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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2.09.27 [07:19]
종교는 철학과 어떤 관계일까? (1)
정성민 교수의 복음주의 종교학 (3)
 
정성민

 보람찬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삶을 규정하고 그 규정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도 필요하며, 삶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신념도 필요하다. 삶에 대해 깊은 고찰과 체계를 세우는 두 기둥은 종교와 철학이다. 이 기둥들은 서로 같은 영역을 다루면서도 성격은 다르다. 종교와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삶을 이해하는 것이고, 이 둘의 관계와 다름을 이해하는 것은 삶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이란 말은 그리스어 두 단어, 필로스(Philos, 사랑)와 소피아(Sophia, 지혜)가 합하여 이루어진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하였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란 애지(愛知)라는 뜻의 어원적 의미가 드러내듯이, 지혜를 사랑하여 확실하고 명확한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 철학이고, 철학 정신이다.

 철학은 과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철학은 과학적인 지식을 기초하고 있으며 철학적인 사고는 과학의 순수성과 객관성을 필요로 한다. 

철학은 과학이 제공하는 객관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인생과 세상의 의미에 관하여 주관적으로 추론하는 것이다. 철학과 과학이 이렇게 밀접한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과학을 형이하학이라고 부르고, 철학은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과학은 현실 세계를 직시하는 것이고, 철학은 정신세계를 논하기 때문이다. 

 철학과 종교의 관계 역시 매우 비슷하지만 그 성격은 매우 다르다. 종교는 영적이고 신비한 영역이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종교는 황당하고 비이성적으로 보일 수 있다. 반면,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철학은 공허하며 때로는 말장난처럼 보일 수 있다. 철학이 과학적인 사실에 기초로 하여 세상과 인생의 의미 등을 논한다지만, 그 속성은 개인의 상상력을 기초로 하여 세워지는 매우 주관적인 사색이기 때문이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종교의 입장에서 철학자의 하나님은 빈약하고 공허하다. 그리고 철학자가 말하는 하나님을 그저 단순한 추상이라고 생각하기에 거부한다. 반면에 철학의 입장은 종교가 말하는 신의 개념을 하나의 유혹적인 우상이라고 폄하한다. 종교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물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종교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내용을 주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영혼이나 신의 존재, 사후세계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종교는 과학이나 철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다. 

 문제는 과학적으로나 철학의 논리로 증명할 수 없다고 하여 종교가 거짓으로 판명이 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영혼이나 신의 존재, 사후세계의 실재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종교는 증명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바라보는 대상이다. 과학이나 철학의 잣대로 종교를 이해하거나 증명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다. 종교를 과학의 잣대로 비판하는 것보다 신비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2. 어떻게 근대철학은 태동하였을까?

 중세철학과 근대철학의 분기점은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변하는 시점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간단한 문장 안에는 많은 사회 정치적인 변화가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인류의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중세철학은 기원후 5세기 말에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로부터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15-16세기에 이르는 약 1000년간의 서양철학을 말한다. 이 시기는 교회가 유럽을 종교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지배한 시기로서 당시의 서양철학은 기독교 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 근대철학은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하여 20세기에 이르는 거의 4세기 동안의 철학을 말한다. 근대철학 이전을 중세철학이라고 말하고, 근대철학 이후를 포스트모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근대철학은 중세철학에 대한 반동으로 신 중심적 사고에서 인간 중심적 사고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보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고 인간의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려는 인본주의 철학이다. 존 듀이(John Dewey)는 자신의 저서, <철학의 재건>에서 근대 이후 발생한 4가지 변화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첫째, 근대는 초자연적인 것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 

둘째, 교회의 권위에 복종을 강조하던 중세와는 달리, 개인의 정신적인 능력에 대한 믿음을 앞세운다. 

셋째, 진보에 대한 신념을 가진다. 즉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넷째, 이 세계의 진보, 즉 유토피아 건설은 근면함과 자연에 대한 실험을 통해 연구하고, 자연을 통제하고, 사회가 활용할 수 있는 발명품을 만드는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믿는다.

 마이클 고힌(Michael Goheen)과 크레이그 바르톨로뮤(Craig Bartholomew)는 그들의 저서, <세계관은 이야기다>에서 계몽주의 시대에 어떻게 진보적인 세계관이 형성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밝힌다. 근대철학의 대표적인 흐름인 계몽주의는 18세기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혁신적인 사상으로 과학적 인본주의이다. 이는 과학적으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4백 년에 걸친 근대철학의 형성과정에서 계몽주의는 반기독교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철학 사조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고 자연법을 따르려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 서구인들은 과학과 이성의 역할을 중시하는 한편, 기독교 신앙을 버렸던 것이다. 

