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
광고
교계뉴스문화/교육국제/NGO/언론파워인터뷰생활/건강오피니언연재정치/경제/사회한 줄 뉴스
전체기사보기
편집  2020.07.05 [12:05]
[4.15 총선 설교]분별: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교회협 제공]박일영 목사(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교육원장)
 
박일영
광고

    

▲ 촛불을 들고 기도하고 있다     ©뉴스파워

 

 

본문 :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현재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요즘 교단을 막론하고 교인 수가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으며, 다음 세대를 이어갈 젊은 사람들과 어린이들을 교회 안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한국에 있다고 자랑하지만, 이런 대형교회들이 오히려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각종 추문의 온상이 되곤 합니다. 이런 추문들로 인해 교회 안팎으로 염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한국교회는 문제를 수습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교회의 존재 이유 자체가 불분명해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의 친목 단체도, 부를 추구하는 사업체도 아닙니다. 세속적 명예와 권력과 돈을 추구하는 정치 목사들의 정쟁 터는 더욱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취된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실현해야 하는 선교의 과제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 교회를 이 사회가 존중해 줄 리 없고, 또한 하나님이 지켜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소위 보수를 자처하는 기독교인들이 연일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구국을 빌미로 집회를 이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명백히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저질스러운 비기독교적인 구호를 외치는 그런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주장하며 이런 일들을 주도하고 있는데도, 한국 교회는 그러한 일들을 저지할 수 있는 역량을 보이지 못합니다. 이런 현상을 단순히 의사 표현의 자유문제나 정치적인 입장의 다양성으로 가볍게 여기는 것은 사태를 너무 안일하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성령의 이름으로 외쳐지는 그들의 주장은 간혹 신성모독에 가깝습니다. 상대적으로 상당히 성숙해진 우리 사회의 시민의식에 비쳐지는 그들의 모습은 한국교회의 미성숙함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통일과 평화를 지향해야 할 우리 민족의 과제를 흐리게 하는 반사회적인 행동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정치와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기 시작한 근대 이후 대체로 정교분리는 상식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교회와 정치는 간단하게 분리될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교회와 사회는 이분법적으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영과 육, 정신과 물질, 거룩과 세속, 초월과 일상이 엄격하게 분리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영적 권위가 세속 권력 위에 군림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중세 때,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었던 마르틴 루터는 소위 두 왕국(통치)론을 주장하였습니다. 루터의 두 왕국론은 교회가 세속적인 절대 권력을 묵인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고 오해를 받기도 하고, 또 그런 방식으로 오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두 영역을 분리한 것이 아니라, 교회와 사회 모두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이고, 그리스도인은 두 영역의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루터의 두 통치론은 그의 소명론과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루터 당시 소명이라는 말은 성직자나 수도사가 되는 거룩한 삶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 세상에서 갖는 모든 신분과 직업을 소명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성직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직업과 책임과 권한을 통해서 행하는 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교회 안에서만 혹은 예배를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행하는 일들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부귀를 누리기 위해 일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기독교인은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회가 요구하는 공공의 삶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잘 알려진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세 가지 행동을 지적합니다. 첫째는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행동으로서의 노동’(labor)입니다. 둘째는 정신적인 충족을 위해 창조적인 것을 추구하는 행동으로서의 ’(work)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공의 대의를 추구하는 행동으로서의 행위’(action)입니다. 아렌트에 의하면 인간은 정치적 동물입니다. 사회적 존재입니다. 인간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공의 영역에서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생존을 위한 육적인 노동과 창의성을 추구하는 정신적인 일로 충족되지 못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공공의 행위가운데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실현해야 하는 정치적인 존재입니다. 이런 면에서 정치란 말은 정치가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상식적으로도 자기만족의 울타리 안에 갇혀 사는 사람보다는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훨씬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 번째 정치적 영역에 속한 행위를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자기중심적인 죄된 본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가치를 상실케 하는 이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죄도 문제이지만, 내 밖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죄도 문제인 것입니다.

 

