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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 목사 설교]“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유익”
영등포 광야교회(2022.1.16 오전 11시 주일예배)
 
김명혁   기사입력  2022/01/16 [10:03]

 

▲ 김명혁 목사     ©뉴스파워

 성경: 눅 6:20, 고후 12:10 ,119:71, 7:3

  

 

저는 광야교회를 아주 귀중하고 아름다운 사역을 하고 있는 아주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난 2008426일 주일 처음으로 여기 와서 "루디아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같은 일꾼"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21822일 주일 여기 18번째로 와서 "친밀한 교제와 사랑과 소통의 삶"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2022116일 새해 셋째 주일 여기 19번째로 와서 설교를 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저를 불러주신 임명희 목사님과 정경화 사모님과 광야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광야교회와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주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주변의 건물들을 모두 허물어서 철거하고 대신 행복주택과 일반주택과 홈 타운주택을 건설하려고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작년 827일 임명희 목사님과 정경화 사모님에게 전화를 걸고 지금 광야교회와 이 주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심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2022116일 주일 여기 와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유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아주 좋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유익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기독교의 본질과 특징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십자가" 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자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 만을 알기로 그리고 전하기로 작정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삽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리고 자기는 십자가만 자랑하고 예수님의 흔적을 몸에 지닌다고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6:14,17). 기독교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붙잡고 믿음으로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의 축복을 받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특성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좋아하지 않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유익을 귀중하고 아름답게 보고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6: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16:20-23).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5:11,12). 시편 119편의 저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7:3).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유익한 것이고 귀중한 것이고 보배로운 것입니다.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유익한 것이고 귀중한 것이고 보배로운 것입니까? 우리들의 구주이시고 우리들의 주님이신 성자 예수님의 삶이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곳이 없어서 말 구유에 태어나셨고 태어나시자 마자 애굽으로 피난을 가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삶을 사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삶을 이렇게 묘사하시기도 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8:20). 이사야 53장은 성자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53:4).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3:5). 성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심으로 극심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이 지녔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자 예수님의 따뜻하신 부르심을 받고 처절하게 회개한 다음 성자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며 닮게 된 사도 바울의 삶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했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만큼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많이 당한 사람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기술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리스트는 아주 길고 다양합니다. 고후 11:23절 이하에서 이렇게 길게 기술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고후 12장에서도 자기가 당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기술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불치의 병에 걸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주님께 세 번 간구하며 기도했다고 했지만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간구와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손수건을 대기만 해도 불치의 병들이 물러가곤 했는데 자기의 병을 위해서 세 번 간구했는데도 주님께서는 자기의 병을 고쳐주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사도 바울이 실망을 하고 당황을 하며 좌절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 12:9). 사도 바울이 처음에는 그 말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고 받아 드리지도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너무 자고해지고 너무 교만해져서 사탄의 노리개 깜이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한 성자 예수님의 특별한 배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사실 이적과 능력을 행하며 대단한 성공을 쟁취하다가 실패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삼손이 그랬고 솔로몬이 그랬고 엘리야도 그랬을 뻔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박태선이 그랬습니다.

 

 

둘째로, 사도 베드로가 지녔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마 사도 베드로만큼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싫어한 사람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조만간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정식으로 반대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16:22). 성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자기를 따르려는 사람은 십자가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고 죽을 각오를 하고 자기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3-25). 사도 베드로는 수 많은 실패와 배신과 좌절을 거친 다음, 디베랴 바다가에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통곡하면서 회개한 다음 앞으로는 팔을 벌리고 자기가 원치 않는 죽음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다음부터 조금씩 조금씩 십자가의 길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소 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고난과 핍박과 불 시험에 대한 그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과 마음과 뜻과 소원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결국 가난과 고난과 시련과 불 시험과 능욕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십자가의 예찬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십자가의 고난을 영광과 연결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벧전 4:12-19). 십자가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피하는 대신 십자가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달려간 사도 베드로는 결국 사도 바울과 함께 로마 세계를 십자가의 복음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무너뜨린 초대교회의 가장 보배로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사도 베드로에게 있어서 너무나 유익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보석이 되었습니다.

