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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2.17 [04:03]
예수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일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50]
 
정성민

 

1. 예수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일까?

 

예수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가지 기적을 일으키며 군중을 몰고 다니는 예수를 사람들은 정치적인 구세주로 인식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는 십자가의 처형으로 죽고 말았던 것이다. 로마의 정치적인 압제에서 시달리던 사람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면에서 유대인들은 아직도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자유롭게 해줄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은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에 의해 둘러 쌓여 있다. 그리고 무너진 유대인 성전 자리에 이슬람 성전이 세워져 있어 통곡의 벽에서 울며 기도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성전이 다시 세워지게 해 달라고 말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었다. 예수가 꿈꾸는 세상은 로마의 식민지에서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꿈꾸는 세상은 바로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예수는 사람들이 사단의 종 노릇을 하던 데서 자유를 누리길 원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이 땅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길 원했던 것이다.

 

이는 인간의 운명을 신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의 삶의 일체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던 석가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그분의 통치를 받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예수는 인류가 헛된 우상을 섬기는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길 원했던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석가는 사람들이 계급사회의 차별과 갈등 속에 사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석가가 꿈꾸는 세상은 바로 계급의 차별이 없는 이상적인 세상이었다.석가는 신분 간의 차별이 없는 공평한 세상을 꿈꾸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완전하여 거룩한 삶을 살기를 꿈꾸었다. 어쩌면 석가와 예수가 꿈꾸는 세상은 서로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석가가 꿈꾸는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거룩한 삶은 기독교인이 추구하는 성화의 삶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예수와 석가 모두가 이상적인 세상을 꿈꾼 것이다.

 

2. 그렇다면 어떻게 이상적인 세상을 이룰 수 있을까?

 

이상적인 세상을 이루는 구체적인 방법에 관하여는 예수와 석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석가는 인간이 스스로 인간을 구원하라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인생의 이치를 깨닫고서 허무한 삶, 즉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버리고 청정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예수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므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하나님이 중심이 된 이상적인 세상을, 석가는 인간이 중심이 된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이상적인 세상을 이루기 위한 예수와 석가가 제시하는 방법의 차이는 결국 유신론과 무신론, 유아론과 무아론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예수는 비록 인간이 죄악으로 타락하였지만 창조때의 본래적인 모습,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창세기 1:26-28절은 창조시의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 즉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을까?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구원자로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고, 그로 인해 거룩한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다는 것이다. 결국 죽어 있는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저절로 회복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은말한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 15:49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예수가 꿈꾸는 세상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가 몸소 보여주신 것처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태복음 5:38-42절)

 

예수가 말한대로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석가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계급의 차별이 없는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대로라면, 인생은 무의미한 인생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의미 있는 삶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모든 민족을 축복하는 삶으로 주님은 초청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꿈꾸는 세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다. 우리를 통해 모든 민족을 복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갈라디아서 3:6-9)

 

3.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 즉 이상적인 세상은 정말로 가능할까?

 

과연 예수가 주장하는 이상적인 세상,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아름다운 세상은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우리는 이러한 아름답고 이상적인 세상을 사도행전 4:32-35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과연 성경에서 실제로 일어났다고 증언하는 이상적인 세상이 현실 속에서도 가능할까? 물론 마르크스나 기독교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사도행전 4:32-35절을 공산주의적 이상사회의 모델로서 사용했다고 한다.

바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는 구절이다. 정말로 완벽한 이상사회의 모델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실제적으로 이러한 이상적인 세상이 성취된 적이 얼마나 있을까? 역사적으로 이러한 전인적인 구원을 성취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서 건강한 금욕주의를 살펴보는 가운데 언급했던 베네딕트 수도원이 그 중에 하나

이다. 중세초기 고행주의 신앙을 극복하고 건강한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한 수도사가

등장한다. 그가 바로 누르시아의 베네딕트(480-543)이다.

그는 고행을 장려하지 않는
그만의 독특한 수도원 창설하였다.수도원장은 수도사들의 건강을 보살필 의무를 가졌으며, 그들이 하루 두 끼를 충실하게 식사를 하는지 살피고, 병자와 어린이, 그리고 나이 많은 이들에게는 특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매일 채플에서 공동으로 예배하는 일에 4시간을 바쳤으며, 개인적으로 명상하며 기도하고 종교 서적을 읽는 일에 4시간, 그리고 먹고 자는 일에 10시간을 소모하였다. 이것은 베네딕트가 수도원의 규율을 인간적인 기준, 즉 상식선에서 정하면서 가장 행복한 공동체의 삶을 누렸던 것이다.