 과학은 서구 세계관의 발전에 있어 결정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학 자체는 비성서적이고 반기독교적인 것은 아니다. 과학은 중립적인 도구이기 때문이다. 계몽주의 시대에 과학적인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코페르니쿠스(1473-1543), 케플러(1571-1630), 뉴턴(1642-1727) 등이 있다. 

 16세기 말에는 기독교 세계관과 인본주의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주장한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만물을 지배하는 인간 제국은 기술과 과학 위에만 세워진다.”라고 주장하였다. 베이컨은 중세교회의 왜곡된 가르침을 바로잡고 지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경험론’이다. 경험론은 세상이나 자연을 과학적으로 실험하고 나서는 그 실험 결과만을 참된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데카르트(1596-1650)는 근대사상의 아버지라 불리었다. 그 이유는 인간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을 진리의 궁극적인 권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과학으로 자연의 법칙을 파악하고, 기술로 그것을 잘 적용하면 인간이 자연의 정복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자연의 법칙들을 파악하기 위해 데카르트가 제시한 방법론이 바로 그 유명한 ‘회의론’이다. 그것은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우선 의심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에 대한 모든 주장을 오직 합리적 이성의 판단 아래 복종시키라는 것이다. 그리고 수학적으로 분석되고 측정될 수 있는 것만 진리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천동설이 무너지는 경험을 통해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 근대인들의 정신적인 충격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이로써 모든 사실이나 진리를 일단 의심하고 보는 근대인의 습성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근대과학의 시작은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시작되었지만, 이들 근대과학이 내어놓은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전개된 근대철학은 교회와 신학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점차 인본주의적이고 반기독교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주도했던 과학이 왜 인본주의자의 반기독교적 도구로 전락했을까? 그 이유로 교회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다. 

 그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가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나 지식에 너무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중세교회는 1500년 동안 이교도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B. C. 366-282)가 주장한 천동설을 받아들였다. 그 반면, 코페르니쿠스(1473-1543), 케플러(1571-1630), 갈릴레이 (1564-1642), 뉴턴(1642-1727) 등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은 과학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지동설을 주장했다. 교회는 너무나 당혹스러웠던 나머지 이를 강력하게 부정했다. 개신교 역시 지동설과 같은 새로운 과학적인 주장을 강하게 반박하였다. 오직 성경만을 믿는다는 확신으로 세워진 개신교는 지동설이 성경 말씀(시 104:5, 전 1:4-5)에 위배된다고 보았다. 마르틴 루터는 여호수아 10장 11-13절을 통해 코페르니쿠스를 다음과 같이 비웃었다. “나는 성경을 믿네. 여호수아는 지구가 아니라 태양에게 정지 명령을 내렸거든.”

  이처럼 과학적인 사실들에 대한 교회의 강한 부정은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고립을 초래하게 되었다. 종교와 과학이 대립할 필요가 없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강압적으로 과학을 굴복시켰던 것이다. 1633년 4월 12일, 갈릴레오를 이단 행위로 유죄판결하고 자택연금을 시킨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 인해 교회는 패배를 자초하게 되고, 오히려 과학은 승리하게 되었다. 

둘째, 종교개혁의 결과이다. 16세기 초부터 발생한 종교개혁은 기독교 교회 자체의 분열을 초래했다. 교회가 많은 교파로 나눠지고, 한 국가 안에 구교와 신교의 전쟁, 그리고 신교와 재세례파 등 각종 이단과의 갈등으로 인해 유럽은 기독교인들의 피로 물들게 되었다. 이와는 달리 과학은 과학자들 간의 국제적인 협력을 통해 여러 가지 방면에서 지식을 증진하게 했다. 결국, 18세기의 유럽은 기독교 신앙에 등을 돌리고 과학적 인본주의를 새로운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3. 근대철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근대철학은 인본주의, 즉 인간중심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천 년 동안 이어온 중세의 신 중심적인 사고와 삶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자신의 합리적인 사고로 세상 질서를 바로잡고, 과학 기술을 계발하여 이 세상을 좀 더 행복한 세상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이러한 근대철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진보에 대한 견고한 믿음이다. 그 믿음의 내용은 인간의 미래는 점점 좋아져서 마침내 지상낙원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조셉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y, 1733-1804)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든 간에 그 끝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영광스러운 낙원이 될 것이다.” 윌리암 굿윈(William Goodwin)은 종말론적 천년왕국이 이 땅에서 실현될 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도 없고, 범죄도 없고, 소위 사법부도 없고, 정부도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질병도 고통도 우울도 원망도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열과 성을 다하여 만인의 선을 도모할 것이다.”

