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
광고
교계뉴스문화/교육국제/NGO/언론생활/건강파워인터뷰오피니언연재정치/경제/사회한 줄 뉴스
전체기사보기
편집  2018.12.14 [17:19]
올바른 기독교 신앙은 무엇일까? (2)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49]
 
정성민

올바른 기독교 신앙은 어떤 것일까? 기독교 신앙에도 서로 상반되는 양극적인 요소들이 수도 없이 존재한다. 그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의 대립, 세속사와 구원사의 대립, 이성과 신앙의 대립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번 담화에서 다룰 영과 육의 대립, 선과 악의 대립, 하나님과 인간의 대립 그리고 예정과 자유의지의 대립을 말한다.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양극단의 대립적인 사고를 조화시킬 수 있을까? 이는 어쩌면 올바른 기독교 신앙을 위한 중도의 길을 찾는 것일 수 있다.

 

기독교는 유신론적 종교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역사의 주관자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미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의 중도나 중간적인 길의 가능성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적 중도는 유신론적 신앙을 전제로 하여 발생하는 양극적인 현상들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시도인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 세상, 인간을 하나의 유기적 관계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신과 인간, 신과 자연을 하나로 보는 범신론이나 자연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구원은 바로 전인적인 구원이. 바로 영, 혼 그리고 육을 모두 아우르는 통합적인 구원이다. 이러 면에서 기독교는 하나님을 전제로 하고, 영혼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적인 신앙 속에서 발생하는 영과 육의 대립, 예정과 자유의지의 대립, 이성과 신앙의 대립 그리고 세속사와 구원사의 대립을 조율할 필요가 있다. 바로 올바른 기독교 신앙을 위한 조화와 균형의 중도적인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1. 과연 영과 육은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지난 2천년 동안에 그리스 철학의 대가 플라톤은 그의 영혼불멸사상으로 인해 기독교 사상과 서양철학에 아주 막대한 영향을 남겼다. 그는 영혼을 인간의 본질로 보고 육신은 영혼을 가두는 감옥으로 보았다. 이게 바로 이원론적 사상이다. 반면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가치를 중시하지 않고 물질을 우주의 본질로 보았다. 바로 일원론적 사상이다. 어떻게 이러한 양극단의 사고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인간의 육신을 무시하고 학대하며 영혼만을 영원하고 본질적으로 간주하는 이원론적 사고와 영혼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인간의 육체와 물질만을 본질로 이해하려는 일원론적 사고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플라톤적인 사고로는 영은 하나님의 불꽃이고, 불멸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육은 감옥이며 영을 더럽히는 존재다. 이런 면에서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는 죄요 불순종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고로 보면 영은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이고, 단지 물질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영은 보잘것없는 것이고, 육은 존귀한 것이다. 하나는 육을 괴롭히는 금욕주의로 흐르고, 다른 하나는 육신의 쾌락과 즐거움을 정당화하는 쾌락주의로 흐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영혼과 육은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영혼과 육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라고 말한다. 영혼은 하나님의 섬광이요 불꽃으로 볼 수 있지만, 육은 그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지나친 금욕주의는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학대하는 불순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수도사들이 초보 수도사들에게 너무 자신의 육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조언한다고 한다. 또한 지나친 쾌락주의도 육신을 우상화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윌리암 제임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금욕주의적 성인들이 나이를 먹어가고 양심의 지도자가 좀 더 많은 경험을 했을 때, 그들은 대개 특별한 육체적 금욕을 더 이상 강조하지 않는 경향을 보여 왔음을 안다. 가톨릭 교사들은 신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는 건강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행으로 건강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언제나 주장해왔다. 오늘 날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 집단의 일반적 낙관주의와 낙관주의적 성품은 우리가 고행을 위해 고생하는 것을 모순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도의상 자기 갈등을 겪는 고통의 모습을 신이 기뻐한다는 관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내가 믿기에 금욕주의는 존재의 선물을 근원적으로 다루는 방법과 조화됨을 인정해야 한다…. 오래된 수도원의 금욕주의는 애처로울 정도로 하찮은 일들에 몰두해 있고 자기 자신의 완전함을 증대시키는, 단지 개인적 이기주의로 끝을 맺었다.[1]

 

하나님은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해결해 주셨다. 반석에서 물을 내셨고, 메추라기와 만나로 그들의 배를 채우셨다. 이에 시편기자는 이렇게 기록한다,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며, 그들이 구한 즉 메추라기를 가져오시고 또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셨도다. 반석을 여신 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같이 흘렀으니 이는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시편 10539-42)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합 왕을 피하여 도망한 엘리야를 위해 떡과 고기를 공급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도 까마귀를 통해서 말이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열왕기상 171-7)

