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
교계뉴스문화/교육국제/NGO/언론파워인터뷰생활/건강오피니언연재정치/경제/사회한 줄 뉴스
전체기사보기
편집  2019.07.18 [11:02]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라
정준모 목사의 회복 치유 부흥 설교 전문
 
정준모

 

▲ 정준모 목사     ©뉴스파워

서론)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리고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이 남기신 가장 위대한 설교는?: 산상 수훈과 다락방 설교

 

예수님은 공생애 과정에서 수많은 천국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 중에 가장 위대한 교훈이 담긴 예수님의 설교 두 편을 지적하라고 한다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 공생애 초기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마태복음 5, 6, 7장에 기록된 산상설교이다.

 

또 한 편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마지막 사역인 십자가 죽으심을 앞두신 때였다. 그 때, 두렵고 떨고 마음에 근심에 가득찬 위로와 격려의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강화하신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의 그 유명한 다락방 설교이다.

 

이 설교는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계시면서 하신 설교 중 가장 치밀한 설교요 가장 중요한 설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문제와 삶의 두려운 문제를 잘 설명해 주셨고 특히 예수님이 가장 부르시기를 좋아하시는 보혜사되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대하여 잘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보통 이 다락방 강화를 구분할 때, 14장은 위로의 말씀”, 15장은 교훈의 말씀”, 16장은 확증의 말씀이라고 불리운다. 더욱이 이 다락방 설교 중 가장 핵심되는 말씀이 바로 보혜사되신 성령님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한 지상 사역을 계속 감당하실 성령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성경에 성자 예수님을 가리키는 이름과 상징하는 말이 800개 이상 나온다. 또한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과 상징 또한 100개 이상 나온다. 또한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이름과 칭호들이 100개 이상 나온다.

 

우리가 삼위 하나님에 대한 칭호를 잘 연구하다보면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되고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가를 알게 된다. 또한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하고 계시며 우리가 또한 그분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 지 우리가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가장 좋아하셨던 이름인 보혜사

 

이렇게 수많은 이름 중 예수님께서 가장 좋아하신 이름이 무엇일까?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께 대하여 가장 좋아하시는 이름은 바로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것이었다(17:1).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 자신에 대하여 가장 즐겨 부르신 이름은 바로 인자이다. 또한 예수님이 성령 하나님께 대하여 수많은 이름 중 가장 좋아하시는 이름은 바로 보혜사이다.

 

사실 그 당시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성도들도 성령님에 대하여 너무나 무지하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다. 성령 하나님은 삼위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분이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에 비하여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너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부족하다.

 

더욱이 성령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적지 않다. 특히 우리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그리스도 중심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성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주도하심과 성자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역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를 잘 하고 있는 반면, 성령 하나님의 성도 심령 속에 역사와 적용에 대하여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령에 대해 장님들이 현대 성도들

 

엘머 타운즈 목사님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대한 장님들이기에 성령을 볼 수 있는 영적 눈을 달라고 간구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성령을 사모하면도 성령님의 인격과 존재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열정적으로 구하을 볼성령에 대한 순종은 부족하다. 나를 위한 성령을 역사는 기대하나성령를 위한 나의 헌신은 무책임하다. 필요에 의하여 우리의 심부름꾼 모양 성령의 능력을 활용하려고 애쓰나 정작 성령의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 자신을 드리지 못하고 있다. 성령의 능력의 나타냄을 통하여 인간적 영광을 구하나 성령의 열매를 통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성령님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얼마나 성숙되고 풍성하고 능력있고 열매있는 삶을 사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특히 우주의 창조의 성령, 인간 심령을 새롭게 하시는 재창조의 성령, 부활과 권능의 성령, 성결과 성화의 성령, 진리와 말씀의 검이 되시는 성령, 보혜사되신 성령님을 잘 깨닫고 의지하고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깊이 꺠달야 할 것이다.

 

성령에 관한 진리의 귀중성은 아무리 강조하고 강조해도 문제가 될 수 없다. 보통 귀중한 진리일수록 신학적 편견과 신앙적 아집으로 왜곡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슬프게도 오늘날 교회와 교계의 안팎의 상황이 성령에 대한 곡해로 극단적 경향으로 치솟는 것을 볼 때 안타깝다. 바른 신학과 바른 신앙을 가진 교회는 거짓된 선입견과 편견을 제거함과 동시에 올바른 진리는 붙잡고 세워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인격과 신성을 가지신 보혜사 성령님

 

오늘날 성령의 인격에 잘못된 입장을 밝히고 바른 성경적 진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성령은 결코 어떤 물체나 목적물 그리고 힘이 아니다. 성령은 남성 인칭대명사 그분(He)를 사용해야지 결코 중성 대명사인 그것(It)를 사용할 수 없다. 예수님도 성령을 항상 그는또는 그를등의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셨다.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그가 와서...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리라고 말씀을 하셨다.