 이같이 계몽주의자들에게는 삶의 목적은 현실적인 행복, 즉 이 땅에서의 행복한 삶이었던 반면, 사후의 행복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삶은 경제적인 성장과 물질적인 축복이었다. 진보적 세계관은 기독교 신앙을 대체하는 새로운 종교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둘째,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이다. 근대철학의 두 날개는 이성과 과학이다. 인간이 지닌 이성의 능력을 한없이 높게 보았다. 세상이 발전해 가고 인류의 자유와 행복이 점차 확대해 갈 수 있는 동력이 인간의 뜻과 자유의지라고 믿었다. 기독교 신앙을 무지한 자들이나 믿는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인류가 종교의 그늘과 쇠사슬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셋째, 과학 기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다. 17-18세기 유럽은 이 새로운 종교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기독교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인들의 머리와 마음은 온통 철학과 과학, 즉 이성과 과학 그리고 새로운 과학 기술에 사로잡혀 있었다. 기독교 신앙을 버리든지, 아니면 자신들이 세운 새로운 종교와 질서에 따르는 시녀로 삼기를 원했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포함한 모든 주관적인 사상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검증해서 진위를 가리려고 하였다. 이제 성경의 권위나 진실성은 과학적인 실험과 이성적인 합리성에 근거하여 하나의 신화나 허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성경이나 기독교 신앙이 더 이상 공적인 문화와 생활 속에서 객관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없게 되었다. 

넷째, 세상의 합리적 질서에 대한 믿음이다.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율법에 의한 법질서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중세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자 몽테스키의 주장이 이를 증거한다. “법을 주시는 하나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순종해야 할 그분도 존재하지 않는다. 법이란 현실의 속성상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장치일 뿐이다.” 이는 인간의 합리성에 근거한 법을 만들어 인간 스스로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4. 과연 계몽주의의 꿈은 이루어졌는가? 

 계몽주의는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기존의 종교적 권위에 반대하고, 계몽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진보와 개선을 꾀하겠다는 사조였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간의 과학 기술을 통해 세상을 파라다이스로 만들겠다던 그 커다란 포부는 그 과학 기술 때문에 처참히 무너졌다. 과학 기술이 전쟁에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1914-19년에 걸쳐 발생한 제1차 세계대전은 합리적인 생각으로 세상의 평화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짓밟았다. 저명한 심리학자, 칼 융은 당시 유럽인들의 참담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현대인들은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거의 치명적인 충격을 받았으며 그 결과로 깊은 불안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대전의 참담한 결과는 세상을 보는 눈에 일대 변혁을 불러왔고, 그것이 우리의 내면생활에도 나타나 이제 자신과 자신의 가치를 믿던 믿음이 무너져 내렸다....한 때는 세상이 합리적으로 조직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내가 그런 믿음을 잃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평화와 조화가 지배하는 천년왕국이 도래하리라던 옛 꿈은 핏기를 잃고 말았다.

 인간의 이성이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끌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제국주의의 침략을 목도해야 했으며,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신뢰는 그 근본부터 붕괴되었다. 고힌과 바르톨로뮤는 계몽주의 세계관이 실패했다는 증거들을 다섯 가지로 말한다.

첫째, 심각한 빈부격차이다. 물질적으로 부유해진다는 꿈은 결국 극소수만의 것이었다는 것이다. 

둘째, 환경파괴이다. 곧 닥치게 될 천연자원의 고갈 그리고 자동차 매연과 냉장고 프레온 가스등으로 인한 지구의 온난화가 그것이다. 

셋째, 무기 확산이다. 온 세상을 파괴할 수 있는 무기가 대량으로 비축되어 있다. 이는 현대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결과다. 전 세계가 무기에 사용하는 돈을 1년만 줄여도 전 세계의 굶주리는 사람들이 몇 년을 먹고 살 수 있다고 한다. 

넷째, 심리적 빈곤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각종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질환들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바로 거식증, 과식증, 스트레스, 우울증 등 셀 수없이 많다. 

마지막으로, 사회경제적인 문제다. 이는 가정이 붕괴하고 범죄율과 실업률이 증가하면서 현대 서구사회가 붕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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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8/06 [03:44]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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