 

 

 

셋째로, 성 프랜시스가 지녔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성자라고 불리는 성 프랜시의 삶이야말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11822월 이태리 앗씨시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는 아버지로부터의 상속권도 재산도 평안한 삶도 세상의 향락도 모두 버린 채 한 평생 가난과 고난과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성자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글자 그대로 실천하며 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두 벌 옷을 가지지 않고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걸어 다니며 한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자기는 가난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했다라고 선언하며 절대 청빈과 완전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모두를 사랑했는데 가난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까지도 사랑했습니다. “비애는 나의 자매이고 고통과 죽음도 나의 자매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가난과 고통을 사랑하는데 그치지 않았고 가난과 고통자체가 되었습니다. 가난하게 살았고 고통스럽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 닮은 삶을 문자 그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가 죽기 2년 전 라베르나 산에 들어가 깊은 기도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도대체 당신은 누구이시오며 작은 벌레 같은 저는 무엇입니까? , 내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허락해 주소서. 한 가지는 당신께서 수난에서 당하셨던 그 고통을 제 영혼과 육체도 체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또 한 가지는 그 어떤 고통도 사랑으로 감내할 수 있는 극치의 사랑을 제게도 넘치게 주시옵소서.” 바로 그때였습니다. 프랜시스의 몸에는 마치 불덩어리를 댄 것 같은 고통이 일어나 그는 그만 까무러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두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심한 통증이 일어났습니다. 상처가 생겼고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이후 죽기까지 극심한 고통을 몸과 영혼에 지니며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무한한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는 1226103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주님 품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벌거벗은 몸으로 죽으셨던 것처럼 자기도 벌거벗은 몸으로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옷들을 모두 벗겨내고 그를 맨 땅 위에 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당신은 나의 피난처, 나의 모든 것, 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소서. 나에게 입혀주신 당신의 성총으로 이 몸이 의인들에게 둘러 싸이리이다.” 그리고 둘러 서 있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기 서 있는 형제들과 여기 없는 형제들의 죄들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하고서 눈을 감았습니다. “, 나의 자매 죽음이여.” 성 프랜시스는 성자 예수님을 너무너무 사랑하고 가난과 고통을 너무너무 사랑하다가 그리고 가난과 고통자체가 되어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렇게 주님 닮은 귀중한 삶을 살다가 주님 닮은 죽음을 죽은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좋은 집에서 오래오래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는 부끄러운 존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 지녔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손양원 목사님만큼 그렇게 진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니고 산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애양원 나환자들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함으로 주어진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니고 감사하며 살다가 48세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대가로 피나는 고문과 박해를 당했습니다. 19481019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는 그렇게도 사랑하던 두 아들 동인이 동신이가 공산당에 의해서 총살을 당해서 죽은 너무나 슬프고도 아픈 비극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두 아들이 총살을 당해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손양원 목사님 내외는 엄청난 충격에 쌓여 비통해 했습니다. 