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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2.07.04 [16:28]
[김준곤 설교]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
1965년 10월 10일 설교
 
김준곤

  

성경 본문 요한복음 21:1~13

▲ 한국CCC 설립자 김준곤 목사     ©뉴스파워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몇몇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 의기소침해져서 갈릴리에 돌아와 이전처럼 고기를 잡으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없다고 하자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명한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고기가 어느 곳에 많이 모이고 어떻게 하면 고기잡이에 성공한다고 하는 고기잡이의 기술을 가르쳤다거나, 고기가 어느 장소에 잘 모인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잘 알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에 고기를 많이 잡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방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방법이 자연적인 방법이라고 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은 초자연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애 가운데는 종종 뜻밖의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문제에서도 있을 수가 있고 우리들의 사회적인 문제에서도 있을 수가 있으며 우리들의 건강상의 문제에서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성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신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부지런히 초자연과의 접촉을 통해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초자연과 접촉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연이라는 말과 초자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비롯한 여타종교들에서 초자연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도대체 초자연은 무엇이고자연은 무엇입니까? 흔히 우리는 도덕이나 인간론이나 우주론이나 윤리나 형이상학이나 철학이나 인생관 등을 모두 자연론과 초자연론으로 나눕니다. 이 세상에 자연밖에 없다면 윤리도 자연 충동에 의해서 결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자연, 즉 자연 밖에서 인간을 주관하는 세력이 있다면 우리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자연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로 쓰이는가를 몇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연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림 한 폭이 있다면 그 그림 속에 있는 전체가 자연이고 이 우주 건체가 자연이며 이 우주에 살고 있는 인간도, 인간들이 하는 사랑도, 인간들이 하는 행동도, 인간들의 예술도 전부 자연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자연에서 누락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존재란 자연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론적인 우주관이고 자연론적인 인간관입니다. 또 자연 충동에 의해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플 때 밥을 먹는 것처럼 남자가 여자와 관계를 하고 여자가 남자와 관계를 하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며 혼란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아무 사람과의 성관계도 자연적인 것이 아니냐는 것이 자연적인 윤리관입니다. 또 국가와 국가 사이에 있어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약탈한다든가 적자생존을 한다든가 자연 도태를 한다던가 하는 이런 것들도 자연 현상이 아니냐, 생물학적인 자연 현상이 아니냐고 하면서 이 자연 세계에는 얼마든지 투쟁이라고 하는 것이 있으므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략해서 약한 자를 없애 바리는 것은 자연 법칙에 합당한 것이라고 합니다. 자연주의적인 생각을 극단화시키면 이런 결론까지 합리화시킬 수 있습니다.

