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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화 교수]기독교적 생태신학 : 성경적 창조신학과 생태윤리
한상화 교수(ACTS, 조직신학)의 한국복음주의협의회 4월 월례 발표회 발제문
 
한상화   기사입력  2023/04/17 [04:59]

▲ 한상화 교수(ACTS, 조직신학)     ©뉴스파워

 

들어가는 말

 

지구 생태계의 총체적 위기에 대한 깊은 인식으로 말미암아 1970년대 이후로 신학적으로 반응하는 기독교적 생태신학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였다. 그러한 계기로 작용한 논문이 바로 린 화이트(Lynn Townsend White Jr., 1907-87)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뿌리라는 1967년에 출판한 논문이다. 린 화이트는 이 논문에서 현 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한 사상적 뿌리가 중세 기독교에 있다고 주장하며 그것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가 인간중심적인 자연정복 사상을 뒷받침해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물론 이는 기독교 창조신학에 대한 바른 해석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을 맞이하여 기독교 신학자들은 생태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이에 대응하는 복음주의 계열에서의 비교적 초기에 출판된 책으로서 프랜시스 쉐퍼의 공해와 인간의 죽음(1970)이 있다. 쉐퍼는 린 화이트의 비판을 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에 한정하여 부분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고 겸허히 받아들이지만 화이트의 해결책은 생태계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의 입장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평등함을 주장함으로써 환경문제를 해결할 인간의 특별한 위치를 제대로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이후로 생태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과 신학적 해결을 시도한 소위 기독교적 생태신학들은 주로 진보적인 신학자들에 의해 주도되다가 90년대에 이르러서야 다수의 복음주의 진영의 연구들이 나오게 되는데 복음주의자들도 생태 문제에 대하여 공감하지만 생태신학이라는 용어를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하여 여러 가지 기독교적 생태신학들을 설명하고 평가한 후 복음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생태위기를 보다 심각히 의식하며 나오는 보다 자연친화적이며 통전적인 창조신학과 생태윤리에 대하여 간략히 기술하고자 한다. 필자는 다양한 기독교적 생태신학들이 생태계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문제 전반에 대한 정의를 함께 추구하는 소위 생태 정의를 추구한다는 지향점에 깊이 공감하며 그 윤리적 방향성과 현실적 문제의식에는 동의하지만 보다 참된 기독교 신학이 되기 위하여서는 보다 성경 신학에 근거한 신론과 창조교리에 충실하게 전개되어야 한다는 복음주의 입장을 피력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글은 앞으로 논문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예비단계의 글로서 각주 없이 대략적인 논지들을 그려보는 글임을 미리 밝혀둔다.

 

생태계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

 