반란 사건이 진압되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손양원 목사님은 밤을 새워 통곡하고 울면서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했습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 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결국 손양원 목사님의 마음에는 커다란 사랑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1026일 두 아들의 시체를 담은 관이 애양원 뜰에 도착했을 때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은 관 위에 엎어져 울부짖으며 비통해 했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을 잃은 슬픔과 비통함이 그렇게 컸었는데도 불구하고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총살한 그 좌익 학생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심을 한 것이었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양원 목사님은 계엄 사령관에게 딸을 보내어 그를 사면할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를 양자로 삼아 교육시키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안 가겠다고 반항하며 대드는 딸 동희를 설득하여 용서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듣지 않으려는 딸을 설득했습니다. “동희야 내 말 잘 들어 봐라. 내가 무엇 때문에 5년 동안이나 너희들을 고생시키면서 감옥 생활을 견뎌냈겠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1,2 계명과 함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내 어찌 이 명령은 순종치 않는단 말이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치 않는다면 과거 5년 간의 감옥살이가 모두 헛수고요, 너희를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만 시킨 꼴이 되고 만다. 그러니 동희야, 가만히 생각해 보아라. 그 학생을 죽여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 딸은 몇 번이나 반항하며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습니다. 혹 용서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아들을 삼는다는 것은 무엇이냐고 악을 쓰며 달려들었습니다. “동희야,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니 사랑하기 위해 아들을 삼으려는 것이다.” 딸은 자기 의지에 반해 아버지의 하나님 절대 신앙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결국 딸은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국군 심문자에게 그대로 전하므로 처형되기 10여분 전에 원수를 살려냈습니다. 동희양은 취조 군인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아버지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아버지가 두 오빠를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 하셨어요. 그를 구해 아들 삼겠다고요. 성경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기 때문이래요.”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말을 토해 놓고는 책상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동희양의 말이 끝나고, 동희양이 울음을 터뜨리자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취조를 하던 군인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위대하시다” “위대하시다라고 감탄의 소리를 토해 냈습니다. 안재선까지도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손동희 권사는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이 광경이야말로 오늘까지 내 눈 앞에 잊혀지지 않는 역사적인 장면의 한 토막이었다.” 사랑의 원자탄이 떨어진 장면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한국교회가 사랑하고 존경하고 자랑하는 사랑의 원자탄이 된 데는 보통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극도의 가난과 고난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에게 있어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가장 값지고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되었습니다. 그 보석은 하늘에서도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추가해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한경직 목사님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던 성 프랜시스의 영향이 손양원 목사님 에게도 미쳤다는 사실입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옛날 프란시스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요, 못난 자중의 못난 자라고 했고 하나님께서는 못난 자 약한 자 죄인을 택하여 그들을 통해 자기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이외다라고 했다. 나는 다만 나의 선악이나 장래의 상벌 생사 문제는 이제부터 상관치 않고 이미 내게 주신 주님 은혜에 감격하여 보은 생활과 나의 이미 진 은혜의 빚과 죄의 빚을 갚기 위해 내 일생 주가 힘 주시는 대로 충성만 하려 할 뿐이다.”(손동희 저 사랑의 순교자 손양원 목사 옥중 목회p. 14

