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
교계뉴스문화/교육국제/NGO/언론생활/건강파워인터뷰오피니언연재정치/경제/사회한 줄 뉴스
전체기사보기
편집  2018.10.24 [05:02]
올바른 새김은 무엇일까? (2)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44]
 
정성민

올바른 새김은 열반에 이르기 위한 여덟 가지의 덕목 중에 일곱 번째 가르침이다. 올바른 새김은 명상수행을 할 때에 어떠한 사건이나 사물을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올바른 새김은 4가지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밟으면 완성이 된다. 먼저 신체에 대한 관찰로 시작해서 다음으로 감수를 통한 관찰을 한다. 그리고나서 마음 혹은 의식을 관찰하고 마지막으로 법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완성된다. 지난 담화에서 신체에 대한 관찰을 살펴보았고, 이제는 감수와 마음 그리고 법에 대한 관찰을 다루고자 한다.

 

1. 감수를 통한 관찰은 무엇일까?

 

올바른 새김을 위한 두 번째 과정은 감수를 통한 관찰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수란 무엇일까? 사전적으로 본다면, 감수는 외부 세계의 자극을 감각 신경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신체적인 감각기관들(, , , 귀 등)이 그 어떠한 사물을 경험하게 될 때에 우리 마음 가운데 생겨나는 그 사물에 대한 인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다음으로 생겨나는 것이 바로 촉이다. 여기서 촉이란 어떤 대상에 대한 느낌이다. 결과적으로 감수는 그 어떠한 대상에 대한 우리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석가는 말한다,

 

즐거운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안으로나 밖으로나 어떠한 것이든 느껴진 것이다. (Stn.738)

 

그러므로 감수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그리고 중성적인 느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은 각각 육체적인 느낌과 정신적인 느낌으로도 나누어서 구분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석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어떻게 감수 가운데 감수를 관찰하는가? 수행승들이여, 한 수행승이 있어 즐거운 감수를 느끼면나는 즐거운 감수를 느낀다.”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신체적으로 즐거운 감수를 느끼면나는 신체적인 즐거운 감수를 느낀다.”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정신적인 즐거운 감수를 느끼면나는 정신적인 즐거운 감수를 느낀다.”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1]    

 

즐거운 느낌은 탐욕을, 괴로운 느낌은 성냄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애매한 느낌은 어리석음을 일으킨다. 이때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원인은 바로 무지이다. 이는 현명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바로 무명을 가리킨다.[2]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수행자가 스스로의 느낌이나 감정에 대한 관찰을 해야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무명을 벗어나기 위하여서 자신 내면 안에서 발생하는 느낌을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행자가 느낌에 대한 분석적인 관찰을 하게 될 때 과연 무엇을 깨닫게 될까? 궁극적인 시각에 볼 때에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그 모든 느낌이나 감정은 괴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또한 그 느낌이나 감정의 실체가 없다는 사실도 깨닫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느껴진 모든 것은 괴롭다.’고 알고, 수행승은 부서지고 마는 허망한 사실에

접촉할 때마다 그 소멸을 보아 이처럼 그곳에서 사라져 모든 느낌을 부수고

바램 없이 완전히 열반에 든다. (Stn.739)

 

이러한 느낌의 속성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무상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생무상의 깨달음을 통해 결국 해탈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존재의 흐름을 추구하여 접촉에 패배당한 사특한 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장애를 부수기 어렵다. 그러나 접촉에 대하여 두루 알아 최상의 앎과 적멸을 즐기는

사람은, 접촉을 고요히 가라앉혀 바램없이 완전히 열반에 든다. (Stn.736-37)

 

2. 마음에 대한 관찰은 무엇일까?

 

올바른 새김을 위한 세 번째 과정은 바로 마음에 대한 관찰이다. 과연 마음은 무엇일까? 사전적으로 보자면 마음은 사람이 본래부터 지닌 성격이나 품성을 말한다. 하지만 심리학적으로 분석한다면 마음은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나 의지 그리고 생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생겨나는 우리의 태도나 자세라고 말할 수 있다.

 