 

특별히 이 수도원은 올바른 식사를 강조하였는데, 당시 사막에 살던 많은 수도사들이 겨우 빵이나 소금 그리고 물을 마시면서 어렵게 삶을 유지한 것과는 대조가 된다. 베네딕트수도원은 하루에 두 끼의 건강한 식사를 마련하였는데, 이러한 식단에는 두 가지 이상의 요리된 음식들이 제공되었다. 그리고 계절에 따라 싱싱한 과일들과 채소들도 먹게 하였. 또한 수도사들은 매일마다 적당한 양의 포도주도 마실 수 있었다는 것이다.[1]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모든 수도사들이 땀을 흘리는 육체적

인 노동에 6시간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도 이러한 노동의 의무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들 수도사들은 가난을 통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아야 하는 강한 유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모든 수도사들이 모두 평등하게 가난하므로 서로가 의지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수도원은 그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는 체로 식량을 완전히 자급자족할 수 있다.[2]

 

그렇다면 어떻게 한 마음으로 뭉쳐서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 수 있었을까? 아무리 서로가난해서 필요를 느끼는 가운데 한 마음이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 비밀은 바로 수도생활의 핵심을 기도에 두었기 때문이다.[3]

수도사들은 낮에 일곱 번, 그리고 밤 중에 한 번,
모두 여덟 번씩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물론 각 개인들의 기도를 위한 시간들도 배정되었. 바로 공산주의가 꿈꾸던 그 이상적인 세상을 베네딕트 수도원이 지금부터 1400전에 이미 이루었던 것이다.

그 비결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을 날마다 가지면서 자신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열심을 다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베네딕트 수도원의 규율은 서방교회 전체로 퍼져 나갔으며 결국 수 많은 수도원들이 그것을 따라 생활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는 타락하였다. 대부분의 서 유럽을 통일하고 기독교 신앙

을 수호하고 확산시킨 칼 대제 (742-814)가 속한 카롤링 왕조(750-887)가 몰락하면서 유럽 사회는 폭력과 부패로 몸살을 알았다. 이 때 정치적으로 유력한 자들이 교회를 개인적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교황의 자리를 두고 유혈극이 벌어졌고, 성직이 매매되었다. 수도원들은 탐욕에 찬 수도원장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제물이 되어 사유재산처럼 여겨졌다. 더 이상 베네딕트 규율은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진정한 수도생활을 간절히 원했던 사람들은 수도원 자체의 개혁을 꿈꾸었다. 다시 한번 예수가 가르쳤던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아주 작은 수도원을 창설한 사람이 바로 공작 윌리엄 3(프랑스)이다. 수도원의 이름은 바로 클루니이다. 당시에 수도원장은 수도원을 설립한 사람의 가족이나 친척 중에 세웠으나 윌리엄은 수도원장으로 베르노(Berno)를 초빙하였다. 베르노는 수도원 개혁을 위한 열성이 대단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베르노의 요청에 따라 윌리엄은 자기가 가장 아끼던 사냥터 클루니를 수도원의 부지로 제공하였다. 윌리엄은 이 수도원이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교황들이나 교회 감독들, 그리고 영주들이 수도원을 위한 토지에 손대는 것을 명문화하여 금지시켰다. 이로 인해 베르노는 910년 시작하여 926년에 죽을 때까지 베네딕트의 규율을 온전히 따르며 수도원을 개혁하려고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베르노가 사망한 후에 도 클루니가 위대한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유능하고 신실한 수도원장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일대 교회사 교수인 곤잘레스는 말한다,

 

베르노는 926년까지 클루니를 지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망 후 일련의 유능하고

이상을 지닌 원장들이 계속해서 나타남으로써 클루니는 위대한 개혁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위대한 원장들의 이름은 오도(Odo, 926-944), 아이마드(Aymard, 944-965), 마이율(Mayeul, 965-994), 오딜로 (Odilo, 994-1049) 그리고 휴 (Hugh, 1049-1109) 등이었다. 이처럼 이례적인 능력과 헌신을 구비하였던 6명의 원장들이 거의 200년을 통치하였다. 이들의 지도 아래 수도원 개혁의 물결은 널리 퍼져 나갔다.[4]    

  

타락한 중세교회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이 땅을 이상적인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베네딕트 수도원이나 클루니 수도원의 숨결은 개신교의 전통에서도 발견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이다. 독일의 경건주의는 1517

루터를 통한 종교개혁이 100년이 지난 후에 교회가 너무나 이신득의의 교리에

집착하여 발생한 문제들을 개혁하고자 하는 유럽 개신교 자체 내의 운동이다.