21세기는 지구 생태계의 위기의 시대로서 미래 세대를 위해서 좀 더 위기의식을 가지고 삶의 양식을 바꾸어야 할 때이다. 하지만 교회는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더욱이 복음주의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 돌봄(creation care)”을 그 어느 때보다 복음의 일부로서 강조하며 하나님 나라 삶의 양태로 표현해야 할 텐데 아직도 침묵하고 미루고 있는 듯하다. 환경문제를 일부 환경 보호 단체나 운동가들의 몫으로 돌리고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머나먼 남의 이야기로 치부한다. 대부분의 예배에, 설교에, 교회 생활에 하나님의 창조 세계 돌봄에 대한 메시지와 의식은 거의 부재하고 있다. 오히려 세상과 기업은 친환경, 녹색 경영을 표방하며 강조하는데 정작 이러한 운동을 이끌어 가야 하는 세상 속에 성도들은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회개하는 심정으로 경각심을 일깨워 본다. 그리스도인만 아니라 그야말로 전 세계 인류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우리 모두의 홈인 지구의 위기에 이제 우리의 눈을 돌려야 할 때이며 생태적 의식을 고취하여 변화를 일궈내어야 할 때이다. 인구성장과 과소비 문제, 물과 식량을 포함한 자원고갈, 종의 대량 멸종으로 인한 생물학적 다양성 상실, 해양 쓰레기 문제, 열대우림 파괴, 토양층 감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절박한 지구온난화로 말미암은 기후 위기의 문제 등은 그냥 단순히 목록으로 읊고 넘어갈 문제가 아닌 하나하나가 우리의 책임이며 신앙과 관계된 문제들이다. 그리하여 이 문제 하나하나에 대하여 전문적인 데이터들을 기반으로 한 정확한 정보가 성도들에게 그리고 일반 대중들에게, 보다 쉽게 이해되고 직접 피부로 느껴질 수 있도록 정리되고 제시되어 유포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지구를 구하기 위해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필자도 이 글을 준비면서 여러 생태신학 책들을 접하며 보다 깊은 위기의식에 도달하였는데, 복잡하고도 근본적인 문제인 정치, 경제 제도 개혁의 필요성에 대하여는 일단 접어두고라도, 실질적으로 각 로컬 신앙 공동체 삶의 양식의 변화, 결국은 성도들의 윤리적 실천에 그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고 보았다. 교회 지도자들은 생태계 위기에 대하여 좀 더 문제의식을 가지고 각 교회 공동체에서 바른 성경적 메시지를 선포하고 실천 운동을 펼쳐 가야할 것이다. 또한 국가적으로는 환경문제를 정치문제로 비화하지 말고 각 영역의 전문가 집단을 결성하여 보다 깊이 있는 연구와 함께 글로컬하게 영향력 있는 활동을 펼쳐가야 할 것이다.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생태문제는 단순히 성경과 복음을 떠난 인본주의적 사회 윤리 사상이나 해방신학의 고유 주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 돌봄이라는 성경에 명시된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간의 순종의 문제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변화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의 양식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생태계의 위기는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게 피조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여서 초래된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이 마치 자신이 주인인 양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중심이 되어 과학과 기술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마음대로 파괴하여 초래한 결과이다. 이 위기에 대한 해결책은 본래적 창조 질서인 만물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청지기적 사명을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섬김의 자세로 감당하는 것이다. 즉 피조물을 자기 몸처럼 돌보고 회복시키고 보존하는 길이다. 이는 당연히 피조 세계 각 영역의 고유의 법칙과 원리에 따라서 행해져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과학과 기술이 인간 중심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으로 연구되고 사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생태계의 문제는 무엇보다 신앙의 문제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다양한 기독교적 생태신학들

 

일반 교회가 미처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생태계 위기의 상황에서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이 위기에 신학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다양한 기독교적 생태신학들이 등장했다. 복음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생태신학을 해방신학의 일종으로써 상황신학이라고 이해한다. 신학 방법론적으로 논하면, 상황신학은 말씀보다는 상황을 중요시 하여서 각 상황에 대한 일반 학문적 분석을 기반으로 기독교 교리와 성경을 재해석하는 방법으로 신학을 한다. 왜냐하면 현 문제 상황에 대한 해결이 가장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흑인신학, 여성신학, 남미의 해방 신학 등은 각각의 불의한 억압의 상황에서 해방을 추구하는 정행의 신학(orthopraxis)이라고 한다. 반면 복음주의나 개혁주의 신학은 본래 말씀으로부터 출발하고 기독교의 전승된 교리와 사상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정통 신학(orthodox theology)으로서 다양한 상황에 대하여 무엇보다 성경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신학방법론을 가진다. 그리하여 항상 현대의 상황을 우선시 하는 다양한 진보적인 신학들보다 뒤늦게 반응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다양한 기독교적 생태신학들의 공헌과 기여는 생태적 위기에 대하여 예언자적 자명종을 울리며 교회의 의식을 깨우고 환경 문제로 눈을 돌리도록 했다는 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종류의 생태신학은 상황 신학으로서 말씀보다는 현 상황에서 출발하여 본래적 기독교의 가르침에 변질을 초래하였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생태신학들 중에 국내에 몇 몇 예외들이 있는데 송준인의 개혁주의 생태신학과 장도곤의 예수 중심의 생태신학이다. 두 저자 모두 기본적으로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충실하고자 하는 접근을 보여주는데 전자는 하나님 중심적 접근을 시도하고 후자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 접근을 시도한다. 추측컨대 이 두 저자가 사용하는 생태신학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생태라는 주제를 그 신학적 관심의 초점으로 삼고 기독교인의 환경의식을 고취하고자 하는 의미의 생태신학이지 현대 해방신학의 일종인 상황신학으로서의 생태신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이런 면에서 몇 몇 미국의 복음주의적 생태신학들도 있고 잘못된 접근으로 말미암아 많은 비판을 받는데 여기에서 그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고자 한다.

