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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2.09.27 [07:19]
초등학교 졸업 장애 여성, 만학으로 대학원 입학
67세 최춘애 선교사, 미국 아주사대학원 피아노과 조교
 
이동근

 

 

▲ 장애를 극복하고 만학의 나이로 대학원에 입학한 최춘애 선교사가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다.     © 이동근

  

소아마비로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이어서 초등학교만 다닌 여성이 70이 가까운 만학의 나이에 미국의 아주사 대학원(Azusa Pacific University) 피아노과에 입학하게 되어 감동을 주고 있다.

현재 미국 LA에서 40년동안 장애인 선교를 하고 있는 ‘그레이스 랜드’ 대표 최춘애 선교사 (67)는 3년 전에 오디션에 합격하여 입학허가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대학 교수의 제안으로 학비보조를 위해 다시 한번 이번에 오디션에 도전하여 학비 50%를 지원받고 조교라는 타이틀까지 받게 되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분이 은혜를 주심뿐 아니라 은혜 자체로 내게 부족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시애틀 여러 교회에서 불편한 장애 다리로 훌륭한 피아노 연주까지 한 그녀의 간증에 따르면 돌이 되던 한 살 때에 소아마비에 걸렸다. 아장아장 걷던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면서 하루아침에 주저앉아 걷지도 못하고 전신으로 마비증세가 있어 부모님의 마음을 애타게 했다.

부모님은 전국을 다니며 치료를 받게 하였고, 수술도 여러 차례 했지만 하반신 마비로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었다. 6.25 전쟁이 끝난 후라 예방접종도 치료제도 없었다.

1살 때부터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며 여러 번에 걸친 수술을 했고 통증과 아픔으로 어린 아이가 몸부림치며 울어대던 그 시간에 부모님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고, 한숨과 수고는 쉴 날이 없었다.

5-6년의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장애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녀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을 기억하고 있다. 다리에 쇠로 만든 보조기구를 발에서 허리까지 착용하고, 목발지팡이를 짚고, 가슴에 손수건을 꽂고, 맨 앞자리에 서있었는데 또래 남자아이가 “다리병신” 이라고 놀리며 밀치고 도망갔다.

▲ 장애를 극복하고 만학의 나이로 대학원에 입학한 최춘애 선교사와 남편     © 뉴스파워


맥없이 당하고 억울해서 마냥 울던 그녀는 아버지에게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했 다. 아버지는 “그러면 너는 한글도 모르는 바보가 된다.”라면서 방앗간을 하던 그녀의 집에 일하는 아저씨에게 자전거로 통학하게 하였다.

아저씨는 교실에 그녀를 업어서 책상 앞에 앉혀주고 갔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노는 소리, 아침 조회와 함께 음악에 맞추어 체조를 하는 소리를 들으며 “ 저 바깥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늘 궁금해 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일하는 아이가 점심을 가져다주고 화장실 볼일을 보게 했다. 그때까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생리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참아야 했다.

4학년 때 선생님은 남자였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선생님은 “춘애야, 화장실 가고 싶지 않니?” 선생님은 눈치를 채신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참고 있었는지를. 지금도 기억납니다. 실수할 뻔 했던 찰나에 고마우신 선생님에 의해 소변을 보았던 일을………!!” 그녀는 그때 선생님에게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어느 날 2살 아래인 동생이 중학교에 가서 영어를 배웠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장애인들이 중, 고등학교에 가는 것이 어려웠고, 심지어 입학 통지서를 받지 못해 초등교육을 받지 못한 장애인도 많았다.

그 때는 장애인들을 볼 때 전염병 환자 취급을 하면서 사람들이 수군거리기도 했 다. “저 집은 무슨 죄가 있어 아이가 저래, 저 아이하고 놀지마.“라는 등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다.

평등하게 받아야 할 교육과정도 장애인이기 때문에, 비장애인 학생들에게 피해를 줄 뿐 아니라 장애인을 받을 만한 시설도 없다며 학교는 장애인을 거부했다.

때문에 부모님은 아예 중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한글은 배웠으니 기술을 가르쳐 먹고 살게 해 주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일이라 판단하였다.

부잣집 가정의 장애인은 속된 말로 백을 써서 대학 진학하기도 했으나 가난하고 백 없는 장애인들은 사회적으로도 불합리한 대우를 받았던 시대였다.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신 부모님은 6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게 하였다. 다리에 힘이 없어 피아노 페달을 밟을 수 없는 상태라 바이올린을 배우는 것이 더 좋을 거라는 권유를 마다하고 피아노에 매달리며 열심히 배웠다.

하지만 세상에서 거부당하고, 놀림당하며 소망 없이 살아가는 그녀는 삶의 의미도 없이 매일이 고통뿐이었다.