자연은 히브리어의 어원적인 뜻이 ‘to grow’, ‘to be born’, 자라난다’, ‘생겨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적인 근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 자연을 만들었는가 하는 것보다도 있는 현상 그대로 그것이다.’라고 그렇게 긍정하는 것이 자연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이렇게 생각해 수 있습니다. 들에 있는 아무도 가꾸지 않은 잡초는 자연의 소산이고, 정원에 가꾸어 놓은 나무나 풀은 인공을 가한 인공 정원이므로 자연과 인공은 분류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것은 애교를 부린다든가 아첨을 한다든가 해서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과 자연스럽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야기해 보면 도대체 자연과 비자연, 자연과 초자연의 기준을 어디에, 어떻게 두어야할 것입니까? 이 우주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경험 세계뿐인가, 아니면 그밖에 있는 외계의 존재들이 우리에게 전파를 보내고 어떠한 창구에 대해서 서로의 관련성이 있는 세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원자전자의 세계를 발견했습니다. 중성자 같은 것도 발견했습니다. 소립자의 세계도 발견했습니다. 그 이하의 세계도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몇 억 만 개나 되는 성좌들, 몇 억 개나 하는 우주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반물질의 세게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어떤 다른 종류의 차원도 있을 것입니다. 영적 세계의 존재도 있을 것입니다. 천사의 세계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많은 실체의 세계와 우리의 오관으로 경험할 수 있는, 소위 우리가 이름 지은 자연이라는 세계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무거운 철문으로 폐쇄되어 있는, 나갈 길이 없는 그런 세계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또 그럼에도 그 그림의 의미와 목적과 가치가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이라고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음악을 듣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음악을 듣고 녹음을 했습니다. 그것을 분석도 해봅니다. 귀로도 들어 봅니다. 그러나 그 음악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음악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정의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주관적인 것입니다. 음악이 가진 실체라든가 음악이 가진 어떠한 목적이라든가 형상이라든가 원인이라든가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이라는 범주나 개념 속에는 집어넣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연주의자들을 이렇게 생각해야 옳을 것입니다. 자연주의자들은 모든 것은 될 대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르게는 될 수 없다고 생자하는 것입니다. 가령 나는 하여야 한다.’라는 이것은 자연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배가 고프다.’라는 이것이 자연입니다. 그러나 배가 고프다고 하는 자연 상태 속에서 나는 참아야 한다. 견뎌야 한다.’라는 이 당위의 개념은 자연과는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우리 속에는 자연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외에 자연에 대해서 간섭해 들어오고 자연과 대립되는 초자연이라고 할까, 비자연이라고 할까, ‘하여야 한다.’라는 개념이 인간 속에는 있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는 자연과 초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자연주의자들 가운데 칼 마르크스라든가 프로이드 같은 사람은 윤리학을 자연론적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프로이드는 사람은 본래 성적 존재라고 합니다. 그리고 칼 마르크스는 인간은 계급의식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칼 마르크스는 인간의 심리적 생활의 대부분은 계급 갈등이라든가 또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 결정되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프로이드는 에로틱한 성적 갈등이 심리적 생활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자연론적인 해석 방법인데 그렇다면 칼 마르크스가 이야기하고 프로이드가 이아기하는 계급 갈등이라든가 성적 갈등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 간에 서로 운동하고 갈등하고 조합하는 물질의 운동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 동물이고 자연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고 아무런 목적도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물질의 세계에서 아무렇게나 되어지는 자연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인간은 자연의 산물이고 자연군(自然群)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먼지가 날아다니는 것과 같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자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풀지 못하는 일곱 가지 불가사의가 있다고 합니다. 우선 생명의 기원에 관한 것을 아직도 모릅니다. 소련의 과학자가 생명의 인자를 발견했다고는 하지만 확실치 않습니다. 그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생명의 목적성이 신비입니다. 꽃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감상할 수 없습니다. 꽃은 자기 자신의 일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꽃은 반드시 감상자를 필요로 하고 보아 주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그 감상자는 이 우주에 따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참 목적성은 신비입니다. 또 인간의 정신과 신체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도 하나의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또 인간의 언어의 기원도 신비입니다. 또 물질의 본질도 신비이고 힘의 본질도 신비입니다. 뉴턴의 관성의 법칙에 의하면 물질이나 힘은 외적인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정지하여 있거나, 한결 같은 직선 운동을 하는 물체는 그 상태를 지속한다고 했습니다. 누가 움직여 주어야지 운동을 하고, 항상 움직이는 방향을 고집하게 됩니다. 누가 맨 처음 물질을 움직이게 하는 것인가, 누가 방향을 지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아직 규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물질 자체 속에서는 그 의미를 아무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불가사의는 인간 의지의 자유입니다. 선택의 자유입니다. 어떻게 다른 모든 생물에는 자연만이 있는데 인간에게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의지가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들이 생명의 일곱 가지 불가사의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연주의자들은 그들에게 어떠한 일이 생겼다고 할 때, 가령 얻어맞았다면 내게 얻어맞는 일이 생겨났다, 아픔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내가 이러이러하게 하였다 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일어난 것이지 그들 스스로 한 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론적인 인격에서는 인격의 자유를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신약 성경이나 구약성경에 보면 고대의 히브리 신화 같은 이야기이고 우리나라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 같은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를 현대의 지성인들에게 해주면 그것은 믿을 수 없고, 따라서 합리적으로 해석해야 하고 그 가운데서 도덕적 교훈만을 취해야 한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또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연 법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그러한 신화 같은 이야기를 기록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베이컨이 말한 것처럼 신화시대가 있고 철학 시대가 있고 과학 시대가 있는데 사람들은 처음에는 전부 신화적으로 해석했다가 신화시대가 지나면 다시 철학적으로 해석했다가 과학 시대에는 과학적으로 해석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이든 과학적으로 분석을 하면 이유만 모를 뿐이지 과학적으로 다 증명이 된다는 실증적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오해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 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무식했기 때문에 그것을 신화적으로 기록했을 것이라는 추리는 부당합니다. 예를 들자면,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수태를 하는지 그것에 대한 지식이 얹었기 때문에 동정녀가 아기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식인이 한 말입니다. 합리주의자들이 한 이야기입니다. 잘 생각해 봅시다. 옛날 마리아와 요셉이 살던 그때 시대의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와 관계함이 없이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겠습니까, 몰랐겠습니까? 그때 사람들도 남녀가 화합하지 않으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와 똑같이 알았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그 사람들보다 그것에 대한 지식이 더 발달했을 것 같습니까?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사람들도 남녀의 결합함이 없이 아이를 낳는 일이 이상한 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기적이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무지해서 그렇게 기록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이란 우리의 경험에 의한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인 사실 가운데 반은 증명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과학 가운데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학 지식의 경험이란 우리의 경험을 전부 포함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학 지식이란 궁극적으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험 세계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의 극히 작은 부분입니다. 우리들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고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영역 가운데 기적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기적이 없다고 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경험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독단적으로 자기들 마음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사람들의 이 우주에 대한 인식은 지구에 국한되어 있었고 조그마한 좁은 세상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넓은 천문학적 지식이나 공간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그런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시편에 기록된 하나님이 창조하신 광대무변한 우주에 대한 지식들이나 욥기에 기록된 모든 성좌에 관한 지식들 속에서 오늘날 천문학자들이 오히려 천문학적 교훈을 배우고 욥기에 기록된 지식과 기사 가운데서 과학자들이 많은 것을 배운다고 하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적으로 만든 것이나 자연으로 만든 것이나 존재는 똑같습니다. 예를 들어 보면 하나님께서 꽃을 1초 동안에 피게 하였거나 석 달 동안에 피게 하였거나 꽃은 똑같은 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들었거나 포도로 술을 담가 만들었거나 포도주는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은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인간의 언어로는 하나님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인식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지식과 우리 인간의 경험과 우리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을 표현할 따름입니다. 어떨 때는 비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달리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십자가를 지고 나를따르라는 말씀을 어느 독일의 어떤 사람은 큰 십자가를 만들어서 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렇게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강림하였더라는 말씀을 읽고 어떤 사람은 성령이 알을 낳는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억지로 성경을 푸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여자와 간음해서 예수님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억지로 성경을 풀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비유도 있고 상징도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다르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 말씀하려니까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기독교인들이 쓰는 신앙 언어라는 것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지식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들어봅시다. 그들은 추상적인 이야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추상이라는 것은 얼굴도 없고 형태도 없고 모양도 없고 색도 없고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저 막연하게 하늘에다 그려보는 꿈이요, 무지개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하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한 모습 가운데 제일 두드러진 것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모호한 태도입니다. 특별히 지성인의 특징은 자기 바깥 세계의 문제에는 될 수 있으면 무관심해지려 하고 신이나 영원의 문제로 간섭 받기를 꺼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추상적인 신을 만듭니다.