장도곤은 21세기 초를 생태신학의 춘추전국시대라고 말하면서 여러 종류의 생태신학을 열거한다. 그 중 일부만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인간의 특수성과 우월성을 인정하며 상대적인 인간 중심 사상을 은연중 노출하지만 창조보전을 인간의 의무로 수용하는 청지기 생태신학(Douglas J. Hall) 2. 성서의 사랑과 정의의 사상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생태신학(James A. Nash) 3. 해방신학에서 유도되는 약자 해방 중심의 생태신학 4. 해방신학 또는 사회적, 정치적 정의론을 근간으로 하는 생태정의(Eco-justice)신학 5. 여성신학에서 발전되는 여성생태신학(Eco-feminist Theology), 6. 범재신론, 범신론을 수용하며 새로운 영성(New Spirituality)의 개발을 주장하는 생태신학(Moltmann), 7. 전통 교리를 배격하고 새로운 기독교(New Christianity)의 창조를 주장하는 생태신학 8. 과정철학, 과정신학에 근거하는 생태신학 9.모든 피조물의 평등을 주장하는 근원적(심층) 생태학(Deep Ecology)(Arne Naess) 10. 타종교, 특히 동양 종교의 수용을 주장하는 혼합종교적 생태신학(Ian McHarg) 11. 뉴에이지 등의 유사 종교를 근간으로 하는 생태신학 등이다. 이 목록을 보면 뒤로 갈수록 기독교적 정체성에서 멀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도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세 종류로 나누어 자연정복사상, 자연숭배사상, 자연친화 사상이라 하고 첫 번째에 하비 콕스, 에릭 러스트, 칼빈 베이스너 등을 분류한다. 이중 칼빈 베이스너는 자원무제한론을 주장하는데, 그에 의하면, 지구의 자원은 무궁무진하고 인간이 땅을 위해 창조 된 것이 아니라 땅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정당하다고 말한다. 인류 역사 초기에 인구증가를 복으로 여기던 것과 동일하게 아이를 더 많이 나을수록 잘 산다는 생각을 고수한다. 이렇듯 기독교회 안에는 아직도 성경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이해 없이 문자 주의적 이해를 현대 상황에 있는 그대로 직접 적용하여 그릇 생각하고 행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다음으로는 자연숭배사상을 소개하는데 여기에 매튜 폭스와 안 네스를 분류한다. 매튜 폭스는 창조의 영성을 강조하며 어거스틴 이후의 타락/구원 전통을 비판하면서 구원론을 강조하는 기독교는 인간 중심성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창조 중심의 신비주의 종교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론도 유일신론 사상에서 범재신론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범재신론(panentheism)은 모든 만물이 곧 하나님이라는 범신론(pantheism)과는 다르지만 하나님이 만물 안에 내재한다는 하나님의 존재적 내재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범재신론은 실제 기독교적 신관이 아닌데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 취하는 입장이다. 필자는 개혁주의 신관의 기본 원리인 창조자와 피조자의 구분(creator-creaure distinction)을 철저히 받아들여 성경의 하나님은 피조물과 존재론적으로 얽히지 않고 창조자로서 구분되지만(초월성)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가까이 섭리하시는(내재성) 하나님을 가르친다고 본다. 범신론자나 범재신론자들은 하나님과 자연을 섞기 때문에 자연을 숭상하게 되는데 매튜 폭스는 실재로 자연을 예배할 것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어서 안 네스의 근원적 생태학(Deep Ecology)을 소개하는데, 통상적으로 심층 생태학 혹은 근원 생태학이라고 부른다. 이는 생물학적 평등주의를 주장하면서 공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네스는 그와 같은 만물의 하나됨의 철학을 바탕으로 8가지 삶의 강령들을 선포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자연친화사상인데 더글라스 할과 제임스 네쉬의 사상을 제시한다. 장도곤은 전반적으로 더글라스 할의 청지기 정신을 강조하는 입장에 동의하는데 할에 의해 재해석된 청지기 사상은 창조주의 사랑을 재현하는 사랑과 존중에 의한 지배개념으로서 지배와 착취보다는 봉사와 보살핌을 제공하는 청지기 개념이다.

