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133:1-3, 엡 2:13-16
제가 2008년 1월 13일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다음 주일부터 지난 13년 5개월 동안 주일마다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2015년 8월 23일 주일 여기 의정부 한꿈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인생”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6년 7월 3일 주일 두 번째로 와서 “헌신과 섬김의 귀중한 삶”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7년 8월 6일 주일 세 번째로 와서 “건강한 교회와 행복한 성도”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8년 6월 7일 주일 네 번째로 와서 물 댄 동산 침례교회와 함께 모여서 예배 드리면서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9년 6월 16일 주일 다섯 번째로 와서 물댄동산 침례교회와 함께 모여서 예배 드리면서 “가난과 고난과 수고와 슬픔과 아픔의 유익”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20년4월 12일 주일 여섯 번째로 와서 “성탄과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자” 라는 좀 긴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21년 1월 31일 주일 일곱 번째로 와서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2021년 6월 6일 주일 여덟 번째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저를 불러주신 임용석 목사님과 성도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임용석 목사님이 지난 2월 1일 저의 홈 페이지 방명록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남과 북이 하나되는 한꿈교회 임용석 입니다. 늘 변함없는 열정과 사랑으로 해마다 남북이 하나되는 한꿈교회를 섬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특별히 북한 동포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회복되어야 "가정이 살고 사회가 살고 나라가 산다" 라는 은혜의 말씀을 주셔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한꿈교회 공동체가 "존귀하고 아름다운 교회: 초대교회가 되기를 노력하고 정진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셔서 자주 방문해주셔서 아름다운 복음의 말씀을 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시대 복음의 통일을 기대하며 기도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한꿈교회 임용석 드림 –
그래서 제가 다음과 같은 답글을 써서 올렸습니다. “사랑하는 임용석 목사님에게. 지난 주일 의정부 한꿈교회 7 번째 방문은 아주 반갑고 은혜로운 방문이었습니다. 남과 북이 하나됨을 꿈꾸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 방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음 6월 첫 주일 방문에는 "남과 북이 하나됨을 꿈꾸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 라는 제목의 설교를 준비해서 하려고 합니다. 사실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 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주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사람을 버리시지 않고 심부름꾼으로 써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모릅니다. 부탁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부탁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위로와 평안과 기쁨과 축복이 사랑하는 임용석 목사님 부부와 한꿈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21년 2월 3일 김명혁 목사”
결국 오늘 2021년 6월 6일 주일 여기 의정부 한꿈교회에 여덟 번째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남과 북이 하나됨을 꿈꾸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죄와 허물로 저주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우리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구원을 베푸시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구원”의 하나님이시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죄인들에게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가져다 주시는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의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합니다.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비전입니다.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은 성경의 목표이며 역사의 완성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연합하여 하나되는 아름다운 모습과 자연 만물이 모두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오래 전에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 찌어다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찌어다(시 148:3,9,10,13).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서로서로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시는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의 하나님이십니다.
첫째로, “화해”에 대한 말씀들을 찾아 봅니다. 구약 성경 창세기는 야곱과 에서의 “화해”와 “화목”의 장면을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 “야곱은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 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갓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창 33:3,4). 창세기는 또한 요셉과 그의 형들과의 “화해”와 “화목”의 장면을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창 45:1,2). 구약 성경은 또한 이스라엘은 물론 원수와 같은 이방 나라들과도 “화해”를 이루는 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이고 섭리라고 지적했습니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사 19:23). “화해”는 인류를 향하신 성부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약 성경은 성부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우리들끼리만 아니고 세상과 “화해”를 이루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신약 성경은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루신 것이 “화해” 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18). 성자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예배를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임하시므로 서로 갈라져서 불신과 증오가운데서 살던 다문화 다인종 다민족 3천여 명이 함께 모여 “화해”하며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기독교는 “화해”의 종교입니다. “화해”와 “화목”은 진리의 깃발을 높이 휘두르므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낮아짐과 양보와 착함과 선행의 마음과 행실로 이루어집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와 사회와 남북한에 가장 필요한 것은 “화해”와 “화목”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야곱처럼 요셉처럼 무릎을 꿇고 서로 부둥켜 안고 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평생토록 염원하며 기도하여야 할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도 ‘화해’와 ‘화목’을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지니고 살면서 ‘화해’와 ‘화목’을 조금이라도 실현하면서 살게 하시옵소서” 라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평화”에 대한 말씀들을 찾아 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평화”를 만드시고 “평화”를 가져다 주시는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레 26:6).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므로 “평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평강(평화)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사 53:5). 성자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고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버리심으로 우리 죄인들을 찾아 주셨고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평화” 또는 “화평” 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 2:16).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열매가 바로 사랑과 희락과 함께 “화평” 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갈 5:22).
