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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7.20 [16:02]
[김준곤 설교] 현대를 극복하는 신앙
다시 듣고 싶은 김준곤 목사 메시지
 
김준곤

요한복음 4:14; 11:25~26

▲ 김준곤 목사      ©뉴스파워

 

  최근에 우리는 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구미의 신학자들로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었습니다. 그들 자신의 신앙이 죽었다는 정직한 고백인지도 모릅니다. 소련은 공산주의에 쫓겨 신은 이제 예배당에도 있을 자리가 없어 구라파의 영성의 시간은 긴 밤에의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미국의 영성은 이제 청춘기를 지나 다시는 젊어 질 수 없는 오후 3시입니다. 이제 영적 기류는 아시아로 이동하고 바야흐로 아시아 시대를 맞이한 바, 인도의 영성은 잠이 덜 깨었고 중국인은 영원히 현실 생활인이며 일본인은 부지런한 장사꾼, 물건 만드는 경제 동물이나 한국인의 영성은 세계사의 한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 학생, 청년, 인텔리는 대부분 회의에 빠지고 창백하며 노인과 부녀층이 다수인 한국 교회는
세계 정신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연 이 신의 죽음의 물결을 극복하고 생수가 터져나듯 생생하게 부활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한국 기독교는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 떼처럼 민족 부활의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겠습니까? 한국 민족의 영성의 주역을 담당할 엘리트들은 이제 현대라는 엑소더스(출애굽)의 시련 가운데 선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 신앙은 신념만도 못합니다. 이 무기력한 회색 지대에서 탈피하고 싶습니다. 반석을 쳐서 생수를 내고, 홍해를 쳐서 믿음으로 대로를 만들고 구름기둥, 불기둥의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하여 다음 몇 가지를 재강조하고 싶습니다.

1. 절대적 신앙
 현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고 중성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그 구조상 전체냐 공무냐의 절대적 천위를 주장 합니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부모도, 처자도, 공민권도, 목숨도 바치는 순교적인 것 이하의 신앙을 가진 이가 없었습니다. 모두 십자가를 지었고 사도행전은 그런 신앙의 기록들이었습니다.

현대 기독교인 가운데는 그리스도가 아무리 원해도 목숨은커녕 전 재산을 바치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와 가까운 나라의 일산 종교 창가학회는 700여 년 전에 생존했던 일연이란 중을 유일의 구주로 믿는 신흥 종교입니다.

그를 믿으면 건강하고 성공하며 만사형통한다는 가장 원시적 이고 단순한 신앙인데도 1,700만의 일본인이 신봉하고 1965년에는 4일 간에 미화 2억 불을 모았습니다. 제 3문화를 지향하며, 그리스도도, 석가도, 마호메트도,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철저히 배타하는 절대 신앙을 가졌습니다. 경제도 정치도 그들이 지배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느 시대보다도, 인류는 방황하고 있고 인간 지성은 회의와 혼미와 무기력과 허무 속에 빠져 있어 아무리 엉터리 신조라도 깃발을 내걸고 북을 치고 나팔 불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꾸만 신흥 종교가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그 구조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누군가를, 혹은 그 무엇인가를 절대 신앙하게 마련인데, 참 절대 신앙에 회칠을 해서 회의만 심어 놓고, 대안이 없을 때 그들은 흔히 공산주의자에게 길을 열기도 합니다.

런던 노동신문은 공산주의를 “오늘을 사는 새 신앙”이라 했습니다. 더글라스 하디는 그가 그리스도 신앙으로 전향하면서 공산주의자였던 때를 회고하며 “공산주의는 내 생명, 나의 전부였다. 나는 그것을 위해 아침에 눈을 뜨고, 그것을 꿈꾸며 자리에 들었다. 또한 공산주의는 내 아내의 생명이기도 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기독교 실업인들 가운데 공산주의자처럼 철저히 헌신할 10명의 부자만 결심 한다면 이 기독교 전도의 황금 기회에 한국 복음화의 기초 작업을 위한 재정이 되고도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믿을 바엔 철저하고 결사적인 절대 신앙을 가집시다. 그 이하일 때 신앙은 낮은 신앙이 아니라 무(無)가 되는 것입니다.