“인생을 말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저의 철없던 시간의 기억은 늘 울었던 것 같습니다. 10대, 20대 또래 아이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 때는 휠체어도 없고, 누군가가 업어 주지 않으면 한 발짝도 밖에 나갈 수 없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그녀는 “왜 살까?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하나? “모든 것이 절망이었고, 소망 없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녀에게는 여동생이 셋이 있는데 교복을 입고 나란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고 나가면 한없이 울었다.

처음으로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왜 시도도 안 해보고 학교에 보내지 않으셨는지…..?

그러나 여전히 살아갈 소망, 희망이 없던 그녀는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있었다.

지금은 천국에 계시는 아버지는 딸로 인해 술을 많이 드시게 되었고 술에 취하면 폭군이 되어 주사가 심해 엄마에게 폭력을 썼다.

형제들은 아버지를 피해 자리에 없고, 그녀는 아버지의 반복적인 주사를 말려야 했다. 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반면에 반복되는 아버지의 주사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장애인을 편견의 눈으로 보는 세상도 싫고, 아버지도 싫고, 장애인인 자신도 싫었 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라도 자신으로 인해 가슴에 못이 박혀 사시는데 차마 원망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차라리 부모님에게 짐이 되느니 이 세상에 없어준다면 잠깐은 힘들겠지만 피차가 좋지 않을까!

그때부터 수면제를 모아 18살이던 어느 날 수면제를 한 주먹 입에 넣고 조용히 자리에 누웠다. 희미하게 불빛이 보이면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3일이 지났고 큰 오빠에 의해 발견되어 병원에 누워있었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일이었으나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부모님에게 더욱 큰 아픔을 드렸다는 것을 결혼하고 자식을 키우면서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 이 후로 죽을 용기로 열심히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보자고 결심하고 새로운 인생을 다짐했다.

환경이 이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생각이 바뀌고, 삶의 방향을 전환하므로 사물과 상황을 긍정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피아노 전공을 한 것도 아닌데 학생들이 많아 피아노 2대로 레슨을 했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 자연스레 상담을 하고, 장애인 모임에서 피아노 독주도 하며 활동적인 삶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언니의 초청으로 1978년 12월에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사랑하는 많은 제자들의 배웅을 받으며 “내가 성공해서 피아니스트로, 사회사업가로 돌아올게”라고 결심을 말하고 한국을 떠났다. 가족 모두가 초청되어 이민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979년 1월, 미국 생활 한 달, 주변사람들에 의해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아무 종교도 없는 그녀의 집은 어머니가 일 년에 2번씩 큰 굿과, 2번 고사를 했다. 오직 딸을 낫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이루어진 어머니의 믿음의 행위였다.

부흥회에 앉아있는 내내 불편했다. 그녀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곳에 데려온 둘째 동생, 주변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설교를 듣고 있으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중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너를 위해 죽으셨다.”

그녀를 향한 손가락과 함께 벼락 치는 듯한 소리에 놀라 “대체 그가 누구기에 나를 위해 죽었단 말인가” 라는 생각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도 예수님을 만난 43년 전의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상할지 모르지만 저는 부모님은 원망할 수 없었지만도 믿지도 않는 하나님을 향해서는 수없이 원망하며 물었습니다. 왜, 제가 장애인이 되었는지, 무엇을 잘못해서 선택되었는지….?? 그런데 그 분이 저를 위해 고난 받고, 죽으셨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시기 위함이라’ 고 믿음이 없던 제게 하나님이 믿어지는 기적의 경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기적은 또 일어났다. 발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던 왼쪽 발목에 힘이 생겨 피아노 페달을 밟게 되었다. 의사들은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장애인으로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됨에 자신을 통해 하실 일이 있음을 그 때 알았다.


▲ 한국 엘림 장애인 선교회 예배에서 최춘애 선교사가 간증을 하고 있다.     © 이동근


그 이후로 그녀는 장애인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고, 감사함으로 지금도 이 사역을 하고 있다.

한국을 떠나올 때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며, 사회사업가로 사람들을 도우며 살겠다고 호언장담한 것을 하나님은 부끄럽지 않게 하셨다.

“하나님은 피아노를 포기하지 않게 하시더니 찬양사역을 하게 하셨고, 돈이 아닌 생명이신 예수님을 나눔으로 사람을 살게 하시는 일을 하게 하셨으니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1989년 2월, 하나님께서는 “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혼자 살겠다.”라는 멋진 남자를 보내주셔서 결혼도 하고, 두 아들도 주셨다.

결코 순탄한 결혼과정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응답에 흔들리지 않고 굳세게 그 믿음을 지킨 남편(임성호 목사), 두 아들과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사역에 어렵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대하며 말씀이 사역과 삶에 응하기를 기다림으로 배웠고 하나님은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특히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시간에 하신다는 것인데 그녀에게 개인적인 바램이요, 비전이요, 기도가 있었다.