특별히 현대 사회는 개개인이 갖는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여기게 만들고, 자신의 고유한 결단의 권리를 쉽게 포기하고, 남에게 양보하게 만드는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부신 과학의 발전으로 이전 세대가 누려보지 못했던 편리함과 경이로움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소비문화 속에서 인간의 삶의 의미와 가치는 이전보다 훨씬 교묘한 방식으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각종 상품들이 생활의 편의를 가져다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로 인해 우리는 이웃들과의 접촉과 협력을 덜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 간 소통이나 관계조차 네트워크에 의존하게 되면서 사람끼리의 살을 맞대는 관계는 점점 그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짧은 주기로 새롭게 업그레이드되는 상품들이 온통 우리의 관심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도 인간의 가치를 상실케 하는 악마성을 갖고 있습니다. 물질의 가치가 정신적 인격적 가치를 넘어서 있습니다. 개인주의는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옛날 가정과 학교, 교회와 사회와 민족 가운데 살아 숨 쉬던 공동체성은 해체되었습니다. 이전의 연대감이나 공동체성이 결여된 현대문화 속에서 인간은 점차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삶의 방식을 익히게 되었고, 이렇게 고립된 개인은 대중에 휩쓸리는 방식으로 고립감을 해소하려고 합니다. 고립된 개인들의 집합체로서의 대중은 맹목적적이고 공공성에 있어서 무책임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개개인들은 대중에 휩쓸려 따라갈 뿐, 자신만의 고유한 사회적 책임과 권리를 대중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 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현대 문화의 특성을 앞서 언급한 한나 아렌트를 비롯한 많은 사상가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생각처럼 쉽게 성숙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 방향을 취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종교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어떤 종교는 명상과 같은 수련 방법으로 깨달음의 경지를 추구하기도 하며, 또 어떤 종교는 제의적, 도덕적으로 지켜야 할 법을 준수하는 것을 중시하기도 합니다. 기독교도 이러한 요소들을 경시하지 않지만, 이보다 더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분별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기독교는 분별의 종교이고, 신앙은 분별력입니다. 그러나 분별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이 세대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분별을 권면하며, 이 세대가 악함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이 분별의 전제인데, 사람들 대부분은 이 세대의 흐름에 순응하며 사는 것을 지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분별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분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고, 모든 보이는 것을 만드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번영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심판을 분별하며 회개를 촉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심판과 고통과 절망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에는 하나님의 구원과 희망을 선포할 수 있었던 분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며, 때를 분별하고 회개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 백성들은 늘 분별에 실패하였고, 그로인해 예수님도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총선을 앞두고 분별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민주주의 체제는 원칙적으로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모든 제도는 사람에 따라 선한 것이 되기도 하고 악한 것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과거 부당한 권력자들이 절차상으로는 정당해 보이는 방식으로 권력을 위임받고, 또 자신들은 국민과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강조해 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총선 때마다 출마자들은 온갖 듣기 좋은 말로 표를 구걸하지만, 일단 선출이 되면 주어진 특권을 욕심을 채우기 위한 발판으로 사용하는 데 급급합니다. 언제나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형식과 절차만 민주주의일 뿐 실제로는 부당한 권력을 행사해 온 사람들에 저항하며 우리 국민은 직접 정치 행동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멀게는 4.19를 비롯해, 가깝게는 지난 촛불혁명이 그러한 자랑스러운 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는 특수한 경우이고, 또 그러해야 마땅합니다. 매사가 시민들의 시위로 해결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는 올바른 지도자와 신뢰할 수 있는 대표자를 통해 질서 있게 유지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고, 때문에 선거를 통해 올바른 지도자들을 선출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중요한 사회적 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요구되는 것은 분별입니다. 먼저 우리는 바른 지도자를 분별하며 책임적인 정치 행위를 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현대문화는 우리를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게 만듭니다. 혹은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갖는 고유한 정치적 책임을, 대중을 장악하고 움직이는 맹목적적이고 악하기까지 한 세력에 맡겨 버리게 만듭니다. 이렇게 공공성에 있어서 인간의 가치를 빼앗아 가는 악마적 지배력은 단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사회를 불의가 마음대로 활개 치는 무대로 만드는 것이고, 그 피해는 우리 모두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설교릍 통해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하는지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일 자체가 정치적인 입장을 배제할 수 없는 정치적인 일로 해석될 수 있고, 더구나 교회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이미 선택한 정치적 진영을 바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갖는 사회적 책임과 분별의 중요성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최소한 성경에 비추어 기본적인 분별의 원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 사회의 지도자는 보편적인 가치를 앞세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일부 계층만을 편드는 사람은 나머지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지역에 따라, 상황에 따라 특정 계급을 대변하는 일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가 무너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 인권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최소한 음식과 주거와 의료와 교육 등과 같은 기본 생존권에 있어서 국민 누구라도 소외되지 않고 존중받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 불평등이 존재하고, 소외된 계층이 늘어날 때, 우리 사회는 갈등과 다툼과 불안을 벗어날 수 없고, 이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 주변의 이웃이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든 나 혼자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산다면, 하나님이 그러한 우리와 우리 사회에 복을 주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표를 얻기 위해 사회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이라면, 당장 우리에게 이롭게 보여도, 우리 사회와 미래를 위해 올바른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특권층은 소수이고 소외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는 데도, 다수가 소수 특권층만 대변하는 사람들을 지도자로 뽑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현실 가운데서 중요한 것은 역사의식입니다. 역사의식이란 거창한 말이 아닙니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고, 구체적으로는 과거를 기억해 오늘로 살려내는 일입니다. 권력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책략이 적과 동지라는 대립 구조를 만드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정치권력은 없는 적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술책을 사용합니다. 지난 시대 독재 정권은 반공이라는 이념으로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적대적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분단의 현실과 한국전쟁 경험이 그러한 이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었고, 공산권이 무너진 이후에도 반공이념을 경제 성장으로 이식시켜 부당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마귀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이 권력의 속성과 결합시켜, 부당한 권력을 지원하고, 그 부당한 권력 밑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했던 무고한 사람들의 신음을 묵인하여 왔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이분법적인 프레임에 갇혀 있는 교회는 마귀와 싸우는 각오로 구국을 외치고 있지만, 이는 분명히 반역사적, 반사회적인 일인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들 가운데서 우리는 무지에 기인한 순수함보다는 비정상적으로 자기 이익을 꾀하며 자기 고집을 굽히지 않는 악한 사람들의 집착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역사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고, 이런 진영에 속한 사람들을 지도자로 내세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동안 반공이나 경제 성장 혹은 사회 통합 등의 명목으로 정당화되었거나 철저히 숨겨져 왔던 일들이 근거 없는 조작임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대량 학살과 같이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저질러진 비극적인 일들도 지속적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그러한 과거를 바로 잡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체감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속임을 당하고, 이용당해 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의 이익에 집착하는 인간 이기심의 집요함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속히 바로 잡아야 하는 잘못임을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나의 부모나 자식이 그러한 무고한 속죄양이 되고, 그 후에도 가족 대대로 국가의 적으로 분류되어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런 일에 침묵하는 이웃들을 어떤 눈으로 보겠습니까? 돈이 전부가 된 세상에서 이런 일들이 묵인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역사를 축복하실 리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판단의 기준은 도덕성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 지역의 부동산 가치를 올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중시합니다. 그러한 영향력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도덕성이 뒷받침이 되지 않는 힘은 언제든 악용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선거 때마다 남발되는 수많은 약속은 대부분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돈을 우선으로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돈만 말하는 사람은 돈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경제 문제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도덕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돈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토대를 무너뜨리는 무서운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만 악의 뿌리라고 말씀합니다. 정치는 여기에서 예외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 국민은 불과 수년 전 촛불혁명을 통해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우리 사회는 기대와는 달리 많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특별히 스스로를 시정잡배들만 못하다고 평할 정도의 저급한 국회 모습에 우리는 실망을 넘어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아직도 우리의 시민의식이 성숙하지 못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다가오는 총선을 통해 우리는 보다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한 나라의 정치적 수준은 선출되는 지도자의 수준을 보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덧붙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차원 더 깊은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정의롭고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일은 단지 시민의식의 성숙도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시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 가운데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선택받은 우리의 믿음과 분별을 통해 현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임은 지도자들, 성직자들,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구글+
기사입력: 2020/04/04 [10:51]  최종편집: ⓒ newspower
 