개혁주의 생태학을 주장하는 송준인은 생태중심주의(biocentrism)을 소개하면서, 그것은 인간과 다른 피조물은 모두 지구 공동체에 일원으로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른 피조물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신념이라고 제시한다. 이에 대하여 생태중심주의가 풀어야 할 여러 가지 과제 중 하나로서 가치 평준화에 대한 문제점을 폭로한다. 인간과 바위의 가치가 동일시되는 것은 둘의 가치가 모두 부인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이어서 인간도 결국 짐승과 다름없는 존재가 되며 인간의 인간됨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숙명론적 태도도 문제로 보았다. 송준인은 이러한 잘못된 생태중심주의에서 하나님중심주의로 전환해야 한다고 피력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평소 필자가 가장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중심주의를 생태신학에서 만나는 것이 반가웠다. 그는 현대주의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진정한 성경적 대안으로 하나님 중심주의를 제시하며 그 의미를 밝힌다. 하나님 중심주의는 모든 가치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기 때문에 피조 세계의 가치 구조를 모두 세울 수 있게 되어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해준다고 한다. 또한 지구의 청지기로서 참 주인인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오만함을 제거하고 겸손한 청치기의 사명을 인정하게 한다. 하나님 중심주의는 모든 피조물의 존재 이유를 제공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인간을 너무 높이거나 무시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가지신 창조주의 뜻을 대행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우주의 통일된 전체성의 관점을 가질 수 있다. 필자는 성경적 창조 신앙과 자연관을 확산시키는 것이 환경문제에 대하여 교회와 신학이 공헌할 수 있는 길이라는 송준인의 결론에 대하여 동의한다.

송준인은 생태신학의 위치와 태동에 대해 설명하면서, 생태학(ecology)이란 말은 집과 학문을 의미하는 헬라어 ‘oikos’‘logos’를 합성한 말이라고 하며 인간이 자신의 삶의 공간인 자연과 어떠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 연구하는 것이 생태학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1975년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WCC 총회는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것을 신학과 교회의 핵심과제로 설정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이 위기상황을 성서적인 창조신앙에 근거한 생태학적 신학으로 극복할 것을 촉구했는데 이것이 생태학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최초로 공식 표명한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이런 입장에서 창조론을 최초로 전개한 학자를 몰트만으로 꼽는다. 이 외에도 성서신학적 접근을 하는 클라우스 베스터만,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 과정신학자 존 캅 등을 생태신학자들로 꼽았다. 이러한 에큐메니컬 신학적 라인에 있는 생태신학의 한 예를 보여주는 것이 김도훈의 생태신학과 생태영성: 창조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회복을 위하여이다. 그는 생태신학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촉구하면서 생태신학은 조직신학의 영역이나 윤리학의 영역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성서 신학적으로 연구되고 예배와 교회론에 까지 폭넓게 적용되는 21세기 신학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책은 실제로 그러한 폭넓은 시도를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그의 신학적 접근은 창조와 구속에 대하여 균형성을 유지하면서 깊이 있는 신학적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되고 무엇보다 생태영성을 다루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영광)에 대한 찬송가들에 주목하는 것이 공감을 자아낸다.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기독교 생태신학자로서 임홍빈이 있는데 그의 기독교 생태신학 I: 만물의 행복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의 몇 편의 논문을 수록한 책이다. 이 책은 자연의 영성에 근거한 기독교 생태윤리를 주장하는 그의 기본적 입장에 따라 여러 기독교 생태신학에서의 자연이해를 소개하면서 성령론 중심으로 생태신학을 펼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여러 독일 신학들의 자연이해의 소개는 유익하다. 하지만 자연의 영성을 주장해야만 자연의 가치를 고양시키고 자연을 인간의 파트너로 여길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또한 그의 삼위일체 교리 취급이나 성령론 이해에도 여러 문제점을 발견한다. 하지만 인간을 중심으로 자연을 환경이라 규정하는 환경윤리가 아니라 인간을 포함하는 생태계 전체의 질서와 운행에 따른 생태윤리를 말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가 생태계에 대하여 저지른 모든 문제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고 현 생태계의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도덕적 존재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성경적 창조 질서에 따라 피조물을 다스려야 하는 청지기로서 지배의 위치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성경에 명시된 그러한 관계는 타락의 질서인 위계적 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보살핌으로 다스리는 관계임에 틀림없다. 현재 우리가 체험하는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본래적으로 원창조시 설정된 조화로운 질서의 관계나 또한 마지막 종말에 완성될 거룩한 질서의 관계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섬기는 종의 모습을 가르쳐 주었뿐 아니라 직접 삶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실현하셨다. 그래서 타락의 지배 형태는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고(20:25)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는 그러한 다스림이라면, 실재 성경이 지향하는 다스림의 모습은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책임 있는 청지기적 돌봄이요 마지막에는 만왕의 왕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다스림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죄악에 물든 현재적 상황에서는 쉽게 오도될 수 있지만 다스림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는 없다. 겸손히 희생과 헌신의 마음으로 자연만물을 돌보아야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자연은 칼빈이 말하는 바,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즉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우심을 반영하는 대상으로서, 그 자체가 경이롭고 감탄스러운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우리는 그러한 자연을 가꾸고 돌보고 보호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신학적 창조론