 

한 인격자로서 성령님은 지, , 의를 소유하고 계신다. 성령님은 지성적 속성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 지혜와 지식을 가지시고 그는 모든 것을 아시고 이해하시고 판단하신다. 성령님은 또한 의지적인 속성을 소유하신다. 그분은 결단하시고 선택하시고 명령하신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으로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에 묶인바 되어...”, “성령에 의하여 금지되었느니라이 모든 말씀은 바로 성령 하나님의 의지를 나타내는 말씀이다.

 

또한 성령님은 감정적 속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우리가 생명이 없는 물체에 감정을 끼칠 수 없고 오직 감정을 가진 인격체에게 감정을 전할 수 있다. 성경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훈계하셨다. 이것은 바로 성령님께서 인격체이심을 보여 준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나 인간의 인격과 다른 하나님의 인격이시다. 우리의 인격은 죄로 상처나고 허물어져 있고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인격체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온전하신 주님의 인격으로 우리가 성령님의 치유와 역사로 온전해질 수 있다. 성령님의 인격은 무한한 지성이며 온전한 감성이며 완전한 의지의 소유자이시다.

 

우리의 지성은 연약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항상 진리의 영되신 성령님께 우리의 지성을 의탁하면 그분은 우리를 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우리의 의지도 항상 변화무쌍한 연약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항상 연약하고 부족하고 어설 풀 때가 많다. 우리가 종종 해서는 안될 일을 결단하고 또한 반드시 해야 될 일들 결정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한 의지를 소유하신 성령님을 의지하면 그분은 우리의 약한 의지를 강하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감당해야할 일을 행하도록 의지력을 주신다.() 우리의 감정도 연약하여 잘 통제되지 못하고 변덕을 부릴 때가 허다하고 자주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감정까지도 온전하신 감정을 가지신 성령님께 맡기면 우리의 감정을 잘 제어해 주시고 올바른 감정의 표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의 지, , 의를 온전하게 갖추시고 무한하시고 완전하신 인격체이시지 절대로 어떤 사물이나 목적물 그리고 힘이 아니다. 특히 성령님은 우리를 다루시는 인격성과 아울러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어떤 힘이나 영향력이 아니다.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 이단

 

이러한 무한하시고 완전하신 지, , 의 인격체를 가지신 성령님은 또한 하나님으로서 신성을 가지고 계신다. 성령님이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교회 역사상 주후 4세기에 아리우스(Arius)는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부정하므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의 인격성과 신성을 부정할 경우 우리는 아리우스 이단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성령 하나님의 인격성과 신성을 가지신 삼위의 하나님으로 밝히고 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도 3대 고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 “성부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자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삼위의 인격과 위격을 가지신 분이시다.

 

성경에 성령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는 증거는 많은 예가 있다. 창조 사역에 있어사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창세기 서두에 밝히고 있다. 여기에 하나님은 히브리말로 엘로임이라 불리운다. 히브리어 명사 끝에 임(im)을 붙이면 복수가 된다.

 

이것은 바로 삼위되신 하나님을 밝히는 최초의 성경에 나오는 장엄복수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성령 하나님의 창조사역, 섭리역사, 성령의 잉태, 부활의 권능, 성도의 새 생명, 교회의 중거 사역 이 모든 사역을 주도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전지, 전능, 영원하신 모든 신적 속성들을 다 가지시고 역사 하신다.

 

1) 성령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고전 210-11절에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고 통달하시느니라

2) 성령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다. 시편 1397절에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성령은 동시에 모든 믿는 신자들의 마음 속에도 거하신다(14:17).