“평화”는 낙원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평화”는 인류의 회복과 만물의 회복과 우주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평화”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화평”과 “평화”를 이루면서 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딤후 2:22). “화평”과 “평화”를 도모하면서 한 평생을 산 사람이 바로 평화의 사도 프랜시스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우리들도 그렇게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됨”에 대한 말씀들을 찾아 봅니다. “화해”와 “평화”와 함께 “하나됨”은 우리 죄인들과 피조물을 향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하나님의 뜻은 둘로 갈라졌던 남과 북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었고 서로 원수같이 지내던 이방인들과도 “하나”를 이루는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하라”(겔 37:18).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사 19:23-24).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못박혀 죽으심으로 갈라져서 서로 싸우고 서로 죽이는 인간들을 “화해”하게 하시고 “평화”를 이루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됨”을 이루면서 살게 하셨다고 사도 바울이 선언하고 또 선언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3-19).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가 “하나” 라고 강하게 선언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사람들뿐이 아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통일” 되게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사도 바울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하나되게 하시는”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성령님께서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강림하시므로 서로 갈라져서 불신과 증오가운데서 살아가던 다문화 다인종 다민족 3천여 명이 모두 함께 모여 친밀하게 교제하게 되었고 그래서 모두가 “하나”가 되어 “통일”을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모든 종류의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고 그리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과 피조물들이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면서 아름답게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서로 멸시하고 미워하고 싸우면서 살지 말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지니고 나타내면서 살고 그리고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면서 아름답게 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7).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마 6:14).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자비를 베풀라) 하시니라”(눅 10:37).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화해)하라”(마 5:24,25). 성부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인종과 계급과 종교와 이념과 신학과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성자 예수님 안에서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풀고 그래서 모두와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면서 아름답게 살라고 분부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분부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2,3).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은 하나님의 뜻과 비전입니다.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은 성경의 목표이며 역사의 완성 점입니다.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은 부수적인 것도 아니고 선택적인 것도 아닙니다.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은 본질적인 것이고 필수적인 것입니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은 물론 모든 민족과 세계와 우주의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비전이고 성경의 목표이며 역사의 완성 점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계와 온 우주가 즉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모두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게 될 것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계 7:9-12).
지금 우리 한국 교회와 사회 안에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화려한 예배나 정통 진리의 선포 이전에 서로 붙잡고 울면서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인 의식”을 가질 때는 불가능하고 “죄인 의식”을 가질 때 비로서 가능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먼저 낮은 자세와 온유 겸손한 자세를 지니고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룰 때, 양극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와 정치도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고저 하는 자극과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적대적으로 치닫고 있는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도 조만간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우리 죄인들이 십자가 상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함께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의 흔적을 몸과 마음과 영혼에 조금씩 지니고 나타내면서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그리고 십자가의 정신을 몸에 지니고 사신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과 같은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우리들도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흔적과 함께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의 흔적을 몸과 마음과 영혼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지니고 나타내면서 살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님처럼, 토마스 선교사님처럼, 주기철 목사님처럼, 손양원 목사님처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있는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의 제물들이 될 때 ‘죄악’과 ‘분노’와 ‘증오’와 ‘갈등’과 ‘분열’과 ‘혼돈’이 가득한 이 땅에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 그리고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의 역사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본래 일본 사람을 싫어했고 북한 사람을 싫어했고 중국 사람을 싫어했고 모슬렘 사람을 싫어했고 타 종교인들을 싫어했습니다. 자유주의자도 싫어했고 순복음주의자도 싫어했습니다. 결국 반일 반북 반공 반중 반 모슬렘 반 타종교 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존 스토트 박사님과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므로 조금씩, 조금씩 저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어졌습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 박사님은 “Dynamic unity holding both extremes”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즉 “양극을 붙잡을 때 역동적인 통일을 이루게 된다” 라는 말입니다. 결국 저는 일본 사람들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일본 교회와 교류하는데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을 사랑하며 북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을 사랑하며 중국 연변에 있는 조선족 어린이들 150여명을 지난 21년 동안 계속해서 돕게 되었습니다. 북 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에 가서 가뭄으로 죽어가는 모슬렘 사람들에게 우물 열 몇 개를 파 주었고, 가난과 고난과 질병 중에 있는 방글라데시를 찾아가서 안과 진료소를 지어주기도 했고,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을 당하는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학교 하나를 지어주고 아프간 어린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기도 했습니다. 기장과도 순복음과도 친밀하게 소통하며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5개 종단의 종교 지도자들과도 친하게 교제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1997년 4월 3일 강원도의 감자 1690톤을 기독교와 타종고인들이 사서 99대에 실어서 북한에 보내기도 했고, 2010년 8월 27일에는 5개 종단 지도자들 9명과 함께 밀가루 300톤을 가지고 북한 개성에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오기도 했습니다.