 

 

다섯째로, 3.1 운동의 주역의 역할을 한 이승훈 선생님이 지녔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에 대해서 간단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일으켜 세운 학생들과 교회의 지도자였고 3.1 운동을 일으킨 민족의 지도자 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픈"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승훈은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난 지 열 달도 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의 품에서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도 그가 열 살 때 돌아가시고 곧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나중에는 여러차례 아니 너무 많이 일본 경찰에 의해서 투옥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제주도에 유배되는 불행한 삶도 살았습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항상 몸의 고통을 지니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 선생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불행"의 삶 속에서도 그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불행"이 도리어 그에게 자극이 되었고 도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본의 36년 동안의 박해는 조선 사람들에게는 유익한 보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는 열심히 공부했고 사환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마다하지 않고 시키기 전에 알아서 열심히 했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열심히 일을 했으며 장년과 노년 시절에는 교회와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결국 이승훈 선생은 3.1 운동을 일으킨 조선 민족의 귀중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너무너무 귀중하고 아름답고 보배로운 삶과 사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승훈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우리 민족의 귀중한 지도자들이 되신 분들이 많은데 그 중의 한 사람이 한경직 목사님 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이승훈 선생님을 너무너무 존경하며 귀중하게 여기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우리 몸에 조금이라도 지닌다면 우리들은 성자 예수님을 아주 조금은 닮을 수 있고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를 아주 조금은 닮을 수 있고 성 프랜시와 손양원 목사님과 이승훈 선생님과 한경직 목사님을 아주 조금은 닮을 수 있지 아니할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성 프랜시스는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자기 몸에 지니기를 간절하게 사모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평안과 안일과 부귀 영화와 장수를 추구하는데, 성 프랜시스는 그것들을 거부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부귀 영화나 고층 건물이나 고층 예배당을 보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기 보다는 마귀가 가져다 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약함과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짊어지는 것은 성자 예수님에게로 조금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고 성자 예수님을 따랐던 신앙의 선배들에게로 조금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부요함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마귀에게로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사도 바울은 약함과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짊어지고 살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운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부족한 우리들도 성자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리고 사도 바울과 믿음의 선배님들이 지셨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귀중하게 여기고 사모하면서 몸에 조금이라도 지닐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려고 합니다. 제가 11살 때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평양에 남겨두고 캄캄한 밤에 혼자서 38선을 뛰어 넘어서 서울로 오게 된 이야기를 잠깐 하려고 합니다. 제가 11살 때 혼자서 캄캄한 밤에 38선을 뛰어 넘었는데 그 일을 생각하면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단 한 가지 이유와 목적 때문에 즉 하나님을 바로 믿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 드리기 위한 단 한 가지 이유와 목적 때문에, 사랑하는 어머니와 동생들과 감옥에 계시는 아버지를 북한에 남겨두고, 고향과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혼자서 남쪽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모험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옥에 계시던 아버지를 찾아가서 여기 평양에서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을 했을 때 아버지는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던 저의 어머니도 울면서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19488월 캄캄한 어느 날 밤 38선을 넘을 때 우리들은 모두 국경을 경비하는 인민군인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서지 않으면 총을 쏜다고 위협을 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 수가 없었습니다. 남쪽으로 가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는 저 혼자였는데 저는 서지 않고 그대로 남쪽을 향해서 어둠 속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무섭지가 않았습니다. 약간의 스릴도 느꼈습니다. 언덕을 넘고 파 밭을 한참 달리다가 목에 차는 강을 건너며 3,40분 동안 달려서 남쪽에 도착했습니다. 어느 초가집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청년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어디로 가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서울로 간다고 하니까 그 청년이 누구와 함께 가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오던 어른들이 모두 붙잡혀서 모른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저를 기차에 태워서 서울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저는 그 청년을 천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수년 전에 먼저 서울에 와 계시던 이모님을 만났습니다. 이모님 집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밤에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남 몰래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지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 드리는 신앙생활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방산국민학교 5학년에 입학했는데 운동도 잘 하고 공부도 잘해서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고 친구들의 부러움도 샀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평생 고아와 나그네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니고 어렵게 살게 되었는데 제가 평생 몸에 지니고 살게 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저의 삶을 십자가로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길잡이가 되었고 불쌍한 수 많은 사람들에게로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길잡이가 되었고 부족한 저의 삶을 올바른 길로 가게 하는 삶의 보석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몸에 지니고 살게 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저의 삶의 보석이 된 것은 무엇보다 저의 삶을 선한 길로 인도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또 고백하고 싶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면서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고향과 부모를 떠나온 믿음의 소년 고아를 하나님께서 기특하게 보시고 너무 많이 사랑하시고 너무 많이 축복하신 것 같습니다. 저의 삶에는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많이 있었지만 그 모든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나중에는 저에게 보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십자가의 주님을 따르기를 소원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가장 유익하고 가장 귀중하고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종류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거부하거나 피해가려고 하면 안될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당하는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조금은 겸손해지고 조금은 따뜻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우리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에 참여하게도 되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당하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준비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지금 광야교회와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주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주변의 건물들을 모두 허물어서 철거하고 대신 행복주택과 일반주택과 홈 타운주택을 건설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지금 극심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광야교회와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셔서 지금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귀중하고 아름다운 축복이 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보석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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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1/16 [10:03]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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