이는 개인적인 경건이나 기독교인의 세상에 대한 봉사나 책임을 망각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다. 또한 17-18세기에 불기 시작한 계몽주의 운동의 철저한 인간 이성주의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이들은 교리보다는 종교적 경험을 통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더 중시하였다. 대표적인 경건주의자인 헤르만 프란케(Herrmann Francke)그의 종교적인 경험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의 간구를 들으셨다. 마치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나의 의심은

쉽사리 사라져 버렸다. 나는 가슴 속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을 단지 하나님이라고 뿐만 아니라 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다. 나의 가슴으로부터 즉시 슬픔과 걱정이 사라졌다. 또한 나의 가슴은 기쁨의 물결로 가득 찼다. 그리하여 나의 이러한 평화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큰 목소리로 찬양할 수 밖에 없었다.[5]

 

이와 같이 경건주의자들은 생동하는 개인적인 신앙을 주장했다. 그리고 학교, 고아원, 교도소, 그리고 빈민구제소와 같은 곳을 보살피며 사회봉사를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이 땅을 이상적인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독일의 경건주의 신앙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결국 영국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바로 18세기 위기의 영국을 구한 복음 전도자 요한 웨슬리를 통해서 말이다 

 

4. 과연 예수가 꿈꾸던 세상을 요한 웨슬리가 이루었을까?

 

요한 웨슬리(1703-1791)는 영국국교회에서 안수를 받은 신학자이며 사회운동가로서 감리교회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의 복음전도에 대한 열정은 남달라서 그의 복음전도사역 저술은 감리교회 뿐만 아니라 18세기 미국의 영적 대각성운동,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 20세기 오순절운동 그리고 기독교적 사회개혁운동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한 요한 웨슬리는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의 교수가 되었으며, 1728년 영국국교회, 즉 성공회의 사제가 되었다. 1729년에는 옥스퍼드에서 신학공부와 개인적 경건한 신앙을 쌓기 위한 모임, 즉 신성회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에는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도 가입하였다. 찰스 웨슬리는 복음적인 찬송가 작사자로서 훗날 요한 웨슬리와 함께 감리교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조지 휫필드는 성공회 사제로 안수를 받은 후에 예수의 복음에 너무나 뜨거워진 나머지
성공회 교회당에서 복음적인 설교를 할 수 없게 되자 1739년부터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성공회는 차분한 마음으로 미사를 드리는 예배의식을 따랐기에 휫필드와 같은 열정적인 복음전도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뜨겁고 감동적인 설교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요한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는 미국 식민지 조지아로 건너가 2년 동안 선교활동을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영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에 배 안에서 찬송하며 기도하는 모라비안 교인들의 담대한 믿음에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 후로 모라비안 교인들과 교류하면서 개인적이고 경건한 신앙의 참 모습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동안 머리로만 예수를 믿으며 사역을 하던 웨슬리에게도
1738524일에 뜻밖의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예수를 영접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날 그는 제대로 예수를 영접하였던 것이다. 바로 마음으로 말이다. 웨슬리는 그날의 경험을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신도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845분경에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과 주께서 내 죄를, 심지어 나까지도 다 거두어 가셨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후로 요한 웨슬리는 더 이상 머리로만 믿는 차가운 신앙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는 뜨거운 마음을 감당하지 못해 예수의 복음을 외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결국 요한 웨슬리도 조지 휫필드처럼 성공회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 사역을 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소그룹 모임을 조직하여 신자들이 양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웨슬리는 전통교회의 관례를 깨고 평신도 설교자를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나라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하였다. 더 나아가 소그룹 모임의 지도자로 여성을 세웠다는 것이다. 당시로는 정말로 혁신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로는 평신도가 설교를 한다거나 여성이 그룹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들이었기 때문이다.

 

웨슬리와 그를 따르는 감리교도들은 사회개혁에도 앞장섰는데, 바로 탄광촌 같은 곳에 어린이 교육사업, 빈민촌에 병원사역, 교도소 개혁사업 그리고 노예해방을 위한 사회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18세기 영국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대단한 위기였다.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피를 흘리는 정치적인 폭동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바로 산업혁명으로 인해 발생되어진 사회변화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삶이 너무나 힘겨워졌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새로 발명된 기계와 기술혁신으로 소규모 수공업에서 대규모 공장 생산 방식으로 전환을 의미했다. 이로 인해 생산성 증대와 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산업혁명은 사회구조를 근본부터 변화시켰기에 그 어떠한 정치적인 혁명보다 파급효과가 컸다. 전에는 감자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소작 농민들이 방적기의 개발로 많은 양털을 필요로 하면서 감자 밭을 갈아 엎고 울타리를 쳐서 목장을 만들었다. 즉 양을 키우는 사업으로 전환하게 된다.