먼저 인식은 마음의 첫번째 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식은 우리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사물이나 사건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순수한 체험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난생 처음으로 귤을 보게 되면 귤은 노랗고 작고 둥글둥글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 속에 귤은 노랗고 작고 둥글둥글한 사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인식은 사물에 대한 첫 인상을 마음에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순수체험으로의 인식은 마음에 아무런 가치 판단을 주지 않는다. 즉 그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하여 나쁘다 내지는 좋다는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결국 인식은 어떠한 가치판단을 주지 않는 중성적인 속성을 지닌다. 쉽게 말해, 우리가 노랗고 작고 둥글둥글한 그 어떤 것으로 인식한 귤이 과일인지 아닌지 그리고 신맛인지 단맛인지를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귤이 노랗고 둥글둥글한 그 무엇이라는 사실만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감각기관(, , , 귀 등)과 대상들(사과, , 자동차 등)의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서 전달되는 그 정신 작용들(정보교류)에 의해서만 의식이 분별력이나 판단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귤을 까서 입으로 먹어본 후에 귤이 달콤한 과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관찰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마음 상태가 선하고 깨끗한지 아니면 악하고 더러운지를 살피려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남이 잘했나 잘못했나? 보려고 애쓰지 말고 항상 스스로 자신을 살펴서 바른지 바르지 못한지를 알려고 해야 하느니라. (법구경, 050)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올바른 새김은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 상태가 선한 지 아니면 악한 지를 단지 관찰하고 살필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마음상태를 살피다가 혹시라도 자신의 더럽혀진 마음에 분노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순수한 마음에 도취하지 말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자아에 대한 집착을 가져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올바른 새김은 순수한 마음이건 더럽혀진 마음이건 간에 그 사실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선한 마음이건 악한 마음이건 간에도 그 사실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단지 분명히 보여지는 그대로만 인식할 뿐이다. 석가는 말한다,

 

집착이 없다면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는 아무 것도 취하거나 버리는 것이 없어서, 이 세상에서 그야말로 모든 견해를 떨쳐버렸기 때문이다. (Stn.787)

보거나 듣거나 감지한 것이 어떠한 것이든 그는 그 일체의 것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

이렇게 보아서 열린 마음으로 행동하는데, 어찌 이 세상에서 그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 (Stn.793)

 

결국 올바른 새김은 사건이나 대상을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이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관찰을 할 때에 조차도 객관적 삼자로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어떠한 것에 집착하여 다른 것을 저열하다고 본다면, 착하고 건전한 님들은 그것을 속박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본 것이나 들은 것이나 규범과 금계나 감지한 것에 수행승은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Stn.798)

 

이것이 바로 올바른 새김이다. 이러한 새김의 결과는 아무런 쓸데없는 감정들, 예를 들어 분노, 자기 연민, 슬프고 우울한 감정 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월폴라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번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 당신에게 고함을 질렀을 때 분노가 일어났다면, 그러한 감정적으로 요동된 상태를 당신 자신의 감정으로 대하지 말고 제 삼자의 마음으로 관찰한다면 당신의 혼란한 감정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나 자신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관찰로 수행을 한다면 새김은 더 깊어지면서 악하고 불건전한 감정들은 점차로 사라진다. 또한 악하고 불건전한 감정들에 수반되어진 불필요한 생각의 확장도 막을 수 있게 된다.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쓸데없이 미혹되는 마음이나 과대망상이나 피해망상, 정신분열, 자학, 자기정당화 등의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의 상태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관찰이 진행되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어디에서부터 오지도 않고 어디로 가지도 않는 순수한 의식의 흐름, 즉 마음의 지속만이 남는다는 것이다.[3]

 

이는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 삼자로서 관찰하게 될 때에 악하고 더러운 마음은 저절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하고 건강한 마음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 삼자로 바라보게 될 때에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정 내지는 편견 등을 떠나게 되므로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얻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올바른 새김은 번뇌라는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정신적인 고통이 아집과 편견, 주관적이고 왜곡된 생각으로 인하여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더럽고 악한 생각들로 인하여 우리가 감각적인 쾌락의 대상들에 대하여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올바른 새김을 통해 이러한 무지로 인한 집착이 그 모든 정신적인 고통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깨우침이 바로 궁극적인 지혜로서 결국 열반을 성취하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석가는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잘 닦여진 마음을 이렇게 설명한다,

 

거룩한 님은 경계들을 뛰어넘어, 알고 또한 보아서, 집착하는 일이 없다.

욕망에도 탐착하지 않고, 욕망을 떠났다는 것에도 탐착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최상이라 집착할 만한 것은 없다. (Stn.795)

 

3. 법에 대한 관찰은 무엇일까?

 

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법에 대한 관찰은 인간이 경험하는 외적인 세상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의 신체)을 관찰하는 것과 그로 인해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작용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는 법은 외적인 진리 (자연의 법칙)와 내적인 진리 (사성제), 모두를 포함하는 궁극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석가는 이를 법 혹은 사실이라고 부른다.[4] 석가는 법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실()은 현세적이고 무시간적이고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5]

 

(사실)은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법은 인간이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자신의 신체 뿐만 아니라 세상의 그 모든 사건과 사물을 바라볼 때 벌어지는 정신작용을 관찰하여 얻은 결론을 말한다. 만일 우리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자세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우주의 원리로서 법을 얼마든지 파악할 수 있다. 석가가 말하는 법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분류되어 진다.

1) 다섯 가지 정신적인 장애들에 대한 관찰

이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무지를 불러오는 요소들이다. 바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 분노,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환 그리고 의심인 것이다.