예화를 하나 생각해 봅시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정감의 문제나 지성으로 인식하는 문제까지도 과학적인 법칙과 논리만이 절대이며, 직관이나 초자연적인 신비는 전혀 발 들일 틈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독단이고 비진리입니다. 어느 연못에 과학적 논리만을 고집하는 조개A와 신비를 인정하는 조개 B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연못가에서 서성이는 사람의 모습을 조개 B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조개는 그 사람이 그들의 세계의 존재가 아닌 인식 밖의 존재이므로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개 B는 조개 A와 이야기를 하면서 조개들의 언어로 물속에는 있지 않고 바위에 붙어살지도 않고 우리처럼 껍질도 없고 기어 다니지도 않는 무엇이 있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자 그 달을 듣고 있던 조개 A가 하는 말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무식한 것이야. 논리적으로 학문적으로 하려면 이렇게 표현해야 돼.’라고 하면서 조개 B의 말을 고쳤습니다. 무정형의 무소부재의 존재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고,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기도의 대상이고 사랑의 대상이고 순종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할 대상이지 철학자가 만드는 신이 아닙니다. 철학자가 만든 이상화된 신은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보다 더 이상한 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철학적이고 아주 지식이 높은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칠 때 좀 철학적으로 가르치려고 하나님은 Substance라고 했습니다. Substance는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그의 딸은 학교에서 Substance를 어떤 물질이나 돌멩이 같은 것으로 배웠습니다. 하루는 그 딸이 돌멩이를 가지고 와서 아버지, 하나님은 이 돌멩이처럼 생겼습니까?”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본질이라는 말이 그 아버지에게는 아주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것이었습니다. ‘신은 본질이다.’하는 것은 철학적이고 학문적이고 추상적인 말입니다. 그러니까 철학적이고 학문적이고 추상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을 본질이라고 가르쳤는데 그것이 그 딸에게는 돌멩이라고 생각된 것입니다. 인간이 지혜를 짜내서 철학적으로 어려운 말은 전부 골라 하나님을 포현한다고 합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점점 더 몰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처럼 주님 앞에서 주님과 대화를 하면서 기도할 때에야 비로소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송두리째 알게 되는 것입니다.

