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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0.09.26 [10:02]
[증언]한국 친구들과 함께 한 나의 길
[2020 한반도 희년 세계교회 기도운동]
 
폴 슈나이스

 

▲ 2020 한반도 희년 세계교회 기도운동     © 뉴스파워

 
한국 친구들과 함께 한 나의 “순례”는 1972년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나의 친구들은 유신헌법 반대시위에 동참했다. 이후 친구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결의를 표하며 삭발을 단행했고, 대학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백주 대낮에 일본의 한 호텔에서 살해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다.

1976년에는 서울에서 많은 친구들이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나는 1975년부터 일본교회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있었고, 일본교회와 독일교회를 대표하여 여러 재판을 방청했다. 나는 거의 매주 도쿄에서 서울로 건너가야 했다. 그런데 1977년 겨울, 한국 정부는 나를 ‘비우호적 인물(PERSONA NON GRATA)’로 선언하고 10년 이상 입국을 불허했다. 체포와 고문을 당하고 재판을 받았던 친구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당시 수백 명의 학생들과 노동자들, 그리고 성직자들이 고통을 당했다. 수많은 가짜 기소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 중에는 너무나 사랑하는 성남지역 민중교회 교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도쿄에서 지내는 동안 일본의 기자들, 교계 인사들, 정치인들, 그리고 학생들과 함께 한국에서 오는 소식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한국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그들의 전국적 활동은 자신들의 소망을 표현할 목소리도 힘도 없었던 많은 한국인들에게 힘이 되었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 당했을 때, 한국 안팎의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기회가 올 수 있다고 희망했지만, 1979년 12월에 또 다른 군 장성이 권력을 장악했다. 처음에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인권실현을 통해 한반도 통일이 이뤄질 수 있다는 큰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1980년 5월, 기대와는 전혀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5월 17일, 나의 아내는 미국인 친구와 함께 도쿄에서 서울로 건너갔다. 그때 그들은 민주주의 정치 발전을 위해 활동하고 있던 학생, 노동자, 그리고 교회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모을 계획이었다. 가까운 친구들, NCCK 인권위원회, 가톨릭 신부, 학생들, 교수들, 그리고 노동조합원들을 만나고자 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소음이 들렸고 트럭, 자동차, 탱크, 군대가 나타나 남쪽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왜 그렇게 많은 군대가 도시를 통과하는 건지, 호텔에 머물던 두 여성은 너무나 이상한 느낌을 받았고 몇 시간 동안 그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다음 날 아침, 아무도 호텔을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 누구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질문만 있을 뿐, 답은 없었다. 나의 아내는 호텔에서 나갈 기회를 얻었고, 어떤 소식이라도 듣기를 바라며 신문사 사무실에 들렀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었고,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통행금지 시간이었지만 막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호텔에서는 더 혼란스러웠다. 9시 정도에 몇몇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대부분 연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가까운 친구 한 명이 남쪽에 있는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군대가 광주를 급습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고, 많은 친구들이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급박했던 상황 때문에 아내와 아내의 친구는 만날 수 없었다.

나는 도쿄에서 기다렸던 아내의 연락을 받았고, 독일 기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그 중 한 명은 신속하게 서울행 비행기를 탔지만, 서울에서 광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기차도, 버스도 없었고 광주에 친구도 없었다. 그럼에도, 다음 날 그는 광주에 도착했고 그가 본 것을 영상에 담았다. 그리고 그 영상을 도쿄행 비행기로 보냈고, 그는 다시 광주로 돌아갔다.

나는 독일 TV 기자들과 협력하며 그 원본 영상을 보았다. 며칠 후 이 영상은 독일에서 방송되었고, 전 세계로 퍼졌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 영상에 대해 표현할 수가 없다. 내 아내와 그녀의 친구가 도쿄로 돌아온 후 3일 정도 지나서 나와 기자들에게 말해준 바에 의하면, 당시 어디에나 경찰과 군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몇 주 동안 광주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가장 끔찍했던 것은 힌츠피터(Hinzpeter) 기자가 찍은 사진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미 정부가 한국군대의 광주시민 진압을 승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북한군의 공격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해야 할 군대가 시민을 진압한 것이다.