 

구약의 하나님은 육신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떨까? 예수는 40일 금식을 한 장본인이다. 그렇다면 그는 금욕주의자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는 그야말로 금욕과 쾌락의 중도적인 길을 걸어가신 분이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 시간에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6:11) 그리고 보리 떡 두 덩이와 물고기 다섯 마리로 기적을 일으키셔서 배가 고픈 오천 명의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셨다. (마태복음 14:13-21) 결과적으로 예수에게 있어서 육신은 영혼의 감옥이 아니라 영혼을 담는 귀한 그릇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과 육신 모두를 동일하게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선순위의 문제가 있다. 바로 영혼을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육신을 배려하는 것이다. 이 순서만 바뀌지 않는다면 그 모든 육체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육신적인 즐거움이나 세상적인 즐거움도 적절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친 금욕은 하나님보다 앞서가는 것이다. 어쩌면 고행을 위한 고행내지는 금욕을 위한 금욕이 될 수도 있다. 석가가 부정한 것이 바로 이러한 금욕을 위한 금욕이기도 하다. 윌리암 제임스가 말한대로 자기 자신의 완전함을 보여주거나 증대시키기 위한 개인적 이기주의로서 금욕주의는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지나친 쾌락주의는 중독으로 이어져서 결국 마귀의 노예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지나친 금욕도 아니요 그렇다고 쾌락에 중독되어 조절능력을 상실한 것도 아닌, 즉 때와 상황에 맞게 적절한 금욕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도록 하기 위해 적절하게 육신적인 필요를 채우는 노력이 요구되어진다.

 

2. 과연 선과 악은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우리는 선은 하나님의 것이고, 악은 마귀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원론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생긴다. 선과 악을 완벽하게 분리해버릴 때에 하나님은 악에 대한 주권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악의 기원에 대해 논리상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악의 기원은 3가지인데, 바로 하나님의 주권, 인간의 자유의지, 마귀의 속임수 이다.

 

만일 악의 기원을 하나님에게 두게 되면 어떻게 될까? 비록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보장되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나 사랑이 타격을 입게 된다. 마치 하나님이 폭군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악의 기원을 인간의 자유의지에 두게 되면 어떨까? 비록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은 보장되지만 자칫하면 하나님의 전지하심이나 주권에 손상을 입힐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악의 기원을 마귀에게 두게 되면 어떨까? 하나님의 주권이 두 동강이 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의 기원을 밝힐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다. 그래서

악의 기원은 하나님의 신비이거나 비밀에 속한다. 흥미로운 것은 악은 선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어쩌면 중세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것처럼 악은 선의 시녀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만드시는 분이시다. 선을 연단하고 정화시키는 것도 악을 통해서다. 바로 선을 선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악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마귀와 가룟 유다를 통해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즉 마귀와 가룟 유다가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조연이라는 사실이다. 정말 아이러니하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리 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 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요한복음 1321-30)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을 심판하고 선으로 하여금 훈련 받게 하는 것을 악을 통해서 하실 때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블레셋이다. 그리고 악을 심판하는 것도 악을 통해서 하신다. 악이 너무 악하거나 너무 오랜 시간 악한 일이 너무 많이 쌓이면 또 다른 악을 통해 그 악을 심판하신다. 물론 선을 통해 악을 심판하신다. 그러므로 선과 악은 떼어내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실타래 같다고 할 수 있다. 악을 악하다고 완전히 제거하게 되면 선이 악으로 전환되는 현상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선이 악과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지 못하고 끌려간다면 선이 악에 흡수된다. 선과 악의 관계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흡수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들은 악과의 긴장과 갈등관계 속에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려야 한다. 악을 악하다고 함부로 인간적인 의지나 방식으로 심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악을 악하다고 심판하실 분은 바로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성경말씀을 새겨야 할 것이다.

 