3) 성령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스가랴 46절에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4) 성부와 성자와 동등하시다. 마태복음 2819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동등한 하나님으로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그분들과 구별되는 존재로 밝히고 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제3위로 계시면서 그의 독특한 방식으로 사역을 감당하고 계신다. 또한 성경은 성령님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나오신다(Proceeds)는 말씀은 어떤 유출되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기 때문에 그분보다 열등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성부와 성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은 바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함께 한 하나님이시면 동시에 다른 독특한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한 위가 되신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가 되신 성령 하나님은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며 또한 무한하고 완전한 지, , 의를 가지신 분이시다. 이 성령 하나님께서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또 다른 보혜사가 되신다고 말씀 하시고 있다.

 

참 위로자가 되시는 보혜사 성령님

 

보혜사란 말은 헬라어(Paraclete)를 영어로 음역한 것이다. 이 말이 신약성경에 5번 나오는데 모두 사도 요한의 기록들에 나타난다(요한14:16,26; 15:26; 16:7; 요일2:1) 등이다.

 

보혜사에 대하여 나타난 성경 다섯 구절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함축된 진리를 알 수 있다. 1) 보혜사는 아버지께서 주셨다(14:16) 2) 보혜사는 아버지께로 나오신다(15:26) 3) 보혜사는 또한 아들이 보내신다(15:26; 16:7). 4) 보혜사는 그의 제자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14:16,17). 5) 보혜사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오셨다(15:26) 6) 보혜사는 세상을 책망하신다(16:8)

 

사도 요한은 그가 쓴 복음에서는 보혜사란 말을 두 가지 면에서 사용한다. 요한복음서에는 보혜사를 위로자(Comforter) 되신 성령님을 대신하는 말로 사용한다. 요한일서에는 보혜사를 대언자, 변호자(Advocacte) 되신 예수님을 대신하는 말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보혜사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또 다른 보혜사되신 성령님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다.

 

보혜사를 생각할 때 보혜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깨닫게 될 때 그 보혜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 다른 보혜사성령님을 보내주신 의미를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요한일서 21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죄 용서를 위하여 하나님께 중재하는 우리의 대언자와 변호자가 되셨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으로 말미암아 이 지상 사역을 마치시고 주님의 제자들을 고아처럼 두지 아니하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 위하여 또 다른 보혜사성령님을 보내 주셨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그 사역을 계속 감당하고 계시는 것이다(8:34).

 

이것을 볼 때 우리는 보혜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그 불변하신 약속을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 앞에 대속하시고 또한 그 사역을 근거로 우리의 죄를 변호하여 주신 변호자, 대언자 되신다. 또한 우리 예수님께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시면서 동시 보혜사 성령님을 이 땅위에 있는 성도들의 심령 속에 영원토록 거하신다. 우리 안에에 거하신 성령님은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시고 위로하여 주시고 평강을 주시는 보혜사 성자, 성령 하나님께 우리는 감히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성도에게는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혜사가 되신다는 것은 너무 감격스러운 진리이다. 결코 우리는 들판에 외로이 서 있는 갈대가 더 이상 아니다. 홀로 서 있는 갈대에 불어오는 바람은 갈대를 꺾고 마는 성난 바람이 아니라 고요함 속에 평안과 포근함을 주면서 갈대의 친구가 되신 봄바람은 바로 인간 갈대의 보혜사 성령님이 되시는 것이다.

 

보혜사되신 예수님과 성령님은 성도들을 인생의 들판에서 갈대처럼 고아처럼 외로이 두지 아니하시고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신다는 사실에 우리는 새삼 큰 용기와 큰 감격과 큰 삶의 의지를 가질 수 있다.

 

보혜사는 도움을 주는 자”, “위로해주는 자”, “대변자”, “옆에 서 있는자등으로 번역 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보혜사되신 우리 성령님은 1) 약할 때 붙잡아 주시는 자이시며 2) 곤란을 당할 때 상담자가 되시고” 3) 환란을 당할 때 위로자가 되시며” 4) 무지할 때 교사가 되어 주신다.

 

이 세상은 위로를 참된 위로를 필요로 하는 자들이 수없이 많다. 반면 그 인생의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있는 진정한 위로가 없는 세상이다. 필자는 성도를 만나고 병원으로 심방을 하면서 장례식을 집례를 하면서 상담전화를 받으면서 또한 이 세상이 되어지는 일 보면서 더욱이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우리에게 보혜사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보혜사되신 주님과 성령님을 떠나서는 항상 깊은 인생의 고독과 절망과 외로움에 빠져 있는 우리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그러므로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인생문제를 일시적 위로를 주고 떠나 가버리는 병문객과 조문객의 인간적 한계를 초월하시고 영원토록 내주하셔서 늘 가까이 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과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감미로운 대화를 늘 나누시길 바란다.