한국 입국이 다시 허용된 후 1988년, 나는 독일에서 한국으로 입국해 곧장 광주의 묘지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하루 동안 머물렀다. 1980년에 사망한 사람들의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고, 신원 확인을 위해서는 시신 발굴이 필요했다. 내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들이 있다. 1976년 김지하를 비롯하여 법정에 섰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사랑한 장소들이 있다. 민중교회와 성남, 광주, 그리고 제주도이다. 올해에 다시 이 노래가 들려온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Witness 4 'My walk with Korean friends' 

- Rev. Paul Schneiss



My “pilgrimage” with friends in Korea started in Germany when I joined a demonstration of these friends against the Yushin-Constitution in 1972. Later my friends cut their hair to show their commitment to democracy and were dispelled from the university. The next experience was when Kim Dae Jung, the later president, was kidnapped from a hotel in Tokyo in broad daylight to be killed on his way to South Korea.

In 1976 many of my friends were arrested and put to trial in Seoul and I was asked to attend these trials on behalf of my German church and my Japanese church, where I was serving as a missionary since 1975. Nearly every week I had to travel from Tokyo to Seoul – In December 1977, the Korean government declared me a persona non grata and expelled me for more than 10 years. It was hard not to be able to meet the friends who were arrested, tortured, put to trial. Hundreds of students and workers, some clergy too. A lot of fake indictments led to death sentences. Among them a member of my beloved minjung church in Songnam-city, near Seoul.

During those years in Tokyo I had the chance to share the news from Korea with journalists, church people, politicians and students in Japan. Their nationwide movement for democracy and human rights in Korea was encouraging for many people in Korea who had no voice nor power to demonstrate their own hopes. When president Park was assassinated in October 1979 many people in Korea and outside hoped that democracy and human rights would have a chance - but another military general took control of the country in December 1979. At first there was great hope that the country would move for real democracy and the establishment of Human Rights as preparation for unification of the whole country. But then in May 1980 developments took on a very different character.

On May 17 my wife and her American friend travelled from Tokyo to Seoul. They were expected to collect information about activities of students, workers and churches who were all campaigning for true democratic political developments. They were expected to meet close friends, the Human Rights Committee, 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a Catholic Bishop, students and professors, and members of labor unions. Then suddenly this noise: trucks, cars, tanks – the military was appearing and moving in a southward direction. This took hours and hours: why was so many military moving through the city? A very strange feeling overcame the two women in their hotel, but they followed these moves for hours. In the early morning they realized that nobody could leave the hotel. And nobody knew why. Only questions, no answers. My wife found a way to leave the hotel and dropped in at a newspaper company hoping to get any news. But nobody was there to talk to. So she went back to her hotel. Though there was curfew nobody stopped her. But at the hotel there was still more confusion. Nobody knew what really was going on. About 9 o’clock my wife tried to phone some friends, most without connection. Only one very good friend told her that something is going on in the south, that is Kwangju, and that the military is making an assault on the city of Kwangju. Then another friend, she called by phone, told her, that many of our friends had been arrested by police. Because of this situation my wife and her friend could not meet.

Then my wife called Tokyo. I was waiting for this call. After that I contacted German journalists. One of them took the next plane to Seoul. From Seoul to Kwangju travelling was not easy: no train, no bus, no friend in Kwangju. Yet, the next day he managed to arrive in the city and filmed what he saw. He took the film to the next plane bound for Tokyo – and returned again to Kwangju.

This original film I saw when I cooperated with the journalists of German TV. A few days later this film was shown on TV in Germany and all over the world. Until now I cannot describe the film. When my wife and her friend arrived back in Tokyo some three days later they told me and the journalists more of her experience: police and soldiers were everywhere. For weeks people in Kwangju could not be reached by phone. But the most frightening experience were the pictures brought by the journalist Mr. Hinzpeter. Very quickly we learned that the then US-government had given permission to the Korean military to make the assault on Kwangju citizens, the military that was expected to defend against any North Korean aggression.

When I finally was allowed to enter Korea again, in 1988 (travelling from Germany) I went straight to Kwangju cemetery and stayed there for one day, when families and friends of persons killed in 1980 had to be exhumed to find out about their identity. - These faces I will never forget are of those who were on trial in court, starting with Kim Chi Ha in 1976, and their families; the places I love are Songnam with the minjung church, Kwangju and Chejudo. This year I hear anew: “We are marching on; keep faith n follow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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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5/14 [15:11]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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