2. 성령 신앙
  기독교의 생사는 성령에 달려 있습니다. 기독교와 비기독교의 유일의 차이점이 있다면 성령의 유무를 들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문화적 고등 종교로써 윤리적, 심리적, 사회적, 정신적, 인격적, 모든 차원 모든 가능성을 한껏 연장시킨다 하여도 그것은 인간이지 성령은 못됩니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기 힘으로만 사는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살고 성실히 살아도 보행자에 불과하다면 성령의 은총으로 사는 사람은 비행기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세계적으로 카리스마적인 성령의 역사가 바람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엘 선지가(행 2:17∼21) 예언한 것입니다. 불신자마다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를 들어야 하고 신자마다 성령에 대한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령에 대한 영치(靈痴)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한 생명의 강은 90% 가 예수님 당시처럼 소박하고 단순하고 성실한 서민층, 비인테리층에 흐르고 있습니다.

3. 성경적 신앙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최대의 문제 하나는 의사소통의 문제입니다. 언어 전달이 안 되면 무(無)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으로 말씀하시고 역사로 말씀하시고 인간 속에서 말씀하시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수신 기능이 흐리고 어둡고 혼돈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아들이신 예수를 보냈습니다.

성경은 그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경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와 통합니다. 그것은 시대와 함께 낡아지지 않습니다. 생명의 책, 영생의 책입니다(요 20:31). 그곳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파도 파도 무진장의 보고요, 바닥나는 일은 없습니다. 날이 갈수록 더 팔립니다. 작년 미국 성경 판매 부수는 1억 44만 권이었다 합니다.

성경의 해석은 다소 달리 할 수 있으나 성경의 권위나 그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불신케 만들고 그 순도를 희박케 하며 나아가서는 성도의 신앙에 회의를 던져 성령의 역사를 막고 생명과 능력의 책을 북은 책으로 만드는 사이비 해석은 악이며 악령의 역사입니다.

성경 밖에서 신앙을 키우는 길은 자고로 없었습니다. 이 책에서 멀어지면 예수에게서 멀어지고 죄에 가까워집니다.

성경은 소박하고 단순하며 가장 진실한 사람들을 시켜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들에게 수식도 우회도 없고 까다로운 사상성도 의도함이 없이 쓴 하나님의 영감의 책이어서 물을 마시고 밥을 먹듯이 신앙으로 수락하는 책입니다.

신앙의 성경화를 위한 작업 중에는 이질적인 비성경적 요소를 제거함이 아무리 강조되어도 부족한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음식 아닌 독소를 먹고 병들어 있음을 생각하면 가슴 아픕니다.

4. 체험적 신앙
  옛날 성도들의 신앙담이 아니라 내가 믿는 그리스도, 나의 산 간증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그것은 옛날 생수가 넘쳤던 마른 샘터가 아니라 지금 쿨쿨 솟는 샘물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난 그 순간, 예수 체험은 그 무엇에 비할 바가 없습니다. 내 영혼이 사랑으로 약탈당한 이야기, 죽을병에서 고침 받고 사형수가 놓이고,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열리고, 벙어리의 언어가 터지듯, 벌레가 나비가 되듯, 애기가 배 속에서 처음 태어나듯, 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하늘과 땅을 향해 황소처럼 외치고 싶은 어찌 할 수 없는 감격과 사랑에 목이 메던 간증은 어느 크리스천에게나 있기 마련입니다.

사도행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감각적 신앙이 창백한 것을 시인하면서도 나는 신앙이 창백한 것은 싫습니다. 어느 시인의 영감보다 인간 체험의 어떤 감격보다 벅차고 훨훨 타고 샘솟는 그런 생효적(生效的)인 것이 신앙의 생리입니다. 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나와 독생자 예수와 바꾼 셈 입니다. 언어가 사실을 전달함에 있어서 그 농도와 순도가 성경에서보다 근원적인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하나님에게 배웠습니다. 가장 미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마다 너무도 사랑하여 대신 죽어 줄 누군가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대신 죽는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내게 이 사랑의 의미를 깊이 느껴 볼 수 있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네 살짜리 귀여운 막내딸이 아내가 세탁하기 위해 함지에 피다 놓은 끓는 물에 퍽석 주저앉아 온 몸의 3분의 1이 익어 버렸습니다. 전화 받고 병원에 갔더니 목불인견입니다. 피부는 복승아 껍질처럼 벗겨지고, 두 눈이 뒤집혀 불 속에 타는 사람처럼 펄펄뛰고 소리를 지르다간 헛소리를 하며 까무라치는 것이 아닙니까? 의사는 25%밖에 살 가능성이 없다고 합니다.

