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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0.12.01 [18:16]
‘마을목회’의 모델 순교자 문준경…포스트 코로나19 한국교회 사역의 방향
신자와 불신자 모두 목회의 대상으로 여겼던 섬마을 전도사
 
김철영

  

낙도의 순교자 문준경(1891.2.2.-1950.10.5.)천사의 섬신안군에서 목회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

 

신안군 암태도에서출생한 문준경은 38세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문준경 전도사는 19315월 경성성서학원에 청강생으로 입학했다. 청강생 2, 수양생 3년 등 5년간 수학했다.

 

▲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의 삶과 예수제자의 삶이 용해되 있는 증도면의 초입 증동리 교회 첨탑를 바라보며 윤동주의 시 십자가를 생각했다.     ©강경구

 

문 전도사는 19327월 임자교회 교역자로 파송을 받았다. 1935년에는 증도 증동리교회를 설립 목회했다. 1938년에는 대초교회를 설립했다. 기도처는 임자 재원리, 망축리, 사옥도, 우전리, 지도 둔독, 지도 봉리 등이다. 그리고 1950105일 증동리 백사장에서 순교했다.

 

문 전도사는 첫 임지인 임자교회를 시작으로 순교하기까지 만 18년 동안 사역을 하면서 복음전도와 사랑과 섬김의 실천 사역의 모델을 제시했다.

 

한국대학생선교회 설립자이자 성시화운동 창설자인 고 김준곤 목사(1924-2009)는 문준경 전도사의 사역을 보면서 칼빈의 제네바 개혁운동과 문준경 전도사의 대신거지운동을 성시화운동의 모델로 삼았다고 했다.

 

김준곤 목사는 문 전도사는 내게는 친척 아주머니이다. 나에게 처음으로 예수님을 소개해 주신 분이다. 종종 어머니에게 와 이삼일 씩 머물면서 개척 전도를 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김 목사의 지도 봉리가 문 전도사의 기도처였던 것이다.

▲ 석판에 새겨진 순교 당시의 모습... 멀리 증동리 앞바다를 주시하는 그녀의 입에서는 퍼져나왔을 예수정신... 예수사랑...     ©강경구

 

 

 

김 목사는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몸도 요양하고 목회견습도 할 겸해서 아주머니가 시무하시는 증동리교회에 두달 반 동안 식객이 된 일이 있었다. 나를 친아들처럼 사랑해 주셨다. 합동신학교 명예총장 신복윤 목사도 같이 있었다.”고 했다.

 

이어 그 집에는 무의탁한 병든 여성들이 너댓 명씩 묵고 있었다. 새벽기도가 끝나면 큰 바랑을 들쳐메고 나가곤 했다.”아주머니는 그 동네 집집마다 사정을 백과사전처럼 알고 있었다. 심방수첩에는 신불신의 차별이 없이 신상기록이 있고, 5퍼센트 정도의 부잣집, 굶는 집, 병든 집 등 사정이 카드화 되어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또한 먼저 도는 집은 잘 사는 집들인데 누룽지를 당연히 수합했다. 제사음식, 잔치음식도 걷었다. 푸짐하게 거둔 누룽지와 제삿집 음식들은 배고픈 집마다 나눠주었다. 어느 문화권에서도 거지는 천대 받지만 이 마을 저마을 거지는 천사 같은 거룩한 대신 거지였다.”고 했다.

 

김 목사는 나는 여기에 굶어 죽지는 못하게 하는, 사회복지문제를 해결하는 나눔과 사랑의 비결이 있다고 믿는다. ‘대신 거지천사 크리스천들이 동네마다 십시일반, 오병이어운동을 벌여 잘 사는 집들에서 그 아주머니의 누룽지(성금)를 거둬 배고픈 가정에 나눠주는전략을 제시했다.

 

김 목사는 그 아주머니가 또 하나 하는 일이 있었다. 전국 교회 아는 분들에게 부탁해서 피부병 연고, 소화제, 소염제, 항생제, 영양제를 모아서 자루에 담아 가지고 신·불신을 가리지 않고 병자들을 심방했다. 심방하면 만져주고 쓸어주면서, 약도 먹이고 기도를 하면, 신통하게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나서 의사보다 아주머니를 청했다. 엉터리 의사지만 거룩한 천사 의사였다. 귀신들린 사람을 위해서 그의 특유한 찬송을 반복해서 부르고 기도를 했다. 어떤 분은 그를 무당 같다 했다. 나는 거룩한 무당이라 했다. 도박하고, 계집질하고, 아내 구타하고, 불효하는 자식을 끌고 오는 어머니도 있었는데, 그 아주머니 앞에서는 벌벌 떨며 다시는 안 하겠다고 다짐한 후 교회 나오는 청년도 있었다.”고 했다.

