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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2.10 [22:01]
한국 교회, 수쿠크 알고나 반대하라.
돈놀이 금지, 코란 전에 성경의 명령이었다
 
구교형
지금 이슬람채권(수쿠크)를 도입하기 위한 법안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도 무분별한 외국자본의 도입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당장의 필요 때문에 특수 자본에 혜택을 주자는 것이라면 더더욱 신중할 일이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기독교계가 일어나 이슬람채권 반대 운운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온당치 않다.

사실 이슬람채권은 국제적으로는 이미 유명한 것이다. 나도 이미 몇 해 전 그 존재를 알고 큰 도전을 받았다. 한 마디로 이슬람채권은 모든 것이 달라진 현대 산업사회에서도 무슬림 자신들이 믿는 코란의 돈놀이 금지 원칙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면 코란은 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돈놀이를 금지하였는가? 땀 흘려 일해서 돈 버는 것보다, 이자나 받고 가만히 앉아서 부자 되려는 부당행위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 심각한 위기에 빠진 금융자본주의의 폐단을 미리 경고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므로 이자를 금지한 이슬람규정의 핵심은 경제정의와 약자보호사상이다.

1. 돈놀이 금지는 수쿠크 이전에 성경이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은 코란에 기록되기 훨씬 전 이미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출애굽기 22:25)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주지 말라.”(레 25:35~37)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신 23:19)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그 믿음의 증거로 다른 세계와 구별되는 특징을 이웃에 대한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규정하였고, 그 가운데 돈놀이와 이자금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타락할 때마다 이러한 희년규칙들(레 25장)은 쉽게 무시돼 빈부격차가 가중되었다. 그럴 때마다 선지자들은 그러한 탐욕을 통렬히 비판하며 다시 이자금지를 역설한다.

“그들의 울부짖음과 탄식을 듣고 보니, 나 또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귀족들과 관리들에게, 어찌하여 같은 겨레끼리 돈놀이를 하느냐고 호되게 나무랐다.…이방인 원수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거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합니다.…제발, 이제부터는 백성에게서 이자 받는 것을 그만둡시다.…꾸어 주고서 받는 비싼 이자도, 당장 돌려주시오."(느 5:6, 7, 9, 10, 11)

그래서 근대 이후 자본주의가 본격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기독교사회에서 대부이자를 취하는 것은 매우 점잖지 못한 행동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돈놀이를 주업으로 했던 유대인들은 더더욱 유럽에서 미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대로 된 그리스도이라면 코란보다 더 훨씬 더 오래전 돈놀이 금지를 통해 약자를 보호하려 했던 성경의 정신을 구현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는 관심이 없다. 수쿠르를 통해 이슬람법의 불편함은 보면서도 성경의 계명은 여전히 인식하지 못하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2. 아무리 옳은 말도 이단이 말하면 나쁜 말이 되는가?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를 교리적으로 올바로 고백하지 않는 것을 이단이라 하는 것과, 이단이 행한 정당한 행동을 인정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우리 한국 기독교는 세상 속에서 올바로 관계 맺고 살아가는 방식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타종교나 이단, 사이비가 말했다고 해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같은 기독교인이 말했어도 그른 것은 그른 것이다. 통일교가 가정평화를 외치면 ‘가정평화’ 자체도 버려야 하는가? 아이가 우물에 빠졌다. 그걸 보고 있는 기독교인이 스스로 뛰어들어 구할 용기가 없다면, 적어도 자기대신 아이를 구하려는 무슬림을 방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사실 나는 이슬람채권 자체를 꼭 긍정하지만은 않는다. 과도하게 벌어들인 오일머니를 더 불리고 싶은데, 돈놀이를 금지하는 이슬람율법을 피하기 위해 억지로 만든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돈놀이로 피해당하는 가난한 자를 보호하려는 이슬람법정신을 정말 구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적어도 그 부담스러운 하나님 명령을 의식하며 어떻게든 제도 속에 반영하려 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가난한 자를 보호하고 강자의 탐욕을 억제하려는 더 오랜 전통을 이제 와서는 조금도 기억하지 않으면서도, 동일한 명령을 기억하려는 이웃종교인들을 한사코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들려주신 예수님의 교훈을 다시 기억하자(눅 10:30~37).

여리고 길가에서 강도를 만나 죽도록 매 맞고 버려진 사람을 구한 이는 정통교리로 무장한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니었다. 정통 유대인들에게는 혼혈잡족이요, 이단사이비와 다름없는 사마리아인이었다. 그리고 강도 만난 자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그럴듯한 정통교리가 아니라, 이웃이 되어 자비를 베푸는 것임(36, 37절)을 말씀하셨다.

도대체 한국기독교가 엄청난 고율이자인 줄 알면서도 눈물을 머금고 사채 빚을 져야하는 이 땅의 서민들을 위해 무슨 대책을 세운 적이 있다고 감히 이슬람채권을 가로막나? 우리는 강도만난 이웃에게 실제 도움은 안 주면서 살 길도 가로막는 죄를 범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복음을 얄팍한 종교적 기득권이나 지키려는 밥그릇싸움으로 바꾸려는 불경을 범하면 안 된다. 

