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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2.10.03 [17:32]
[정성민 교수] 무신론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을까?
정성민 교수의 복음주의 종교학 (5)
 
정성민

전 인류 역사를 통해 현시대와 같이 무신론이 폭발적으로 확산된 적은 없었다. 이제 무신론은 전 세계에 여러 형태로 널리 퍼져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그래서 신이 무시되는 당혹스러운 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무신론은 세상이나 자연을 통제하고 인간의 역사를 좌우하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사상으로서 유신론의 정반대 개념이다. 이는 초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전지전능한 존재가 세상을 직접 통제하고 다스린다는 사실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그런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급진적인 사상이다. 그런데 이 무신론에도 그 방향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을 보인다. 베른하르트 벨테(Bernhard Welte)에 따르면, 무신론은 세 가지 형태로 세분할 수 있다고 한다. 소극적 무신론, 비판적 무신론, 적극적 무신론이 그것이다. 

이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University of Freiburg)의 종교철학과 교수였던 벨테(Bernhard Welte)의 견해를 중심으로 다양한 무신론의 형태를 분석하고, 그것들이 가진 문제점을 토대로 무신론들이 제기한 내용에 대한 답을 제시해 보려고 한다. 

 

1. 소극적 무신론 

 소극적 무신론은 증명할 수 있는 존재만을 수용한다는 이론이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 영적인 존재(신, 천사, 귀신 등)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신은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신에 대한 물음도 의문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소극적인 무신론에서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내세우지 않는다. 신이라는 존재가 의문이나 질문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소극적 무신론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를 들 수 있다. 또한 앞서 ‘독 묻은 화살의 비유’에서 석가의 최우선 관심이 신과 사후세계처럼 형이상학적 세계가 아니라 하루하루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현실세계인 것처럼, 석가에게는 신이라는 존재는 생각할 가치도 없는 관심 밖의 영역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석가를 소극적 무신론자로 볼 수 있다.  

 

2. 비판적 무신론

 비판적 무신론은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외면적으로는 소극적 무신론과 비슷하지만 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보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사람은 각자의 의식이나 인식 수준에 따라 신을 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따라 신에 대해 정의하려고 한다. 인간의 시각에서 신을 정의하거나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의 개념이나 정의는 세계 내에서 발생하는 현실적인 문제들(불평등, 고통, 재난과 같은 악의 문제들)과는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 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 그렇지만 실제로 부정하는 것은 신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신의 개념이나 정의라는 것이다. 

 
비판적 무신론은 외견상으로 알 수 있는 신,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신, 그리고 우리의 의식이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에 대한 비판의 결과이다. 현실 속에 만연하는 악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석가의 입장은 비판적 무신론에도 속하는 것 같다. 

 

3. 적극적 무신론

 무신론의 제3의 형태는 적극적이고 투쟁적인 무신론이다. 적극적 무신론은 소극적 무신론처럼 신과 관련된 문제를 논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거나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성적으로 그리고 논쟁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적극적인 무신론은 역사를 움직이는 것이 신이 아니라 인간의 힘과 지능이라고 주장하고 인간의 힘과 지능을 절대적이고 전능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신의 존재나 위엄은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역사를 좌지우지하려는 인간의 권력에의 의지와 요구 앞에 신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벨테(Bernhard Welte)는 적극적인 무신론을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무신론 형태라고 주장한다. 

 적극적인 무신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니체를 들 수 있고, 그 효시를 석가의 가르침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인류 역사의 주체나 각 개인적 운명의 주체를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천명한 사람이 바로 석가이기 때문이다. 법구경에 기록된 석가의 가르침이 이를 잘 말해준다. 

자기만이 자기의 주인, 어떤 주인이 따로 있으랴? 자기만 잘 제어할 때 얻기 힘든 주인을 얻은 것이다. (법구경, 160)

나는 나를 주인으로 하니 나 외에 따로 주인이 없네. 그러므로 마땅히 나를 다루어야 하나니 말을 다루는 장수처럼. (법구경, 380) 

 이렇듯 신의 부재나 죽음을 선포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바로 그 신의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는 태도가 바로 적극적인 무신론이다. “단지 너 자신은 너 자신을 피난처로 삼을 것이지 다른 어떤 것도 피난처로 삼지 말라”는 석가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 같이, 다양한 형태의 무신론이 지닌 요소들이 모두 석가의 견해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근대 이후에 등장한 현대 무신론은 모두 석가의 무신론을 이어받아서 발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무신론은 극복할 수 있는 도전인가? 