그것은 장애인들에게 고등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다. “저도 예수님을 몰랐더라면 배우지 못함이 한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배움의 목마름과 목표가 있어서 언젠가는 반드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목표를 삼게 되었습니다.”

남편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가 도울 테니 지금이라도 길을 찾아보자고 했다.

고마움에 눈물, 이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에 남편은 한국에 있는 검정고시 학원을 찾았고, 미국에서 온라인으로 강의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중심에 믿음으로 비전과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은 길이 되시고 그 길로 안내해 주셨다.

하나님의 시간 …..!! 52세, 초등학교 졸업 후 정확히 40년 만에 펜을 잡고 중학교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감격스럽고, 벅차오르는 감정에 눈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시작은 그랬는데 너무나 막막했고, 온라인 수업이라 모르는 것을 물어볼 때도 없고 온전히 반복과 자습으로만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말인데 알아들을 수 없는 많은 과목들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필기하면서 반복의 반복을 거듭했다.

무사히 중학 검정고시합격, 그 다음해에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합격을 한 후, 큰 아들의 대학 입학원서에 엄마의 최종학력인 ‘고졸’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것 또한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었던 마음을 주님은 정확한 시간대에 응답해 주시고 위로해 주셨다.

“두 아들은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며 자기들도 엄마 공부하는 것을 돕겠다며 응원하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요!”


이 후에 대학을 들어가려고 한국 수능시험에도 여러 번 도전해 보았고, 얼마나 넘기 힘든 과정인지도 경험했다.

최종적으로는 대학원에 피아노과에 진학하기를 원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한국에 있는 세종사이버 대학에 상담심리학과 예술치료학을 전공했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고, 돕는 손길을 보내주시고,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해 주셨다. 그동안 사역과 공부, 아들 둘을 키우며 많은 것들을 감당하게 하셨다.

▲ 최춘애 선교사가 녹양 교회에서 간증을 하고 있다.     © 이동근


특히 이번 가을에는 미국의 아주사 대학원(Azusa Pacific University) 피아노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3년 전에 오디션에 합격하여 입학허가를 받았는데, 교수님의 제안으로 학비보조를 위해 다시 한번 오디션에 도전하여 학비 50%를 지원받고 조교라는 타이틀까지 받게 되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초등학교 졸업 후 40년 만인 52세에 중학교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한 이래 여기까지 15년이 걸렸다. 남편과 자녀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으며 온 가족이 함께 이루어낸 기쁨이었다.

처음으로 겁이 났다. 영어도 잘 못하고, 비싼 학비는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입학한 것으로 만족할까? 두려움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때를 따라 학비도, 돕는 손길도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주셨고, 중도 포기하지 않게 하신 주님을 신뢰하며 기도했다.

“70이 다 되어 무슨 공부를 하느냐, 공부가 재미있냐 라고 가끔 질문을 받습니다. 맞습니다. 사역도 몇 년 후면 내려놓아야 할 나이니까요. 공부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학비보조도 그렇고,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라 영어로 공부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피아노 페달을 밟는 것도 발목의 힘이 약해서 연습도 연주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데 저의 남은 삶을 드리기 원합니다.”

“제가 많은 수고와 인내, 아픔과 절망을 경험했더라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고난과 죽음을 감당하셨고, 부활로 자유케 하셨으니 오늘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해도 저는 자유합니다.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오직 그가 누구이신가”를 증거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날 장애인, 비장애인이라 지칭하는 사람들의 삶에 예수님이 안 계시면 모두가 부족합니다.“

최춘애 선교사는 그녀가 만날 많은 이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하기 원하고 “ 생명이신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증거하는 일에 동참해 주기를 기도하고 있다.

▲최춘애 선교사 이메일:chunaechoi16@daum.net

(시애틀 이동근 기자)

▲ 최춘애 선교사가 장애인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다.     © 이동근



 



이동근:시애틀 뉴비전교회(담임 천우석 목사) 시무 장로. 전 중앙일보 시애틀지사 편집국장. 전 월간 신앙지 ‘새하늘 새땅’ 발행인

지은 책: 100명 신앙 간증집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사람들’ 상.하권, 서북미 여행가이드(2018), ‘아름다운 오리건’, ‘아름다운 워싱턴’, 중앙일보 칼럼모음집 ‘비, 눈, 바람 그리고 튤립’. 대한민국 국전을 비롯 일본 아사히 신문국제 사진전, 홍콩, 한국 국제사진전 등 수많은 사진전에 입상, 입선했다. 또 오리건주 오리거니안 신문 사진전에서 1위, 3위를 했고 미국에서 개인 사진전도 개최했다.

이메일:nhne700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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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7/15 [09:29]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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