3. 국가주의와 물리력에 기대어 힘으로 이단을 막으려는 발상도 이단이다.

숫자의 힘을 무기로 트집이나 잡는 성숙하지 못한 태도는 복음의 품격을 떨어뜨릴 뿐이며 선교에 악영향을 끼친다. 나는 아직도 기독교계가 왜 이 문제에 나서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오직 단 하나의 이유는 세계에서 점점 그 영향력을 넓혀가는 이슬람의 확산을 억지로라도 막겠다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기독교는 이런 한심함을 보인 적이 많다. 정의가 무너져갈 때는 정교분리를 외치며 입도 뻥끗하지 않다가도 종교적 기득권과 관련된 사안에는 목숨 걸고 나서는 일 말이다.

분명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평화 명령을 신념으로 로마의 징집과 군복무에 목숨을 걸고 저항했고, 그것은 교회사에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는 그런 교회사의 증언을 일부러 망각하고 오직 ‘여호와의 증인’ 확산을 막겠다는 일념만으로 ‘대체복무 허용하면 이단이 확산 된다’ ‘군대가 무너진다’며 탄압에 앞장섰다. ‘복음 확산’을 기치로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축구팀 ‘할렐루야’를 탄생시켰던 한국기독교는 통일교 재단이 운영하는 성남 일화를 없애기 위해 온갖 유치한 공작을 서슴지 않는다. 우리가 하면 스포츠선교이고, 통일교가 하면 이단침투전략이다.

2000년대 들어 미국패권주의에 대한 반발과 더불어 이슬람 동정론이 확산되자, 우리 기독교의 유치한 생트집은 이처럼 ‘이슬람에 대한 공포론’으로 나타났다. 교리만 이단이라고 이단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고 힘과 권력에 기대 이단적으로 사는 것도 이단이다. 국가주의와 숫자의 힘에 기대서라도 이단을 탄압하라고 우리 주님은 가르치신 적이 없다(마 26:51~52).

나는 이명박 정부를 매우 싫어한다. 그러나 종교기득권 추구에 해가 된다면 이명박 정부 퇴진도 불사하겠다는 지금 같은 저열한 ‘반정부투쟁’은 조금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파문으로 일어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대움직임을 은근히 즐기며 눈치나 보는 민주당의 모습도 비겁하긴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조용기 목사를 꾸짖은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의 고언이 참으로 정치인답다. 이슬람을 반대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자세는 결코 기독교선교에 도움이 안 된다. 우리는 사회의 숫한 갈등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면 없는 갈등마저 조장하지는 말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지금 기독교계의 반대운동은 하나님의 마음과는 다르게 서민들의 아픔에 대한 관심이 전혀 아니다. 

4. ‘수쿠크 법안’, 그 이상의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복음이 무엇이며 정치가 무엇인지, 둘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지극히 초보적 이해조차 없는 사람들이 기독교지도자란 간판을 달고 쏟아내는 말 폭탄들은 공해다. 수쿠르 법안에 대해 조용기 목사는 현 정부 퇴진운동까지 언급했다. 목사가 국가의 논리를 뛰어넘는 가치를 앞세우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가치가 기껏 종교이기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한심한 일이다.

만약 한국기독교가 같은 피조물로 도무지 있을 수 없는 가축생매장을 보면서 이런 발전방식은 거부하겠노라고 나섰다면, 또 파헤쳐지는 4대강을 바라보며 제발 좀 멈추라고 결연히 일어났다면, 북한정권이 아무리 미워도 인도적 지원만큼은 절대 멈출 수 없다며 나선다면, 분명 시대의 양심으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밥그릇싸움이 일어날 때만 비장하고 결연하다. 조용기 목사는 정권퇴진 전에 교회를 서로 먹겠다고 나선 자기 집안가솔부터 퇴진시켜 더 이상의 분란을 없애야 한다. 한기총 길자연 목사는 수쿠르법 반대 전에 금품제공과 부정선거 혐의를 벗지 못하는 자기 행보부터 투명하게 밝히고 불의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누가 이단인가? 하나님의 엄위하신 명령인 레 25장의 희년사상은 시체처럼 땅속에 파묻어 놓고, 개인의 소유권과 재산권만이 마치 하나님의 유일한 사회명령인 것처럼 속이는 소위 한국교회 원로라는 자들이 아닌가? 어쩌면 이들은 이슬람 확산을 저지하겠다는 명분 속에 돈놀이를 금지하는 하나님의 지엄하신 명령이 혹시나 부활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없는가? 

수쿠크 법안은 냉철히 재검토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슬람확산에 대한 공포심이나 기독교의 기득권적 저항에 몰려 처리되어서는 안 된다. 철저히 서민경제의 필요성 여부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에게 이것은 생명을 존중하고 가난한 자를 우선하라는 수많은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시대에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다시한번 성찰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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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3/01 [11:29]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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