 근대 이후 많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논쟁을 벌여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신론의 입장에서 신의 부재를 명쾌하게 증명한 바도 없으며, 유신론의 입장에서도 이들의 문제 제기를 완전히 해소했다고 볼 수도 없다. 여기에서는 무신론의 도전에 유신론적으로 변호하려는 신정론의 입장을 밝히고자 한다.

신에 의해서 창조된 세계가 그토록 고통과 불의로 가득 차 있다면 신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세계의 악의 대한 책임으로부터 신을 면제해 주기 위하여 우리는 신을 없애야만 하는가?... 고통에 짓눌려 신을 더이상 믿을 수 없게 된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그에게는 라이프니츠 이래로 그렇게 불리었듯이 변신론(신정론)의 문제는 대단히 현실적이고 괴롭게 짓누르는 문제로 남는다. 

 벨테(Bernhard Welte)에 따르면, 세상 속의 악이나 고통의 문제가 신의 존재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인간이 부정하는 것은 신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단지 신에 대한 관념이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상 속의 부조리를 경험하며 고통 가운데 울부짖으면서도 신을 상대로 투쟁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이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 관한 관념이나 이미지를 놓고 고통스러운 싸움을 하며 투쟁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몸부림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신은 인간이 정의한 개념이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다. 신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위대하고 신비하다. 벨테(Bernhard Welte)에 따르면, 우리는 고통을 통과하면서 오히려 헤아릴 수 없는 신의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고 한다. 그것이 고통의 아이러니한 속성이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통해 신의 부재와 무자비함을 호소할 수도 있지만 신앙인은 흔히 고통을 통해 위대하고 신비로운 신의 성품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여기에서 그 뜻을 헤아려보고자 하였던 신의 헤아릴 길 없는 신비에 대한 그 암시들은 고통의 사실에 의해 무력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강화된다. 이같이 일체의 파악함을 능가하는 신에 대한 신앙은 고통의 전망에서도 가능한 것으로 머문다....... 왜냐하면 신이 불가해한 존재이며, 정의에 대한 모든 표상들보다 또는 우리가 그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다른 모든 표상들보다 더 위대하고 더 신비스럽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신앙의 특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벨테(Bernhard Welte)는 우리의 고통에 대한 투쟁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말한다. 고통의 한계를 넘어서 인간적인 것을 얻어내는 것은 신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신과 함께 벌이는 투쟁이라는 것이다. 유신론자들은 악과 고통의 문제로 인하여 신을 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신의 위대함과 신비함을 경험한다. 

 이와는 반대로 석가는 악의 문제와 고통의 문제에 직면하여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 스스로 고통의 문제를 파악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려는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을 펼쳤다. 가톨릭 신학자, 폴 니터는 이러한 석가의 입장을 설득력 있게 대변한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개인적인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 만약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라면 우리가 겪어야 하는 정말 쓸데없는 고통들을 막으시거나 없애버리실 것을 기대하게 된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고통을 미리 막거나 제거하실 수 있고, 사랑이 많으시기에 자녀들의 고통을 간과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기대를 매번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우리가 상상하는 하나님의 이미지와는 다른 현실로 등장한다. 이런 괴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이미지에 문제가 있거나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예로, 지난 2004년도에 인도네시아, 인도 그리고 태국을 강타하여 수십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쓰나미를 들 수 있다.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자연재앙이 하나님의 높으시고 선하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없고, 이와 달리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거나 혹시 의도적으로 막지 않으신 것이라면, 하나님은 무자비하시고 비도덕적인 분이시다. 쓰나미라는 엄청난 자연재앙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고 정당화하기에는 너무나 비이성적인 것으로 보인다. 만약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비도덕적인 분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무엇인가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 나타나는 악의 현존으로 인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든지, 아니면 신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도덕적이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이미지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세상의 부조리와 무질서 그리고 자연재앙 등을 경험하면서 사랑의 하나님을 부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야스퍼스(K. Jaspers)에 따르면, 신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사상적인 근거조차 상실한 것이 아니다. 그는 “도처에서 우리는 세계의 불확실성, 폐쇄성, 세계상의 좌절, 세계 안에서의 계획, 인간의 기도와 실현의 실패, 인간 존재 자체의 한계와 미완결성 등에 부딪히고, 결국 심연 앞에 당도할 때 무(無) 또는 신을 체험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사실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증거보다도 신의 존재를 보여주는 증거가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모성애, 연어나 기러기의 회귀본능, 사랑의 감정, 양심 등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수많은 자연의 신비와 질서들이 신의 존재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유신론 철학자, 크리스토퍼 베이치의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수백 년 동안, 과학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물질우주의 장엄함과 다채로움을 밝혀왔다. 은하계의 생성과 소멸이 일어나는 거시세계로부터 입자가 ‘잠재적 가능태’로서 작용하는 미시세계에 이르기까지, 이 우주는 기막힌 정교함 뿐만 아니라 그 창조력과 아름다움으로써도 우리를 감동케 한다. 자연은 그 어떤 수준에서 보든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물질우주의 어느 곳으로 눈을 돌리더라도 우리는 그곳에서 질서와 지성으로 충만한 세계를 보게 된다.