기적 가운데 최대의 기적은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생각해 보면 볼수록 상상할 수 없는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가 인간의 몸을 빌어서 지상에 오셨다는 이것이 기적입니다. 기적 중의 대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화학을 배웠습니다. 과학의 지식을 알고 있습니다. 화학 변화의 과정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자연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자연 법칙의 주관자이신 주님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한 번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몇 년 걸리는 것을 한 순간에 해 버렸습니다. 시간의 차이뿐입니다. 아무 것도 다른 것이 없습니다. 꽃이 30일 동안 핀 것이나 1초 동안에 핀 것이나 기적은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루 동안 산 것이나 50년 동안 산 것이나 기적은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을 잠잠케 했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합니까? 바람은 언제든지 하나님이 잠잠케 합니다. 모든 바람은 하나님께서 잠잠케 합니다. 모든 바람은 하나님께서 불게 합니다. 병이 나은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사가 병을 고치는 줄로 생각합니까? 의사에게 물어 보십시오. 우리에게는 자연 치유력이 있어서 의사는 도와주는 것뿐입니다. 모든 병은 하나님이 고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병을 하나님이 낫게 합니다.

물론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렇지만 한번 하가님께서 그런 방법으로 하시지 않은 때가 있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에게는 꼭 그렇게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도구를 가지고 물건을 만듭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도구 없이 자기의 손으로 직접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통해서 여자가 아이를 낳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기 위해서는 그 방법을 버리셨습니다. 직접 자연 법칙에 간섭하셔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낳게 하신 것입니다.

자연은 혼자서는 의미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자연은 자연 밖의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불완전한 것은 완전자가 있어야 합니다. 곡면은 직선이 있어야 존재합니다. 유한은 무한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개념입니다. 상대는 절대라는 개념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 앞에서 여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만 인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수수께끼입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은 설명될 수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우리들에게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때도 있고 안하실 때도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특별히 하십니다. 물론 기독교는 요술을 부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는 복을 비는 주술 종교도 아니고 병을 고치는 종교도 아닙니다. 소원 성취하는 종교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피 흘려 세운 교회는 그런 값싼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람의 병을 고치십니다. 불쌍한 남매가 있었습니다. 전쟁 고아였습니다. 좋은 집안의 자손이었습니다. 오빠가 머슴살이를 해서 여동생을 시골 조그마한 중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여동생이 늑막염에 걸렸습니다. 점점 심해 갔습니다. 수술을 하려면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시골 교회에서는 도울 길이 없었습니다. 제가 무슨 일로 그곳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이여 돈 없는 이 어린 소녀를 당신은 고쳐야 합니다. 당신은 고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만병의 의사가 되십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여동생은 나를 낫게 해주시면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은총을 전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중학교 2학년입니다. 그런데 기도한 지 열흘이 못 되어 병이 나았습니다. 약이라고는 한약 두 첩밖에는 안 썼습니다. 그 한약이 그 여동생의 병을 고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필요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기적을 행하십니다. 주님은 기적을 함부로 행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필요할 매는 행하십니다. 우리들의 생애 가운데서는 주님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기적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가난했을 때, 무서운 시험을 만났을 때, 낙망 속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울 만큼 어려움에 빠졌을 때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또 이럴 패 기적을 행하십니다.

우리에게 회관을 빌려 쓸 돈이 없었습니다. 단 십만 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160만 원이 필요했습니다. Y목사님과 저는 쫓겨날 각오를 했습니다. 이사님들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몇 번이나 남몰래 울었습니다. 정말 울었습니다. 아무데서도 돈이 나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주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우리에게 기적을 베풀어서 돈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여러 차례 여러 사람에게 우리의 사정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이 다 들어왔습니다. 쫓겨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국의 심장부에서 한국의 심장이 되는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건파해야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적은 이러한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서도 종종 기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악으로도 나타날 것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알게 모르게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기적이 연속될 것입니다. 기적은 일어납니다.

