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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1.17 [19:02]
[김준곤 설교]겸허한 인간자세(마11:29)
다시 듣고 싶은 김준곤 목사 메시지
 
김준곤

 

▲ 1984년 6월 5일부터 11일까지 열린 '84세계기도대성회에서 김준곤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뉴스파워

마태복음 11:29

일찍이 성 어거스틴에게 기독교의 제1되는 덕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제2, 제3의 덕도 역시 겸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인류의 성자인 그가 자기의 덕행과 신앙에 대해서 간직했던 마음의 자세였을 것입니다.

성자가 만일 자기 스스로 성자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실만으로 이미 그는 성자가 되지 못한 증거일 것입니다. 기독교의 이 겸허의 덕이 니체가 가장 싫어했던 약자의 악덕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겸손은 강자에게 굽실거리거나 시골 처녀의 수줍음 같은 것이 아닙니다.

겸허의 어원적인 뜻은 이마를 땅에 대고 엎드린 자세이고, 교만은 두 개의 뿔을 들먹거리고 다니는 과시입니다. 교만이 악마의 죄요, 죄악의 어미였다면 겸허는 인간의 중심과 근원에서 바로 되는 인간의 기본자세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앞에 아들 된 자세, 남자 앞에 여자 됨의 자세, 창조주 앞에 피조물본연의 자세이며,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그대로의 인간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학문에 있어서 자기 무지를 알고, 건강에 있어서는 질병의 가능성을 알고, 소유에 있어서 파산의 위험성을 알아, 깨어 있고, 자기 약함에 눈 뜨고, 덕에 있어서 자기 교만을 아는 겸허, 실존에 있어서는 폐쇄적이기 보다 인간 한계를 알고 신에게 개방적이며 수용적인 경건 된 자세입니다.

이러한 덕은 학교에서 배우거나 명상이나 수양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탕자요, 회개하여 죄 사함 받은 죄인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된 새로운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설익은 사상이나 지식이 하나님을 부인하려 들고 덜 익은 정의가 사나운 심판자가 되어 북을 치고 나팔을 불지만 사량의 생산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가 자기 정의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불의의 괴수가 되어야 하며 그가 자기 양심의 투사이기 위해서는 무죄한 사람까지 위선자를 만들어 버려야 합니다.

그의 덕은 자신에게는 훈장이요 상표이지만, 누구에겐가 짐이 되고 피해와 부담을 줍니다. 설익은 신앙도 감싸주는 햇빛이기 보다는 혼란을 일으키는 바람이요, 찌르는 칼이요, 독선의 바리새가 됩니다.


인생무상을 아십시오.
 인간 중에서 가장 지혜 있었다는 전도자이며 왕이었던 솔로몬은 먼저 허무를 가르쳤습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인생의 지혜의 출발은 두 가지를 깨닫는 데 있습니다. ‘허무와 극복인 신(神)’이 둘 사이에 선 심각한 모습이 현대 실존주의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허무에 머물 수 있는 용자(勇子)는 없을 것입니다. 영광도 자랑도 초로인생임을 알아야합니다. 제국도 영웅들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세무십년(勢無十年)임을 알아야 합니다. 명성도 부도 신이 허락하는 한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했던 사람들의 처량하리만큼 비참했던 말로를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조심스럽고도 떨리는 마음으로 신께서 맡기신 것올 겸손히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학문의 겸손
 모든 학살은 상대적입니다. 수정과 변화를 거치지 않은 학문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은 백만 분의 일도 못되는 지식의 변두리에 불과합니다. 신을 부인한 것은 학문이 아닙니다. 덜 익은 인간인 것입니다. 현대 지성의 최대의 어리석음은, 삶의 양식으로 지식을 대용하는 것과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정의(正義) 대해서 겸손하십시오.
 현대의 심각한 사회악의 하나는 정의와 평등이 투쟁과 열광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매스컴을 서식(棲息)지대로 삼고 가면과 은폐 속에 마음대로 비대해 갔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임명한 예언자도 아닌데 약자와 희생의 수호자가 된다는 의식에서 왜곡과 악용이 늘고 심한 어조와 날카롭고 폭탄적인 말로 무책임하고 냉소적인 선동으로 증오와 멸시와 분열의 씨를 뿌리고, 자기의 그러한 주장과 정의에 흡족해 하고 안심하며 정착하고 있습니다.

