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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2.15 [03:01]
나사렛 예수의 산상설교 (I)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상임대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김영한

(역사적 예수 연구 시리즈)

나사렛 예수의 산상설교 (I)

▲ 김영한 목사(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대표)     ©뉴스파워

머리말

 

나사렛 예수가 행하신 설교들 가운데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내용이 바로 마태와 누가가 그들의 복음서에 기록한 산상설교이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가 전파한 복음의 핵심이요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 헌장이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그의 메시아적 사역 가운데서 다가오는 하나님 통치를 기대하는 신자들의 삶의 원리를 설명해주고 있다.

 

I.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원리

 

산이나 평지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장소이며 하나님의 계시의 장소다. 예수는 가버나움 호수변의 산(팔복산)에서 무리를 앉도록 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5:1-2) 8()(The Beatitues)에 관한 유명한 산상설교를 하신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 5-7장에서, 누가는 620-49절에서 예수의 산상설교를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예수의 여덟가지 복()((The Beatitues))선언을 마음이 청빈하고 경건한 자가 받는 복으로 특징짓고 있는데(5:2-12) 반해서, 누가는 사회적인 곤궁 속의 민중들의 적나라한 궁핍을 더욱 반영하며 그러한 궁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6:20-26).

 

산상설교의 선포는 선포하시는 자의 신비와 권위에서 드러난다. 예수 선포의 깊은 주제는 예수 자신의 신비다. 그것은 하나님 아들로서의 신비다. 하나님은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을 지키신다. 아들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이미 다가왔으며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실현하기 위하여 신자가 살아야할 윤리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이미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시민의 태도와 삶의 방식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예수는 신자들에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헌장을 반포하신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제 예수의 설교와 치유의 사역 속에서 실현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는 이제 신자의 삶 속에서도 수용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산상설교의 신자들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제자들 안에서 발아(發芽)된 모습으로 현재해 있다. 산상설교는 이 세상에 침입해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에 직면하여 신자들에게 요청되는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새로운 삶의 윤리를 가진 자들이다. 이 윤리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요 그 윤리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자들이다.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 자들은 그 삶과 사고방식이 새로워진다. 중생한 자의 삶이란 그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는 자이다.

 

산상설교는 이러한 영적 원리를 가르쳐주시기 때문에 사회개혁을 위한 원리를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 개혁의 원리는 오히려 영적인 가난함과 자기 비움에서 기인한다. 진정한 사회개혁이란 사회의 정의로운 개혁을 제도적으로 수행하는 자들의 정신의 개혁에서 비롯된다. 마음이 가난하고 청결한 자들의 공동체에서 비로소 진정한 사회개혁은 이루어진다. 공산주의자들의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이 역사상 72년간의 실험으로 좌초되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인간의 내면적 욕심을 제거시키지 않고 외면적으로 강압적으로 제도 개혁만을 시도한 데 있기 때문이다.

 

II. 팔 복(八福) 메시지 : 참 복의 선언

1. 팔 복 선언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8(八福, The Beatitudes)을 선언하고 있다. 예수는 이러한 팔복 선언을 듣는 사람들이 이에 상응하는 삶과 태도를 가지면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약속한다. 마태는 예수의 축복선언을 유대의 청빈자의 경건 정신의 관점에서 기록했으며 그 외에 네가지가 추가되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the poor in spirit)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5:3).

천국은 그 마음이 가난한 자들(the poor)의 것이다. 천국은 부자나 권세자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의 것이다. 부자나 권세자는 그 마음이 교만하고 욕심으로 가득 찰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이나 바리새인 니고데모, 백부장 고넬뇨처럼 부와 권력을 가졌으나 천국 복음을 향하여 그 마음이 열리고 그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소유를 남을 위한 위탁물로 여기고 봉사한다. 이들은 소유하고 있으나 소유하지 않은 자처럼 사는 자들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종말론적 삶의 태도를 지닌 자들이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1). 교회는 욕심으로 부유한 자들이나 권력 추구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욕심과 권력 추구를 배설물로 여기는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다. 하나님 나라는 겸손하고 겸허한 자들이 소유한다. 욕심을 떠난 자들에게 천국은 다가온다.

 

애통하는 자(the mourning)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5:4).

예수의 이 메시지는 구약 선지자 에스겔의 메시지를 연상시킨다: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9:4). 이마에 표를 받은 사람은 불의한 일로 인해 탄식하고 애통하는 자로 하나님의 처벌 심판을 모면한다. 진리 때문에 애통하는 자(the mourning)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 자신의 허물을 알고 뉘우치는 자에게 천국은 다가온다. 자신의 허물을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있다. 세례자 요한은 외쳤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3:2). 예수도 선포하셨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4:17). 회개하는 자는 애통하는 자이며, 자기 성찰을 통해서 자기의 허물을 뉘우치고 자기의 삶을 새롭게 하는 자이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오셔서 내주하시고 하나님의 평강이 그 마음을 다스리신다.

 

온유한 자(the meek)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5).

인자를 실천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게 된다. 천국은 그 마음이 인자한 자의 것이다. 여기서 온유한 자(praeis, the meek)는 단지 폭력을 쓰지 않는 사람을 너머선다. 이 단어는 마음이 겸손한 자와 연결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온유한 자(the meek)는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한 자로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를 지향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을 추진하는 자다. 모세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12:3). 예수도 자신은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11:29a). 평화의 왕이신 예수는 세상의 왕과는 달리 가난한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21:4-5; 12:15).