우리나라에는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라인 강의 기적이 일어났고 일본에서는 동경의 경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는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가슴에는 그리스도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의 방방곡곡에 전파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 땅을 정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꿈이 필요합니다. 야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대망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부자가 되고자 하는 대망을 품은 것도 아니고 정권의 대망을 품은 것도 아닙니다. 주님을 이 땅위에 심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기를 바라고, 그리고 이 암흑의 아시아에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이런 기대와 이런 희망에 차 있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기적도 실현될 것입니다. 이북 땅에 전도할 날이 올 것입니다. 반드시 올 것입니다.우리가 중공과 소련에 전도할 날도 반드시 올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확실히 올 것입니다. 3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올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순교자가 많이 생길 것입니다. 이름 없는 무덤들이 이곳저곳에 많이 생길 것입니다. 주를 위해 살다가 아무 역사책에도 기록됨이 없는, 많은 사람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전국의 CCC 학생들이 그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런 비전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 이러한 기적도 일어날 것입니다. 꼭 예수를 안 믿을 사람이었는데, 절대로 예수를 안 믿을 줄 알았는데 예수를 전하고 기도하니까 그 사람이 손목을 붙들면서 자네가 예수를 전해 준 것이 고맙네. 돌 같던 내 마음이 살같이 이렇게 부드러워질 줄은 나도 몰랐네.”라고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마음에 일어난 기적이고 전도한 사람의 마음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적을 바라야 합니다. 태양이 녹아지고 소련이 없어지는 기적을 바라지 말고, 우리가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는 것을 바라지 말고 마음 마음이 예수님을 받아들여서 그리스도를 닮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이런 기적이 확실히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맙시다. 그래야만 우리가 이 땅의 그리스도의 정병(精兵)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다는 그것을 위해서 살기도 모자랄 것입니다. 이 우주는 주님의 것입니다.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 편에 서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송두리째 소유할 분이십니다.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당연히 우리 주님은 이런 일을 해주실 것입니다. 무엇 하나 기적이 아닌 것이 있습니까? 내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죽었다 살아난 사람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하고 내 존재가 신기하고 내 시간과 내 눈과 저 하늘과 저 들과 내 친구와 모든 것이 놀라움이고 모든 것이 감격입니다. 우리들의 가슴마다 이러한 기적과 이러한 감격으로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절대로 우리는 주님의 허락 없이는 죽지 않습니다. 머리털 하나까지도 세인 바 되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저의 피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값싼 이름으로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체험했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저를 잡고 저를 죽이려고 총을 겨누고 투창을 가지고 다녔지만 저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는 동안 저는 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지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도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아무리 굳건하다고 하는 세력도 하루아침에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심장을 멎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땅 속에 묻어 버리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는 동안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소명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사정은 달라질 수 있고 우리는 변할 수가 있습니다. 기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매순간마다 우리들의 생애에는 기적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이하의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또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내일도 우리의 세계는 아닙니다. 어제는 지나간 시간입니다. 오늘만이 풍성한 주의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주님 앞에 풍성히 살쪄 가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익어가는 가을이 아닙니까? 하루하루 경건되게 살고, 주님 앞에서 우주의 공주처럼, 왕자처럼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지구에서 뿐만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이 아닙니다. 영원히 영원히 이 우주의 왕자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청춘입니다. 청춘이 없는 생명은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청춘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영원히 젊고, 영원히 사랑하고, 영원히 우리들의 선율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들의 생활은 청춘이 계속되는 생활입니다. 소망이 우리들의 것입니다. 기적이 날마다 생활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의 생활 가운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계획을 크게 가지십시오.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우리는 반드시 계획을 가지십시다. 한국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십시다.

우리는 한국을 그리스도께 바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먼저는 한국의 학원을 정복합시다. 이것 밖에는 살 길이 없습니다. 무엇으로 이 세상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다니고 있는 학교의 이념 가운데, 한국에서 일어난 사업 가운데, 이 세계에서 일어난 사업 가운데 인간의 이 죄스러운 이기적인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 있습니까? 제가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이 사실이 틀렸다고 한다면 언제든지 내버릴 용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는 그리스도밖에는 사람의 마음을 바꿀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으로 우리는 한국의 학생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다음에 한국을 변화시키고 다음에 아시아를 향해서, 세계를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겠습니다. 철의 장막 안에까지도 이 귀한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유하고 전하는 우리들의 이 특권은 얼마나 위대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40년 동안 광야로 내몰았습니다. 미디안 광야의 생활은 목마르고 굶주리고 고독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생활은 정말 외롭고 가난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훈련이 되어서 주님이 앞날의 아시아를 위해서 우리를 준비하고 계신 것으로 꼭 믿고 싶습니다. 우리는 강하게 뭉쳐야 합니다. 저를 위해서나 CCC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을 위하여 지극히 사랑하며 지극히 강하게 힘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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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12/28 [08:47]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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