나는 그때, 만일 고칠 수만 있다면 내가 내 두 눈을 다 뽑아 줄 수도 있고 심장도 간장도 다 줄 수 있고 세 번 고쳐 죽을 수도 있고 무슨 짓도 할 수 있는 심정이었습니다.

내가 빠진 죄와 죽음의 심도가 어떤 것인지 다 헤아릴 수는 없어도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았을 때 그만큼 처절하게 나를 구하러 오신 것 입니다. 그런 사랑의 대상이라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신앙은 그 이하일 수 없습니다. 그런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시고(마 28:20) 아무 것도 나를 그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는데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최초의 최고의 신앙 체험은 ‘주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애인을 평생 추모하며 추모의 애정으로 사는 사람도 있는데… 밤중에 일어나면 ‘주여, 어찌 나를 깨우십니까?’하며 병원도 못 갈 가난한 병든 형제를 위해 주의 손으로 직접 고쳐달라고 기도해서 기도로 병 고친 체험, 미운 사람을 사랑하게 된 체험, 날마다 맞이하는 하루를 신부가 신랑을 맞는 사랑의 향연으로 새롭고 벅찬 감격으로 맞을 수 있어야 합니다.

5. 민족적 비전
  성경의 인물들은 꿈꾸는 사람들, 비전으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현대의 사고방식과 사업 계획의 방법은 철저히 수학적이고 과학적, 논리적, 합리적이며, 컴퓨터적 정밀도를 기합니다. 그것은 자랑스럽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700만 개의 부속품의 전차 계산기식적 정확도(아폴로 13호)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을 자승한 컴퓨터적 데이터를 다 계산한 계획 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노우(NO)를 계산에 넣지 않으면 그것의 의미는 무(無)입니다.

그런 고로 하늘에 계신 자가 비웃으심이여 (시 2: 4), 하나님의 뜻은 100명의 학자가 2년간을 컴퓨터적 통계 데이터에 모아 만든 계획서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계획을 무(無)로 한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은 비전을 보고 꿈을 꾸는데 그는 하나님의 안목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입니다. 크리스천은 시인이고 환상 속에 삽니다. 그것은 현실 도피라든가 공상이나 망상과 다릅니다. 그들은 영원을 강 건너 누나 집만큼 다정하고 가깝게 느끼고, 광속으로 일초밖에 안 걸리는 달에 가는 비전보다 몇 십억 광년 먼 수백 억 은하들을 아버지 집 정원처럼 시녀처럼 감상하며 소유하는 비전이며, 1천 년을 사는 꿈이 아니라 영원히 살며, 죽음이 폐하고 모든 인류가 형제가 되는 꿈을 꿉니다. 그들은 우주 드라마의 주역을 맡습니다.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합니다. 비전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크리스천 청년은 민족을 사랑합니다. 그들은 민족의 파수요, 주인이요, 책임자입니다. 민족을 저버린 자는 성경적 비전을 모르는 자입니다.

요새 청년들은 무기력하고 무관심하며 왜소하고 중성화되어 지나치게 공리적이고, 울릴 수 없으며, 이상도, 꿈도, 비전도 없는 세대입니다. 특히 여학생은 더하고 부유층 자녀들은 인간 불감증입니다.

우리의 비전은 ‘한국을 그리스도에게’ 송두리째 바치는 것입니다. 사상 전례 없이 새 문화, 새 민족, 새 인종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민족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치도, 경제도 철저히 그리스도화 시키고, 성화시키는 것입니다.

공산당은 아무리 미천한 당원도 자기 생전에 세계화의 야망을 품고 참여한다구 합니다. 그들이 죽은 것을 가지고 그런 열정을 가진다면 우리의 기회, 우리가 믿는 주님은 몇 백배 살아 있는 비전이어야 하겠습니다.


*이 글은 김준곤 목사가 <CCC편지> 1970년 5월호에 기고한 것입니다.

 

*<예수칼럼>으로 국내외의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유성 김준곤 목사의 진정한 영적 힘은 바로 그의 설교에 있다. 이미 엑스플로 '74, '80 세계복음화대성회 등을 주도하면서 민족 앞에 불을 토한 그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84년의 인생을 살면서 그의 삶의 유일한 소망은 민족복음화, 영혼 구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십자가 사랑을 설교한 사람이다. 어떻게 해서 진정한 주님과 만남을 통해 변화되고 확신 있는 크리스천이 되었는지 민족복음화의 환상이 잉태되었는지를 설교를 통해 알 수 있다. 그의 설교는 목회자와 평신도, 젊은 지성인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감동과 영감을 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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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3/24 [07:35]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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