관련기사목록
[교회협] 교회협 "인천국제공항공사의 정규직화 환영" 김현성 2020/07/01/
[교회협] 교회협, WCC 등 6.25 70주년 에큐메니칼 평화메시지 발표 김현성 2020/06/30/
[교회협] '한반도 종전 평화 캠페인 준비위원회' 발족 김현성 2020/06/25/
[교회협] “휴전에서 평화로, 이제 우리가 전쟁을 끝내자” 김현성 2020/06/23/
[교회협] 교회협 "남북, 모든 강경대응 자제해야" 김현성 2020/06/19/
[교회협] 교회협, ‘한국기독교회 평화호소문’ 발표 김철영 2020/06/17/
[교회협] 교회협, ‘2020 민족화해주간’ 동참 호소 김현성 2020/06/14/
[교회협] 교회협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폐쇄 우려” 김철영 2020/06/08/
[교회협] [교회협, 5월의 주목하는 시선 2020] '고백과 증언,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자' 선정 한홍구 2020/06/05/
[교회협] [NCCK 사건과 신학] n번 방의 괴물들 이난희 2020/06/05/
[교회협] [NCCK 사건과 신학] ‘성착취’의 흥행 권경란 2020/06/05/
[교회협] [NCCK 사건과 신학] 우리 모두가 텔레그램 성착취의 “공범”입니다 강은정 2020/06/05/
[교회협] [NCCK 사건과 신학] 그가 고통당할 때, 우리는 어디 있었는가 채수지 2020/06/05/
[교회협] [NCCK 사건과 신학]피해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기 정혜선 2020/06/05/
[교회협] [NCCK 사건과 신학]성(性), 몸의 언어에 대한 예의 송진순 2020/06/05/
[교회협] 교회협 “인종차별 종식 위해 노력할 것" 김철영 2020/06/02/
[교회협] 교회협, 녹색교회 9개교회 선정 김현성 2020/05/18/
[교회협] [증언]한국 친구들과 함께 한 나의 길 폴 슈나이스 2020/05/14/
[교회협] 정부, WCC 트베이트 전 총무 국민훈장 동백장 수여 김현성 2020/05/09/
[교회협] 한국과 미국 교회협 등 미 하원에 ‘대북 코로나19 관련 일괄 구호법안 입법’ 촉구 김철영 2020/05/07/
뉴스
인기기사 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개인정보취급방침회사소개후원 및 광고 만드는사람들기사제보기사검색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136-5) 본관 107호 TEL 02-391-4945~6| FAX 02-391-4947,
Copyright2003-2018뉴스파워. all right reserved. mail to newspower@newspower.co.kr 등록번호 서울 아 00122 등록일 2005.11.11 발행 및 편집인 김철영. 청소년보호책임자:김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