3. 하나님과 인간은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보통 모든 종교는 오직 하나님만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인간의 존엄성은 상실된다. 반대로 모든 세속적인 철학과 과학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의 존엄성만을 주장한다. 어떻게 이러한 양 극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 종교들은 하나님의 주권이 너무 강조된 나머지 인간의 자유의지가 약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너무나 수동적인 삶을 살아간다. 인간의 자유의지적인 선택과 그로 인한 책임과 역할이 간과된다. 반면에 무신론적인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다스리심을 거부한다. 이들은 오직 인간 스스로의 계획과 성취를 통한 역사의 발전을 주장한다. 석가의 사상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양극적인 대립은 문제이다. 우리는 수직과 수평의 만남을 강조하듯 하나님의 주권, 계획 그리고 다스리심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는 바로 인간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아무리 계획을 세우더라도 하나님의 계획에 등지고 세운다면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떠한 계획을 세우신들 인간이 준비되지 않고 인간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문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인간을 통해서 이루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소돔성을 멸망하시려는 자신의 계획을 그의 종 아브라함과 대화하고 협상하는 것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 지 그렇지 않은 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그 사람들(하나님의 사자들, 천사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뢰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1817-32)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 자유의지를 동등한 관계로 볼 수는 없다. 하나님의 주권과 그로 인한 계획이 우선이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주권을 이루기 위한 협력적인 역할이라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 없는 인간은 고아요, 불행한 운명의 소유자들이다.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배제한 체 세상의 모든 역사를 계획하고 그 계획을 자신의 마음대로 실행하시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폭군 하나님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만큼 인간은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한 니느웨 백성을 용서하시고 심판하시길 멈추는 사건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 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 31-10)

 

물론 석가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인격적인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일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사랑의 하나님이거나 인격적인 하나님일리는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나 인격은 실제적인 것이다. 특별히 예수를 영접하고서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감격한다. 결국 인간을 존중하고 사랑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닌가는 각 개인의 체험에 따라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4. 예정과 자유의지는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영원한 평행선과도 같고 놀이터의 시소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이들의 영원한 함수관계를 풀 수 있을까? 만약 예정론자들이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들은 인간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만약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자들이 인간의 자유의지만을 강조하게 되면 하나님의 주권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자유를 포기할 수도 없다. 두 가지 선택 중 한쪽으로 기우는 것은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되어있다.

 

예정은 영원 전부터 세우신 하나님이 계획이다. 하지만 자유의지는 인간이 자신의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정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다. 또한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이라는 차원에 속한 것이고, 자유의지는 인간의 현재적 시간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와 예정은 서로 모순되지 않다. 예정이라는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이 하루하루를 사는 인간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서 성취되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서 완성이 된다는 것이다. 단지 자유의지를 통해서 순간순간의 선택을 하는 인간들은 무엇이 하나님의 계획인지를 미리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예정은 영원 속에 숨겨진 비밀이기에 현실의 단면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그 비밀을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은 영원히 감춰진 비밀문서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알고자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예정과 자유의지는 서로 정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서로 차원이 다른 한 쌍의 세트라는 것이다. 즉 예정은 하나님에 속한 것이고, 자유의지는 인간에 속한 것이다. 예정은 영원한 시간 속에 속한 것이고, 자유의지는 현재적 순간에 속한 것이다. 예정은 하나님의 계획이고,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예정과 자유의지는 서로 평행선상에서 달리는 기차의 두 레일과도 같다. 그로 인해 기차가 안전하게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계획과 계획대로 진행하는 것은 항상 별개의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미래를 자신의 의지대로 계획하셨지만 인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계획을 하나씩 완성해 나가신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 우리가 처한 현재적 상황과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의지적인 선택이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운명도 좌우하기 때문이다.

 

5. 과연 전인적인 구원은 가능할까?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면 전인적인 구원관이 필요하다. 이는 영과 혼 그리고 육이 하나의 유기체로 이루어져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인적 구원은 세계보건기구가 정의를 내린 건강의 개념과도 무관하지 않다. 세계보건기구가 규정한 건강이란 질병이 없거나 허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및 영적 안녕이 역동적이며 완전한 상태를 말한다. 또한 전인적 구원은 성과 속, 그리고 교회와 세상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바로 세계보건기구가 정의 내린 사회적 건강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성도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영광은 세속적인 세상과 인간의 역사를 통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장소이고, 구원 얻을 백성들을 만나고 수확하는 일터이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3-16)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우리는 세상을

회피하는 피안의 종교적인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을 바로 알고 그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들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속한 세상이 한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바로

전인적인 구원관을 가지고 말이다. 이러한 전인적 구원의 실제적인 가능성은 다음 담화, “예수가 꿈꾸는 세상은 무엇일까?” 에서 다루고자 한다.

 



[1]종교적경험의다양성,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구글+
기사입력: 2018/09/15 [15:46]  최종편집: ⓒ newspower
 
뉴스
광고
인기기사 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개인정보취급방침회사소개후원 및 광고 만드는사람들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136-5) 본관 107호 TEL 02-391-4945~6| FAX 02-391-4947,
Copyright2003-2018뉴스파워. all right reserved. mail to newspower@newspower.co.kr 등록번호 서울 아 00122 등록일 2005.11.11 발행 및 편집인 김철영. 청소년보호책임자:김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