저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날마다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 중의 괴수이지만,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기를 소원합니다.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그리고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서 혹시 제가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을 수는 없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고 남북한을 불쌍히 여기시고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부족한 우리들을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위해 바쳐지는 조그만 제물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주여, 순교자들이 흘린 피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화해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평화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하나됨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2015년 1월 1일 오후 2시 38선 근처인 임직각에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 2천여 명이 함께 모여서 “한국교회 평화통일 기도회”를 가졌는데 부족한 제가 간단한 설교 말씀을 전했습니다. 설교 말씀이라기 보다는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라는 제목으로 호소의 기도를 드렸는데 그 때 한 호소의 기도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이시지만 궁극적으로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이신 것을 이 죄인은 잘 알면서도 한 평생 민족의 구원은 물론 민족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마음도 몸도 생명도 바치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방을 미워하고 정죄하는 반 화해적이고 반 평화적이고 반 통일적인 아니 반 하나님적인 반역과 위선의 죄를 짊어지고 이기적으로 정욕적으로 살아온 것을 뉘우치며 북녘 땅을 바라보는 이 자리에서 통회 자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던 형 에서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울면서 형과 화해한 사실을 기록해서(창33:3,4) 우리들에게 알려주셨지만, 우리들은 잘못을 범한 동족을 끌어 안지도 함께 울지도 못하고 서로 미워하면서 한 평생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자기를 애굽에 노예로 팔아먹은 형들을 만나서 분노와 증오를 나타내는 대신 형제의 정을 억지하지 못하고 방성대곡하며 울면서 형들과 화해한 사실을 기록해서(창 45:1,2) 우리들에게 알려주셨지만, 우리들은 6.25를 통해 우리들에게 해를 끼친 북녘 동포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계속해서 지니고 나타내면서 한 평생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져서 동족 상쟁의 삶을 살고 있을 때 선지자 에스겔에게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하라”(겔 37:18) 라는 민족 통일의 사명을 주시고 남북의 통일을 이루게 하셨지만, 우리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민족 통일의 사명을 망각한 채 우리 자신들만 위해서 이기적으로 그리고 세속적으로 한 평생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은 분단 70주년을 맞는 지금까지도 남북의 화해는커녕 남남의 갈등과 한국 교회의 분열만 조성하면서 분노와 증오와 정죄와 위선을 몸에 지닌 반화해적이고 반통일적인 삶을 살아오고 있는 죄를 뉘우치며 북녘 땅을 바라보는 이 자리에서 통회 자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것이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세상에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시기 위함이라고 기록해 주시고(엡 2:13-16,1:10) 우리들에게 알려주셨고 우리들에게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사명을 주셨지만, 우리들은 오히려 불화와 혼란과 분열을 조성하고 정당화하는 반 십자가적인 삶을 살아온 죄를 뉘우치며 북녘 땅을 바라보는 이 자리에서 통회 자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부끄럽지만 하나님께서 써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 자리에서 다시 읽으며 새겨보려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며 화해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하심이라”(엡 2:13-16).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하나님 아버지! 이제 부끄러운 우리 죄인들이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먼저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죄를 회개하는 일이고 그리고 우리 북녘 동포들의 목을 끌어안고 울면서 화해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불순종의 죄를 통회 자복합니다. 북녘의 동포들이여! 우리들의 무정함과 적대시의 죄를 통회 자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은 전혀 자격이 없지만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의 구원과 함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제물이 되신 것처럼, 스데반 집사와 손양원 목사님이 그 뒤를 따른 것처럼, 우리들도 민족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위한 조그만 제물들이 될 수는 없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 중의 괴수이지만,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기를 소원합니다. 북녘 동포들을 위해서 그리고 민족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혹시 제가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을 수는 없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여기 모인 부족한 우리들의 평화 통일을 위한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긍휼을 베푸셔서 조만간 우리들에게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선물로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여기 모인 부족한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남북과 민족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위해 바쳐지는 조그만 제물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독생자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을 보시고 그리고 순교자들이 흘린 피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고, 혼란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심고,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와 하나됨을 심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의정부 한꿈교회가 “남과 북이 하나됨을 꿈꾸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로 자라게 하시고 의정부 한꿈교회가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는 귀중한 제물이 되기를 간절하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