 이처럼 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신이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지게 된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유한한 인간은 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생각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그런 유한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정의를 내린 그런 신은 없을지 몰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초월적 신이 존재할 수 있다. 야스퍼스(K. Jaspers)는 이같이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숨어 계신 하나님’이라 부른다. 그는 “숨어 계신 하나님은 내가 그를 파악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만큼 멀리 사라진다. 그러나 그분은 각각의 유일회적 절대적 역사성 안에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이 계신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과연 우리가 삶의 고통을 이겨내면서까지 신의 침묵을 견뎌내야만 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벨테(Bernhard Welte)는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우리는 고통에 어떤 의미가 간직되어 있다고 믿을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한계를 가진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의 침묵을 견디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을 신앙한다는 것은 어둠을 견디어 낼 수 있음을, 파악할 수 있는 일체의 것을 넘어서 참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 앞에 내어놓음을,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을 내어 맡김을 당연히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신은 그대로이다.

 벨테(Bernhard Welte)에 따르면, 신을 믿는 자들이 고통을 통과하면서 신의 존재는 더 커지고 더 위대해진다. 신이 “고통받는 자의 궁극적인 피난처가 되고 희망”이 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신은 고통받는 자들의 의식 속에서 그들이 받았던 고통의 기억조차도 지워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적인 고통은 오히려 신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고통스럽고 악한 세상을 보면서 신을 부정하는 것보다 그로 인한 신의 섭리를 믿는 것이 신앙이다. 

 악한 세상과 고통스러운 삶을 경험하면서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신의 섭리를 믿는 유신론을 선택하는 것은 각자 선택의 몫이다. 벨테는 비록 무신론 시대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신앙인은 자신이 실감나게 경험한 신의 존재를 포기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무신론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결코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무신론은 우리 시대에 일종의 역사적 운명과 역사적 불가피성이 된 것 같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다만 외견상 그러할 뿐이다... 이제 무신론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러나 무신론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면, 모든 시대가 그러했듯이 그것 역시 다시 떠나갈 수 있다. 신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 그들을 위해서 신앙의 길은 언제나 남아 있는 것이다. 

 벨테(Bernhard Welte)는 이 세상에 많은 사조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듯이 무신론 역시 나타났다가 사라질 사조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앙은 체험을 통해 확증되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하다고 말한다.

 종교학자 니니안 스마트(Ninian Smart)는 이러한 유신론적 관점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신을 설명한다. 스마트는 마르크스의 투사이론은 그 자신의 상상을 통해서 만든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투사이론에 의하면, “신은 스크린에 비춰진 그림과 같은 것”이다. “신이 실재적이고 ‘저 너머에’ 존재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이란 인간의 감정과 문화가 만들어낸 상상적인 산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우주에 투사한 것이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종교의 가치와 기능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스마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마르크스의 종교무용론 혹은 종교폐지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스마트는 이러한 마르크스 무신론적 종교론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 이론들은 신이 환상에 불과하며 물질적인 힘을 통해 인간의 발전단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하나의 세계관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은가? 마르크스주의는 그 자체가 물질적 낙원이라는 환상을 하늘에 있는 천국이 아닌 인간의 미래에다 투사하는 일종의 투사이론이 아닌가?... 종교가 우리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견해 자체가 또 하나의 환상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스마트의 주장대로 종교를 인간의 창작물로 바라보는 마르크스의 무신론적 종교론은 그의 상상력에 근거한 하나의 환상일 수 있다.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조차도 신을 경험하지 못한 인간의 희망사항일 수 있다. 신은 인간의 생각이나 희망에 따라 그 존재가 있거나 사라지는 제한적인 존재가 아니다. 단지 신을 바라는 자와 신을 포기하는 자의 자유로운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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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8/10 [21:26]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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