 

미국의 복음주의 성경신학자 더글라스 무(Douglas J. Moo)와 그의 아들 조나단 무(Jonathan A. Moo)가 공저한 창조 세계 돌봄: 자연 세계에 대한 성경 신학(2018)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성경 신학적 가르침을 명확하게 제시해주어서 그리스도인들의 창조세계 돌봄(creation care)의 당위성을 성경적으로 잘 뒷받침 해준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인간은 독특한 위치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 된 유일한 존재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친다고 한다. 우리가 피조물을 보살피고 돌봐야 하는 이유는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적인 명령에 있는데 이 명령은 우리의 이웃들이 지속가능하게 번성할 수 있는 창조 세계에 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리고 우리가 환경주의 내지 자연보호라는 말이 아니라 창조세계 돌봄이라고 표현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 자연 세계를 이해할 때 기계적인 체계로서가 아니라 이 세계의 주인 되신 창조주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을 보살피는 것은 생태계의 위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피조 세계를 돌보는 사명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Moo)는 창세기 1장에서 전개되는 7일 창조에 대하여 12절의 땅이 혼돈하고(tohu)”에서부터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질서를 부여하시는 첫 3일과 역시 2절의 공허하며(bohu)”에서부터 만물을 풍성하게 채우시는 그 다음의 3일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다음의 표를 참조.

 

창세기 1장에 7일 창조 기사

2절 혼돈하고

2절 공허하며

첫째 날

넷째 날

: 낮과 밤

광명체들: , , 별들

둘째 날

다섯째 날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

새들과 바다짐승들

셋째 날

여섯째 날

땅과 바다의 구분: 채소와 나무

땅의 짐승들, 가축

일곱째 날 하나님의 안식

 

즉 창조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bara)와 혼돈으로부터 구분하고 가름으로써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 뿐 아니라 공허한 공간에 풍성한 것들을 만들어서 채우는 행위이다. 이렇게 주의 깊게 구성된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방대함과 만물의 질서를 드러내 준다. 우주 전체가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형성되고 질서 있게 조성되어 그 공간에 풍성하게 생명체들로 채워진다. 모든 피조물의 목적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것이 명확한 성경의 원리이다.(2:10; 1:16; 4:11) 창세기 1장에는 창조의 선함이 7번이나 강조되고 있는데 이것은 자연 세계를 신성화 하는 것이 아니고 올바르게 그 자체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는 의미이다. 창세기 2장에서는 인간 창조 이야기가 나오는데, 1장과 2장은 마치 인간과 나머지 피조물이 하나의 창조 공동체에 속한 멤버인 것을 공유하듯이 유사적 연결점을 가진다. 인간(adam)은 땅(adamah)으로부터 취해지고 생기가 불어넣어져 생령(nephesh khayah) 이 되었다고 기술된다. 전체적으로 창조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피조 세계의 질서와 선함과 다양성과 풍성함이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피조 세계에 대한 반응으로 시편 104편은 가장 두드러지게 창조주를 찬미하며 송축하는 시편으로서 창세기 1장의 순서를 반영한다. 여기에는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활발한 창조와 보존의 활동이 표현되고 있는데 호흡을 거두어 생명을 거두기도 하시고 영을 보내어 새롭게도 하시는 모습이다.(29-30) 이와 같이 지구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의존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성경에서의 창조 세계관이다. (6:3; 19:1; 1:20)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구약 성경을 모르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아레오바고에서 설교할 때,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천지의 주재시니...”(17:24)라고 하나님을 소개하며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17:27)라고 설명한다. 보다 명확한 자연신학은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인데 그 사람들에게 헛된 우상 숭배를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증거할 때 표현된다.(14:15) 아울러 욥기 38장부터 39장은 창조 세계를 뛰어넘어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일련의 수사학적 질문들로 가득 차 있는데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광대함과 무한한 지혜 앞에 인간의 무력함과 한계를 드러내 준다.

