리아 황인식 등이 영명학교 출신이다.

 

1940년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던 일제로부터 스파이로 의심받아 추방되어 통보받은지 2주만에 34년 살던 공주를 떠났다. 한국에서 추방된 후, 인도 가지아바드 지역에서 농업학교를 설립하여 5년간 선교사로 있으면서 영국군에 배속되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버마전선에서 일본과 싸우던 한국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대원들의 영어교육을 담당하였다.해방후 맥아더 사령관의 초청으로 한국에 다시 와서 미군정 하지사령관의 농업고문으로 박탁되어 한국농업발전과 정부수립에 기여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후에도 남아서 정부를 돕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미그기가 기총사격을 하는 중에 김포공항에서 마지막 미공군 비행기로 한국을 떠났다.

 

아들 우광복(George Z. Williams)19074월 제물포에서 출생해 14살까지 공주영명학교 수학하다가 콜로라도 덴버에서 고등학교와 의대를 마치고 의사가 된 후 1945년 광복과 함께 한국통치를 위해 온 미군에 지원하여 미해군 군의관으로 한국에 다시 왔다.

 

윌리엄스 선교사는 아들의 이름을 광복(光福)’으로 지었다. 이는 조선이 하루 빨리 일제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우리암 선교사의 간절한 열망이 담긴 이름이었다. 광복(光復)이 아닌 光福이라는 한자를 붙였는데 이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는 의도였다.

 

1945815광복 후에 군정을 위해 진주하는 미군의 군의관으로 다시 한국을 찾은 우광복은 군의관임에도 불구하고 군정책임자인 하지(Hodge) 사령관의 통역관 겸 특별보좌관으로 발탁되어 미군정시기의 인사 및 정책수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우광복에 따르면 하지의 군단이 인천에 상륙하던 4598일 하지와 우광복이 우연히 만나게 된다. 하지가 인천에 내리려는데 갑판 책임자인 육군 대령 하트먼이 한국인 3명과 말이 통하지 않아 애를 먹고 있을 때 이를 본 우광복이 하트먼에게 이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과 싸운 지하 독립운동가이며, 하지 중장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다고 얘기하고 있다고 통역해 주자 하트먼은 어떻게 한국어를 아는가물었고, 우광복은 저기 보이는 (인천의) 언덕 위 검은 지붕의 붉은 벽돌집이 내가 태어난 곳이라고 하자 하트먼이 깜짝 놀라 우광복을 하지에게 소개하여 미군정책임자 하지(Hodge)사령관의 통역관 및 특별보좌관으로 활동하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의 보좌관으로 활동할 때 하지가 우광복에게 '자네가 한국 실정을 잘 아니 앞으로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 50명을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 우광복은 어머니와 상의하여 하지에게 50명을 추천했다. 그중에서 48(35명이라는 설도 있다)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대한민국정부를 구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 국무차관의 방해를 받아 입국하지 못하던 이승만의 조기입국도 우광복의 조언때문이었다고 한다.

 

우광복은 군복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 의과대학 교수 및 보건연구기관장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94년에 87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어릴 때 뛰어놀던 한국의 공주영명동산, 11살의 어린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난 평생 잊을 수 없던 누이동생 올리브가 묻혀있는 그곳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여 지금 공주영명동산의 선교사묘역에 잠들어 있다.

 

그동안 서만철 교수(공주대 전 총장)의 헌신으로 우리암-우광복 선교사의 활동이 알려지면서 의정부와 공주시의 실업인들(CBMC)이 나서서 보은의 의미로 지난해 우리암의 후손 28명을 한국에 초청했다. 그리고 이번에 우리암의 건국포장 수훈을 위해 다시 후손 11명이 내한 한 것이다.

 

우리암 선교사의 후손들을 초대한 의정부기독실업인회의 전용수 집사가 우리암우광복선교사 기념사업회 참석자를 소개하고 조평식 전무의 통역으로 후손들이 각자 자신을 소개했다.

 

자기소개 후 이철 감독회장이 인사와 함께 한국감리교회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하면서 공주영명학교출신 중에 감리교회 인물이 많다고 소개하고 대표적으로 유관순을 거론했다. 이어 감리회에서 준비한 훈민정음이 새겨진 명함케이스와 자개볼펜 세트를 후손대표 Kenneth DeLee Williams Jr 를 비롯해 후손 모두에게 선물했다.

 

감리회역사보존위원회의 이광섭 목사는 후손들과 우리암사업회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감리교회가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우리암 선교사의 건국포장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역사관련사업에 대한 문제의식과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고 말했다.

 

기념사업회의 이성복 회장은 감리교회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많은 사역들을 하고 있는 이철 감독회장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우리암/우광복 선교사 기념사업회가 영명학교로부터 땅 4,000평을 기증받아서 현재 기념관건립을 계획하고 있다며 기도를 요청했다. 이 회장은 우광복선교사가 아니었으면 현재의 민주화도 없었을 것이고, 군인훈련소를 세우고 몇 천명씩 세례를 줄 수 있게 하신 분도 우광복 선교사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에 이철 감독회장은 헐버트기념사업회 역시 감리교회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밖에서 시작했다, 감리교회에서 시작했으면 감리교회안에 갇혔을 것인데 감리교회 밖에서 시작해 주셨기에 감리교회를 뛰어넘어 놀라운 사역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면서 우리암기념사업회도 감리교회 밖에서 시작된 것이 오히려 감리교회를 뛰어넘는 역할을 하신 것이라서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1시간여 대화를 마친 모임 참석자들은 전체 기념촬영을 하고, 개별적으로 사진촬영을 하며 교제한 후 헤어졌다. 우리암 선교사의 후손들은 12일 감리회 본부를 찾은 뒤 13일 공주제일교회(기독교박물관), 14일 공주시청과 공주영명중고등학교 유적답사, 15일 훈장 전수, 기독실업인회 세계대회 참석, 18, 공주영명중고등학교 기념예배 참석 등의 일정을 마치고 17일 출국했다.

 

 

당당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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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3/08/20 [07:16]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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