영국의 지주들이 양 목장 사업으로 양털을 팔아 농사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되자 농민들을 길거리로 내몰았다. 안정된 생활을 하던 농민들이 도시의 빈민이 되어 떠돌이 생활을 하거나 도둑이 되었다. 또한 흉작, 식품가격의 급상승, 잦은 실업으로 사회적 불안감은 높아만 갔다. 방직기로 대량생산을 하는 인클로저 운동으로 수많은 농지가 양목장으로 만들어지면서 당시 영국의 주식인 감자 품귀현상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굶어 죽는 사람으로 거리가 뒤덮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불안 가운데 정치인이나 종교지도자들은 타락하여 불쌍한 빈민들에게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사람이 한 사람도 살지 않는 지역을 선거구로 만들어 국회의원이 선출되기도 하였다. 사제는 낮에도 술에 취해 있기에 결혼식을 주례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른 아침에 찾아가야 했다. 왜냐하면 술 취하기전에 주례식을 거행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사법체계도 엉망이어서 작은 묘목을 뽑거나 다리(Bridge)를 발로 차도 감옥에 보내 졌다고 한다. 그러니 감옥은 억울하게 들어온 사람들로 창궐했다는 것이다.

 

1730년부터 웨슬리는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규칙적으로 방문하고 전도하는 사회선교를 시작하였다. 당시 감옥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지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여건이 나빴다. 웨슬리와 감리교도들은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 겨울에는 석탄이나 나무를 갖다 주는 한편 심지어 빚을 못 갚아 들어온 죄수들을 대신해 빚을 갚아주고 석방시키기까지 했다고 한다.

 

웨슬리와 감리교도들은 정기적으로 병든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였고, 탄광촌에 약국을 세워 무상으로 병든 자들을 도왔다. 그리고 가난한 지역에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물론 많은 핍박과 반대도 있었다.

영국성공회는 이들의 옥외설교를 지속적으로 방해하였고, 웨슬리의 금주운동으로 인해 손해를 입은 양주업계조차도 웨슬리의 복음전도사역을 방해하였다. 결국
에 웨슬리가 전하는 전인적인 복음은 위기의 영국을 구원하였다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과 같이 피를 흘리는 유혈혁명이 아니라 예수의 복음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정신을 바로 세우고 정의롭지 않은 사회구조도 개혁하는 전인적인 무혈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는 웨슬리가 예수의 죄사함의 복음으로 각 개인의 영혼을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개혁과 노예해방, 교도소 개혁, 여성해방, 산업노동자의 노조운동 등 사회문제에 직접 뛰어들어 그의 신앙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기득권층이 원하지 않는 노예해방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회문제를 고치려 했다. 이러한 웨슬리의 노예해방을 위한 노력은 그가 죽은 지 40여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열매를 맺었다.영국정부는1834 8 1일부터 모든 영국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폐지하고 총20만에 달하는 노예를 해방한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웨슬리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가는 곳마다 찬송이 울려 퍼졌다고 한다. 그곳이 교도소이거나 공장이거나 말이다. 삶의 희망이 없어 술 중독에 빠져 헤매는 빈민들이 이들이 전해준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단번에 술을 끊게 되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양주업계가 나서서 이들 감리운동의 복음사역을 방해했을 것인가 말이다. 정말로 전인적인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혁신적인 복음 사역이었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인격적으로 믿고서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 가운데 있다면 이를 세상으로 표출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에 따라 사회적 변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영국성공회의 거룩한 예식, 즉 성례전을 중시하였지만 각 개인의 종교적 경험을 중시하는 복음적인 영성도 중시하였다.

웨슬리가 죽고 난 후에 그의 감리교 운동은 미국의 영적 대각성운동, 구세군, 성결교, 오순절 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영국 사회변혁에 대한 웨슬리의 영향은 정말로 지대하였다. 그래서 웨슬리는 영국에서 제일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바라기는 한국교회가 세상과 교회, 영과 육을 서로 분리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넘어서 영과 혼 그리고 육을 하나로 잇는 전인적인 구원으로 세상을 품고 세상을 변화시키길 바란다.

예수가 꿈꾼 그 세상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우리의 삶의 현장, 사회 각 영역 즉 종교, 가정, 정치, 경제, 예술, 매스미디어, 교육계에서 이루어 가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변혁의 시대를 열어가는 것이다.

 



[1]유스토곤잘레스, 중세교회사, 26-27.

[2] Ibid, 29.

[3] Ibid.

[4] Ibid, 93.

[5] Ibid, 135쪽에서간접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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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9/18 [11:15]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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