 

당시 제자들은 보혜사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요한복음 14장은 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시작하여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끝을 맺고 있다.

 

왜 제자들이 그처럼 마음에 근심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을까? 아마 예수님께서 그들 제자 중 하나가 배반자가 생길 것이라고 예고했기 때문일까? 물론 관계가 없지만 않다. 또한 베드로에게 그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경고했기 때문일까?

 

사실 예수님 제자들이나 특히 수제자인 베드로의 경우 자신들이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따른다고 장담했었는데 자신의 마음도 자신들이 예측못하는 주님을 배신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니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고 또한 자신들을 근심에 빠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에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요한복음 13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려 하신다는 사실이었다.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 것일까? 그분과 함께 갈 수는 없을까? 그분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떻게 갈 수 있을까? 그분이 가시는 곳을 함께 갈 수 없다면 그분은 다시 그리고 언제 오신다는 말인가? 그분이 안계시면 제자들은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하며 누구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가? 깊은 절망감에 빠지고 온 마음에는 근심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우리 주님은 아시고 이 유명한 다락방 설교를 시작하신 것이다.

 

영원도록 내주하시는 보혜사 성령님

 

이 때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줄 것이니 그가 제자들 안에 거하며 가까이 거하면서 위로와 격려와 도움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18절 말씀처럼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 보혜사 성령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실 것을 또한 약속하셨다.

 

또한 13, 14절에 제자들에게 기도의 특권을 허락하셔서 어떤 고통, 어떤 고난, 어떤 인생의 문제를 만나게 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며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또한 2절에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시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과 부족으로 인한 구원의 문제, 장차 우리가 거할 나라 문제를 두고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사실 제자들의 고민과 근심 문제가 바로 오늘 우리의 인생 여정 길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를 대표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닌가?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보혜사 성령님이 내 마음 속에 내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침을 받는다면 우리는 정말 참된 행복자이다. 수많은 인생이 외적 조건 속에서 참된 행복을 찾기 위해 붙잡고 붙잡으려고 발버둥치나 신기루처럼 달아나고 물거품처럼 살아지고 말기에 더욱 공허감에 빠지고 만다. 더 이상 인간의 고통과 고독과 외로움을 달랠 길 없어 이 방법, 저 방법을 찾으나 아편처럼 결국 더 이상 강한 약과 더 이상 강한 독주가 없을 때 스스로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 보혜사가 없는 세상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신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보혜사가 되시니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우리가 부족하다고 휙 떠나시고 우리가 연약하다고 외면하시고 우리가 어리석다고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더럽다고 침뱉지 않으시고 우리가 미련하다고 비웃지 않으신다.

 

우리가 가난하다고 손가락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병들었다고 무시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죄지었다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럴수록 더욱 더 가까이 오셔서 위로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시고 속삭이며 용기를 주시고 다시 한번 달려와 격려를 주시고, 그래요, 잠시 연약해서 실수한 것 같아요 하며 변호해 주시는 어머니 숨결 같고 할머니의 약손 같고 우리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시길 바란다.

 

인생의 언제 불쑥 나타날 줄 모르는 고난의 복병이 우리의 평온한 인생길에 불청객처럼 뛰쳐나와 우리를 괴롭힌다. 해고, 파산, 질병, 사고, 이별, 미움, 석별로 우리를 얼마나 괴롭히고 잠을 못 이루게 하고 마음을 썩게 하고 피를 마르게 하는 고통이 따르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우리와 너무나 같은 인생의 절망과 근심의 상황 속에 처한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이 주신 이 다락방 설교, 즉 보혜사 성령님이 함께 하시고 위로하시고 이끌어주고 속삭여 주시고 도와주신다고 달래주셨다. 그러기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우리 주님께서 오늘 21세기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오늘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보혜사가 되셔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믿고 감사드린다.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육을 가지신 참 인간이 셨다.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신 분이시기에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으셔야 하셨다. 그래서 당시 육신의 몸을 입고 계신 예수님의 사역은 제자들과 함께 거하셨던 유대 땅 고을에 한정 지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대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

 

성령님은 공간과 시간적 제한을 받는 육의 존재가 아니시고 영이시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그리고 수많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동시에 역사하시고 동행하시고 위로하시고 사역하시게 되니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사한지 모른다.