 

 

▲ 성결교단 최초 여성순교자인 문준경 전도사가 최초로 개척한 임자진리교회 조각작품 / 사진 돌봄여행사 여행일지에서     ©뉴스파워

 

김 목사는 그녀는 그 동네의 드보라 같은 한국판 여()사사이며, 의사이며, 만나를 나눠주는 모세이며, 뭇 사람의 어머니이며, 주의 빛이고, 소금이고, 대사였다. 그리고 선한 목자이며 교회는 목민센터였다.”고 평가했다.

 

김준곤 엮음, 성시화운동 편람(2005, 순출판사)에 나온 내용이다.

 

김준곤 목사가 내 신앙의 원초 문준경 전도사님이라는 글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나룻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와야 하는 우리 집에 그 분은 종종 찾아오셔서, 몹시 외롭게 사시던 우리 어머니와 머물면서 전도집회를 열곤 하셨다. 수수한 아주머니처럼 고무신을 신고 과자 선물을 듬뿍 가지고 오셔서 껴안고 기도해주시곤 하셨다.

 

초등학교도 다닌 일이 없고, 도레미파를 배운 적도 없지만, 그 분 특유의 낭랑한 목청으로 당시 이성봉 목사님이 많이 부르시던 허사가나 부흥성가, 천당가를 부르면, 우리 집 마당으로 동네 아낙네들과 어린이들과 강아지까지 다 모였다. 그러면 그 분은 일장(一場) 전도설교를 시작하곤 했다.

 

나는 당시에 그 분이 무식한 말을 한다고 생가했다. 예수는 4대 성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가르쳤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전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이 오시면 잔치 같은 분위기가 되는 것이 왠지 모르게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신학교에 간 것을 누구보다 기뻐하신 분은 문 전도사님이셨다. 한 번은 내게 찾아와 돈이 있는지 물으셨다. "어떻게 되겠지요."하고선, 그때 마침 미군부대에 다니던 친구가 가져다준 다이야찐 고약 수천 개를 목회하는 데 쓰십사고 드렸다. 그런데 그것을 집집마다 팔아서 근1년 학비를 만들어 보내주신 일도 있었다.”

    
김준곤 목사는 1974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엑스플로 '74대회 이후  마을 입구에 있는 땅을 봉리교회 건축을 위해 기증했다. 김 목사의 모친 김통안 권사는 평생 기도로 김 목사의 사역을 위해 지원했다.

▲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소서!라는 슬로건으로 최용호 목사와 김동언, 남인주, 남대남 시무 장로가 마음과 뜻을 모으고 있다. 봉리교회 가까운     ©강경구

 

한편 한국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고 김준곤 목사(한국ccc 설립자), 이만신 목사(한기총 증경회장, 중앙성결교회 원로), 이봉성 목사(한기총 총무 역임), 이만성 목사(기성 증경총회장), 정태기 교수를 비롯 66명의 교역자와 33명의 법조인이 문 전도사의 영향을 받았다.

 

문준경 전도사의 사역은 신안의 이미지를 천사의 섬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무엇보다 증도는 풍어제, 무당, 술집이 없는 3무의 섬이다. 지난 2007년 슬로시티로 지정이 됐고, 최초의 금연의 섬으로 지정됐다.

 

신안군과 신안군 의회는 조례를 개정해 증도에서는 주민이나 관광객들이 담배를 피울 수 없도록 했다. 담배 판매도 할 수 없다. 그야말로 청정의 섬을 만든 것이다.

 

문준경 전도사의 사역은 성시화운동 사역의 모델이 되었다. 또한 경실련 사무총장을 역임한 서경석 목사는 김준곤 목사로부터 대신거지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전국 4,000여 명의 작은 교회 목회자들을 조직해 나눔과 기쁨사역을 시작했다. 지자체의 도움을 받지 못하지만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복지사각지대의 차상위 계층들에게 반찬나눔 등을 전개하고 있다.

 

문준경 전도사의 사역은 마을목회의 모델을 제시했다고 하는데 의미가 있다. 문 전도사는 교회를 출석하고 있는 신자들은 우리 안의 양으로, 비신자들은 우리 밖에 있는 양으로 여기고 통합적 사역을 감당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마을의 목자 역할을 했던 사역자였다.

 

복음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실천 사역을 통해 마을의 가정들마다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도록 하는데 보이지 않는 역할을 했다.

 

문준경 전도사의 사역의 발자취에서 포스트 코로나19 시대 한국 교회의 목회의 방향에 대한 지혜를 얻기를 바란다. 지역 주민들 속으로 들어가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목민센터, 지역민의 목자 역할을 감당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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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0/26 [16:06]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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