 

땅이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된 땅이다. 이스라엘은 40년동안 광야를 유랑할 때 최종 목적인 가나안 땅을 바라 보았다. 바벨론 유배 중에는 이스라엘은 고국 땅으로 귀향할 것을 소망하였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역사가 진행되는 도중에서 땅의 개념은 깊이와 넓이를 더해갔다. 땅이란 개인의 소유에서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간다. 온유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땅을 개간하여 씨를 뿌리고 수확하고 고락을 나누며 계속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다. 이 경작지에서 온유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폭력을 쓰는 사람들 보다 더 오래 살아 남는다. 그러나 예언자에 이르러 땅의 개념은 전세계적으로 확대된다. 평화의 왕이 다스리는 영토는 민족국가가 아니라 온 세계다. 그 지경은 바다에서 바다까지이른다(9:10). 이 표현의 배후에는 땅은 하나의 둥근 판으로 그 둘레에는 많은 물이 감돌고 있다는 고대의 세계상이 자리한다. 온유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5:6).

구약에서의 의(tzedakah, righteousness)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성이다. 충성이란 하나님이 가르치신 바른 길을 지키는 것이다(1:1-2; 17:5-8). 그 중심에는 십계명이 있다. 하나님의 공의를 간절히 추구하는 자는 그의 삶 속에 정의가 실현됨을 볼 것이다. 신약에서 의(δικαιοσΰνη, righteousness)란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이다. 나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주어진다.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 낙스 등 종교개혁자들과 영국의 청교도들과 감리교인들은 이신칭의의 도리를 발견하였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그의 제자됨의 길을 가는 자이다. 이들은 지배적인 여론과 사회적 인습과 관례와 권력의 독재 앞에 굴종하지 않고 거기에 저항하며 외로움과 고통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자들이다. (righteousness)란 오늘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알카에다,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전사(戰士) 등 처럼 인간이 설정한 성전(zihad, 聖戰)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의란 피의 복수가 아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란 용서하고 덮어주는 것이며, 용납하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이며, 집을 대신 져 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복음의 의다.

 

긍휼히 여기는 자(the merciful)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에 대하여 동정과 연민을 가지는 자는 자기가 그러한 처지에 있을 때 동정과 연민을 받을 것이다. 고통받는 이웃에게 연민을 가지는 자는 하나님의 고통에 참여하는 자다. 클레르브의 성 버나드(St. Bernard de Clairvaux, 1090-1153)는 아가서 주해서에 다음같이 피력하였다: “하나님은 고통을 당하실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은 고통을 함께 나누실 수 있는 분이다”(impassibilis est Deus, sed non incompassibilis). 절대적인 초월적인 이념의 세계 속에 있는 헬라적인 신은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자이나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그 초월성과 거룩성을 훼손하지 않으시면서도 그의 아들의 성육신과 십자가 고난 속에서 고통을 느끼시고 인간의 아픔에 동참하시는 공감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산상설교가 증언하는 하나님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the pure in heart)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5:8).

그 마음이 깨끗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이성만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의지만으로는 하나님만을 볼 수 없다. 이성과 의지의 바탕이 되는 영혼의 정서적 바탕인 마음이 깨꿋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성직자에게 와서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나 그대의 마음이 창을 어떠하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을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자신을 보여주신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산에 오를 자의 조건을 말한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24:3-5) 마음이 청결한 자는 손이 깨끗하며, 허탄한 데 뜻을 두지 아니하고, 거짓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다. 자신과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정직과 진실과 의로움의 관계를 가진 자를 말한다.

 

화평하게 하는 자(the peacemakers)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9).

다툼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심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다. 예수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화를 사람들 가운데 퍼뜨리는 자는 복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하나님과 평화를 가진 자들은 이웃과의 평화를 가질 수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those being persecuted)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5:10).

역사의 각 시대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는 악의 세력이 있다. 의로운 자는 이러한 세력에 대항하면서 박해를 받으면서 하시딤처럼 하나님의 의를 지키는 자다. 의를 위하여(because of righteousness)박해받는 자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있다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주기철, 손양원, 한상동 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저항하다 옥에 갇혔고, 주기철은 순교하고 손양원과 한상동은 옥고를 치루는 고통을 당하였다. 북한의 공산치하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처형되고 감옥에 갇히고 복음을 위하여 고통을 당했다. 복음과 의() 때문에 박해와 어려움을 받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for the sake of me)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5:11).

예수 이름 때문에 핍박과 박해를 받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이 있다. 예수 자신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다. 역사적으로 신앙의 선조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리고 종교개혁의 후예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욕을 당하고 거짓으로 악한 말을 들었다. 한 때 복음의 성지였던 평양과 북한 지역에서는 예수 이름으로 박해당하고 욕을 당하고 감옥에서 고문받고 순교 당하는 자들이 있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절했다고 일제에 굴복한 당시 한국교회 어용노회에 의하여 산정현 교회 목사직에서 해임당하고 그 가족들도 목사관에서 쫓겨 나가는 박해를 당하였다. 손양원 목사도 6.25 전쟁시 애양원의 가족들을 떠나지 않고 돌봄으로써 공산당에 의하여 피살당함으로써 순교하였다. 오늘날도 동남아시아 힌두교권과 이슬람권(인도,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에서는 복음전도를 하거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박해를 받고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your reward)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5:12).

복음을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에게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질 것이다. 주기철 목사과 그 가족들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존경받고 있으며 천국에서 순교자들로서 영원한 영광의 상급을 누릴 것이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절하면서 당한 고문과 옥고와 순교로 인해 천국에서 영광의 상급이 클 것이다. 손양원 목사도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사랑의 원자탄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천국에서 영원한 순교자의 영광과 상급을 누릴 것이다. 구약 선지자부터 신약의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카타콤의 신자들, 종교개혁 때 개신교 신자들, 영국의 청교도들, 오늘날 무슬림국가에서의 기독교인과 북한에서의 지하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질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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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1/17 [19:54]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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