불만과 불명의 선동은 언제나 민중의 갈채를 받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조심스럽고 위험한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2세들에게 옮겨졌을 때 평생을 불평객(不平客)으로 칼자루와 망치를 들고 살게 될 경우를 생각해 보고, 스스로 옹호하는 당과 세계와 역사 속에 있는 근원악과 그 형태를 어떻게 바꾸더라도 여전히 창궐하기만 할 페스트 같은 원죄와 악령의 현실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롬 2:11)고 한 말은 가장 의인이 되신 분이 말씀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두움을 탓하지 말고 한 자루의 작은 촛불이 되라.”고 한 펄벅 여사의 말이 기억납니다. 밤을 극복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무르익은 정의, 무르익은 사량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속죄 의식을 낳습니다.

“인간의 사랑이란 자기 구심적인 에로스가 있을 뿐이지, 조건과 이유 없이 타인에게로 향하는 아가페가 없습니다. 남학생이 불우한 환경 속에 사는 가난한 폐병 환자인 어떤 처녀를 구제하는 데에는 심미적 에로스의 열심이 유발되지만, 문둥병 들린 괴팍한 거지 노인을 사랑하기는 참으로 어렵고 싫은 것입니다.”라고 도스토예프스키는 고백하였습니다.


자기 사랑에 겸허하십시오.
 크리스천은 사랑의 의식 과잉에 걸려 있습니다. 일부러 감추는 것도 이상하지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하는 것이 사랑의 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량이나 봉사나 희생이, 크리스천의 전매특허처럼 되어 직업화되고 상업화되어서 매스컴의 선전을 타고 붐을 일으키며 사량의 영웅적 자기 헌신과 자기희생을 꿈꾸는 돈키호테적 콤플렉스 중상을 노정(露물)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 큰일을 노리고만 있지 가까운 주위 사람에게 호감을 못 사고, 일상생활처럼 사소한 일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기회에는 눈을 감고, 냉수 한 잔의 친절의 기회가 사랑의 기회이며, 소자(小子) 하나가 사랑의 대상임을 관념상으로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언제나 양적인 것입니다. 세상을 뒤집어엎을만한 큰 운동이 아닌 것은 감상적이라며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뉴스나 매스컴의 보도 거리가 될 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미담이든 주의(注意、)와 경계가 필요하건만, 그 중에는 인도주의를 열심히 주장하면서 인류라는 추상적인 대상은 사량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이웃 한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삼일만 같은 방에 있어도 싫어지고 미워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회생이나 은혜를 입히면 사랑의 수애자(受愛者)가 되고 정신적 대차(貸借) 관계를 만듭니다. 자기 생활에는 별지장을 받지 않을 정도로 자선 사업이나 박애 운동을 하고, 구제한 후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가장 순수하고 소중한 것을 빼앗는 수애자(授愛者)와 수애자(受愛者) 의식을 만들어서 만족감을, 무의식적 우월감을 누리는 것이 사랑에 따르는 위험성입니다.

또한 자기대로 만든 자기 칭의에 놀아난 사랑과 포용과 관용성의 개념으로 나만이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자기 정의에 만끽한 특수 이질적인 인간성에 한없이 넓은 문을 여는 자기 생각에 도취된 사랑의 태도에도 가장 매춘적인 색채가 짙은 것이 많습니다.

 
나만이 이 사람을 사량할 수 있다는 오만은 배반보다 더한 자학이 뒤따르고 있다는 것올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선한 것이 없고 사량하지 못하는 죄인, 속죄와 구원이 필요한 은총의 대상임을 고백합니다.

사랑을 이야기하면 나는 말문이 막히고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지개 품팔이 아버지가 살다 못해 4남매를 데리고 음독자살을 했다는 기사가 있는 날도 나는 중고등학교 다니는 자녀들과 웃고 맛있는 식탁을 즐겼습니다.