 

결론적으로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요한복음 167절에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그렇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대신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위로의 성령, 도움의 성령, 상담의 성령, 교사의 성령, 진리의 성령되신 것이다. 보혜사 성령님과 함께 은혜가 충만하길 기원한다. 더 이상 보혜사 성령님을 외면하지 말자. 더 이상 보혜사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지 말자. 이제 보혜사 성령님과 함께 아름다운 동행의 삶을 살자. 그런 은혜가 있는 성령의 봄이 되길 기도드린다.

 



정준모 목사 《선교학박사(D.Miss)와 철학박사(Ph. D)》현, 콜로라도 말씀제일교회(Bible First Church) 담임, 국제개혁신학대학교 박사원 교수, 국제 성경통독아카데미 및 뉴라이프 포커스 미션 대표, 콜로라도 타임즈 칼럼니스트, 뉴스파워 미주 총괄 본부장, 전 대구성명교회 22년 담임목회 및 4200평 비전센터 건축 입당, 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CTS 기독교 텔레비전 공동대표이사, GMS(세계선교이사회)총재,GSM(미국 선한목자선교회)전 국제부대표 및 현 고문, 전 교회갱신협의회 대구 경북 대표, 한국 만나(CELL)목회연구원 대표, 총신대학교 개방, 교육 재단이사, 백석대학교, 대신대학교 교수 역임, 대표 저서, ≪칼빈의 교리교육론》,《개혁신학과 WCC 에큐메니즘》, 《장로교 정체성》,《기독교 교육과 교사 영성》 《생명의 해가 길리라》,《21세기 제자는 삶으로 아멘을 말하라》 등 30여 졸저가 있습니다. 자비량 집회 안내:농어촌, 미자립, 선교지 “상처입은 영혼 -치유 회복 부흥집회”를 인도합니다(기사 제보 및 집회 문의 연락처 jmjc815@hanmail.net, 719.248.4647)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구글+
기사입력: 2019/04/29 [15:16]  최종편집: ⓒ newspower
 
관련기사목록
[정준모 목사] 나는 진정한 회개를 하고 있는가? 정준모 2019/07/17/
[정준모 목사] 회개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될까?(1) 정준모 2019/07/12/
[정준모 목사] 구속받은 성도들의 5가지 영적 특성들 정준모 2019/07/09/
[정준모 목사] 하나님의 징계와 회개 정준모 2019/06/29/
[정준모 목사] 거룩한 씨, 남은 자 정준모 2019/06/23/
[정준모 목사] 성령님의 보증을 받은 성도의 삶 정준모 2019/06/15/
[정준모 목사] [설교] 인생의 깊은 터널과 구비들 정준모 2019/05/18/
[정준모 목사] [설교]네 행위를 살펴보라 정준모 2019/05/11/
[정준모 목사] 보혜사 성령님: 기가 막힌 은혜와 사실 정준모 2019/05/10/
[정준모 목사] 칼빈의 제네바 성시화 운동(8) 정준모 2019/05/08/
[정준모 목사]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라 정준모 2019/04/29/
[정준모 목사] 개혁신학 기독론 5대 핵심교리 무장하라 정준모 2019/04/22/
[정준모 목사] 부활의 영광을 입은 성도의 삶(1) 정준모 2019/04/16/
[정준모 목사] 부활의 영광을 입은 성도의 삶(2) 정준모 2019/04/16/
[정준모 목사] 2019년 부활절 교리설교 정준모 2019/04/14/
[정준모 목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핵심 교리 정준모 2019/04/07/
[정준모 목사] 美 콜로라도 고난주간 특별 세미나 정준모 2019/04/03/
[정준모 목사] 인간의 실상과 하나님의 진단과 처방 정준모 2019/04/03/
[정준모 목사] 칼빈의 제네바 성시화 운동(7) 정준모 2019/04/01/
[정준모 목사] 행복한 삶의 5가지 원리(1) 정준모 2019/03/24/
뉴스
광고
인기기사 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개인정보취급방침회사소개후원 및 광고 만드는사람들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136-5) 본관 107호 TEL 02-391-4945~6| FAX 02-391-4947,
Copyright2003-2018뉴스파워. all right reserved. mail to newspower@newspower.co.kr 등록번호 서울 아 00122 등록일 2005.11.11 발행 및 편집인 김철영. 청소년보호책임자:김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