출애굽기 19:5; 24:1(고전 10:26에서 인용됨); 50:10-12; 89:11 등의 말씀은 이 세계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증거하는 중요한 본문들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시 115:16에는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땅의 소유권을 인간에게 이양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을 땅에 살게 하였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무(Moo)에 의하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인간을 위해 창조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성경의 가르침은 그리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명확히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2:10, 만물이 그를 위하고...) 4:11은 만물이 주의 뜻에 따라 존재한다는 수단의 의미로 번역 가능하지만, 흠정역에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당신의 기쁨을 위하여 창조하였다는 목적의 의미로 번역했는데 후자가 더 적절하다고 본다는 것이다. 1:16에는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가르침이 그리스도에게로 초점이 바뀌어서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이 모든 말씀의 결론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우리에게 속한 것도 아니고 우리를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고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과 비인간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대에 함께 초대되고 있는 것이다. 55:12산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라며 자연 만물의 찬양을 말한다. 이렇게 자연물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주제는 시편에 많이 있지만 시 148에 보면 그 정점에 이른다. , , ,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 , 바다, 불과 우박, 눈과 안개와 광풍, 산들과 작은 산, 과수와 백향목, 짐승과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부르심을 받고 있다. 누가복음 19:40에도 예수께서는 만약에 제자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치리라고 말씀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 공동체에 일원이자, 다스리는 자이자, 돌보는 청지기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다른 피조물과 구별된다는 의미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간 모두가 동등하게 그러하다는 것이고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인데 인간은 그의 왕적 대리자라는 의미이다. 1:26에서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의 왕적 다스림을 가시화하여 보여주는 존재라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를 맺는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별히 창 1:28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다른 생명체들도 받았지만 오직 인간만이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라는 명령을 받는다. 여기서 정복하라(kabash)의 어원은 짓밟는다는 다소 폭력적인 의미가 내포되지만 이 문맥에서는 그러한 어원적 의미로 보기 어렵다고 한다. 오히려 다음 장인 창세기 215절에 경작하며(abad) 지키게(shamar)”하신 것의 연장선에서 이해되어야 타당할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땅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땅을 보존하고 지켜야 하는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1:28에서 땅을 정복하라는 의미는 우리 마음대로 피조물을 주관하는 의미의 정복하라가 아니고 왕되신 하나님 앞에서의 다스림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의미를 통상적으로 청지기의 의미로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적으로 적합한데 차가운 관리자나 매니저와 같은 의미가 아니고 주인을 대신하여 가정을 다스리는 집사의 개념이나 보다 구성원들의 안녕을 자신보다 더 챙기는 충성스럽고 자비로운 청지기의 개념이다. 후에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섬기는 종의 모델을 가르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땅의 관계는 성경 전체에서 인간과 창조 세계와의 관계와 병행을 이룬다.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했을 때 땅의 축복을 받고 불순종했을 때 저주를 받는 것처럼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고통 속에서 신음한다. 3:17에 보면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는다. 8:19-22에 사도 바울은 피조물 전체가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으며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즉 인간의 타락은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사건으로 그 영향력이 피조물 전체에 미친다. 이와 같이 인간의 구원과 회복도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창조 세계 전체에 미치는 우주적 구원 사건이다. 실제로 종말론적 완성으로 기대되는 우주적 구원 사건은 원창조의 영광을 훨씬 뛰어넘는다.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마지막 때 육체의 부활과 함께 영화롭게 되는 때를 의미하며 온 피조물이 새롭게 되는 때이다. 그리하여 구원의 마지막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귀착되며 새 하늘과 새 땅은 만물 가운데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영광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는 때이다.

 

 

나아가는 말

 

비록 많은 기독교적 생태 신학들이 신학적으로 많은 문제들을 보이고 있지만 하나님과 자연, 인간과 자연의 관계의 친밀함을 강조하며 현대에 우리 모두에게 닥친 생태적 위기를 일깨우는데 기여를 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성경에 충실하게 전개되는 성경적 창조론과 그에 따라 도출되는 생태윤리야말로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서 강조되고 가르쳐져야 할 것이다.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순종의 삶을 지향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우리 안에 이룰 때만 가능하다. 그리하여 자기 부인을 통하여 하나님 중심적으로 사는 삶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삶과 실천에 적용하고자 하는 신행일치를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 윤리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돌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이고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따라 도출되는 자연스러운 신행일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창조세계에 대한 성경의 본연의 가르침들이 재조명되고 강조되어서 한국교회가 생태친화적인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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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3/04/17 [04:59]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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