영하 20도 콘크리트 바닥에 누운 행려병자가 으레 죽어 가는 줄 알면서도 그 어느 거지 하나 내 집에 잠재운 일이 없는 자입니다. 부모 없는 그 수많은 고아들 중에 한 아이도 내 집에 데려다 키워 보지 못한 나는, 삼십 명의 고아들을 몸뚱이 하나로 키운 어머니인 일본 여인, 신자(信者)도 아닌 영송(永松) 여사 앞에 다른 기독교 사랑의 설교자와 함께 사죄를 구하고 싶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유일한 길은 내가 가난하게 되는 것이라 하여 스스로 가난해진 이교도 간디 앞에 우리는 모두 말문이 막힙니다.

결핵으로 척추가 썩고 있으면서 약은커녕 끼니도 굶는 소녀, 그 비슷한 이야기를 날마다 보고 들으면서 마비증이 되었는지 나는 평안히 살고 있고, 저 많은 십 칠 세 소녀들인 내 딸 같은 창녀들에게 나는 무엇을 했단 말입니까?

더구나 내게 약간의 선행이나 미담이 있으면 그것을 누가 알아주기를 원하고 있는 위선자임을 고백합니다. 선하면 교만해 지고 그 밖에는 회한만이 나의 것입니다. 회한과 교만, 이 두 가지는 도덕적 실존의 쌍생아(雙生兒)라고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뜻을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참 기독교는 여기서 출발점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서도 나는 겸허를 배우고 싶습니다.

억지로 사량하고, 미운 사람이 많고 싫은 사람이 싫어도 사랑한다는 것은, 위선적이고 심미적으로는 멋지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그 위선적임을 수락하면 형식적이지만 친절히 하고, 있는 것을 나누어 쓰고 억지로 웃어 주고 쓸데없는 이야기라도 끝까지 들어주며,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갔듯이 작은 사랑일망정 억지로 베푸는 것이 겸손의 표현인 것입니다.

작은 것은 결코 인색한 것이 아닙니다. 사소한 사랑이 얼마나 사람에게 힘이 되고 행복이 되는 줄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하면서 자기에게는 실망하고 좌절을 배웁니다. 생명을 바치고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나의 것이 아니고 은총으로 주신 주님의 사랑으로 했기 때문에 면류관은 주의 것이며 아무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참 평가는 저널리스트나 역사가나 전기가(傳記家)가 사건화해서 묘사할 재료 속에 있지 않고 영원자가 은밀하게 기록한 생명록에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공적(功績) 기사나 적선보다는 은총의 기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의 심판만이 바르고 당신의 사랑에만 나의 존재와 소망이 있나이다. 내가 아름다워져서 나를 사량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를 사량하심으로 아름다우며, 내가 의로운 데가 있어서 당신이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심으로 의롭다함을 입었사오니 당신의 결정과 선택이 곧 나의 가치요 평가입니다. 주여, 나도 나를 사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주께서 사랑하심으로 그 사량하는 소중한 나를 겸허하게 용납하고 사랑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게는 사랑이 없사오니 주의 것으로 사량하게 하소서. 또한 주의 온유와 겸허를 배우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게 하옵소서.”

 

*이 글은 김준곤 목사가 <CCC편지> 1965년 8월 25일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칼럼>으로 국내외의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유성 김준곤 목사의 진정한 영적 힘은 바로 그의 설교에 있다. 이미 엑스플로 '74, '80 세계복음화대성회 등을 주도하면서 민족 앞에 불을 토한 그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84년의 인생을 살면서 그의 삶의 유일한 소망은 민족복음화, 영혼 구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십자가 사랑을 설교한 사람이다. 어떻게 해서 진정한 주님과 만남을 통해 변화되고 확신 있는 크리스천이 되었는지 민족복음화의 환상이 잉태되었는지를 설교를 통해 알 수 있다. 그의 설교는 목회자와 평신도, 젊은 지성인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감동과 영감을 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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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23 [12:12]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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