2) 다섯 가지 존재의 요소들에 대한 관찰

이는 석가가 생각하는 인간관을 말한다. 인간은물질, 느낌, 생각, 의지그리고의식이라는요소들로구성된존재라는것이다. 인간은다섯가지존재의요소들로구성되어끊임없이변화하는물질적, 정신적인또는에너지의조합에지나지않는다는것이다. 그러니까영혼과같은영원한실체는없다는것이다.

3) 여섯 가지 감각적인 기관에 대한 관찰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의식을 말한다. 인간은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래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욕망과 집착이 생겨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감각기관을 통제한다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집착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4)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에 대한 관찰

석가는 7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말하는데, 새김, 탐구, 정진, 희열, 안온, 집중, 평정의 깨달음의 고리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열반에 이르는 정신적인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즉 새김과 탐구를 통해 자신의 신체나 자연을 객관적으로 관찰을 하고나서 혼란스럽고 오염된 마음이 깨끗하게 정리(정진)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마음에 기쁨이 생겨나고 마음이 평안 해져서 명상수행을 할 때에 정신통일이나 정신집중이 깊어 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이 집중되어 마음이 통일되면 인생무상이라는 궁극적인 진리를 깨우치게 되고, 그로 인해 그동안 추구해왔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이 되었던 욕망과 집착을 버리므로 마음의 절대 평안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5) 네 가지 거룩한 진리(사성제)에 대한 관찰

사성제는 석가가 깨달은 인생의 진리로서 왜 세상이 그토록 고통스러운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러한 정신적인 고통에서 해탈할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 이는 고...도라는 4가지의 깨우침을 말한다. 먼저 는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다. ‘은 고통의 원인이 인간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 내면의 탐욕, 갈애 그리고 집착 등이 고통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은 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통에서 해탈하는 열반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는 고통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그 구체적인 방법을 말한다. 바로 팔정도이다.  

 

결과적으로 법에 대한 관찰은 궁극적인 관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신체에 대한 관찰, 감수에 대한 관찰 그리고 마음에 대한 관찰을 순서대로 하고 난 후에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궁극적인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에 대한 관찰은 해탈에 이르는 지혜이거나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이를 궁극적인 앎이라고 부른다.

 

석가는여러 지각에서 떠나면 속박이 없고, 지혜로서 해탈하면 미혹이 없습니다.”(Stn.847)라고 말한다. 여기서 해탈에 이르는 지혜는 바로 명지이며 궁극적인 앎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불교를 지혜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수행자가 이러한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때에 비로소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열반에 도달하기 위하여 거룩한 님의 가르침을 믿고

방일하지 않고 현명한 님이라면, 배우려는 열망을 통해 지혜를 얻습니다. (Stn.186)

 

4. 석가가 깨달은 궁극적인 지혜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우주나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 즉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관찰을 한 후에 깨닫게 되는 궁극적인 깨달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영원한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즉 무아론이다. 석가는 이렇게 주장한다,

 

모가라자여, 항상 새김을 확립하고 실체를 고집하는 편견을 버리고,

세상을으로 관찰하십시오. 그러면 죽음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을 관찰하는 님을 죽음의 왕은 보지 못합니다. (Stn.1119)

 

결국 열반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은 상태이다. 이는 세상에서 영원히 존속할 영혼과 같은 실체는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또한 그 사실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로써 수행자는 최고의 경지, 즉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자에게는 죽음이나 윤회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슬픔이나 기쁨도 없고, 탐욕이나 집착도 사라지게 된다. 결국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는 떠돌이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즉 세상의 소유물에 대한 아무런 욕심이나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도 없이 청정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석가는 이러한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은 현명한 자의 삶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는 현명한 자로서 지혜에 통달하고, 가르침을 알아, 집착이 없으니,

세상에서 바르게 행동하고, 이 세상에 아무 것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감각적 욕망을 뛰어넘어, 극복하기 어려운 집착을 넘어선 님은

흐름을 끊어, 묶임이 없고, 슬퍼하지 않고,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Stn.947-48)

 

만일 수행자가 이러한 궁극적인 지혜를 깨닫게 될 때에 그는 모든 유혹이나 욕망에서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악마는 올바른 새김을 통해 이러한 궁극적인 깨달음을 성취한 석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은 칠 년 동안이나 세존을 발자국마다 따라다녔다.

새김을 확립한 올바로 깨달은 님께 그러나 다가갈 기회조차 없었다. (Stn.446)

 

석가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이렇게 말한다,

 

몸을 보기를 빈 병과 같이 하고 마음을 편히 하기를 언덕의 성과 같이 하라.

지혜로써 마귀와 더불어 싸우되 승리를 지키고 다시는 잃지 말도록 해야 하느니라. (Stn. 040)

 

이를 해석하자면, 그 어느 것도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자는 그 어떠한 성적인 유혹이나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석가에 있어서 성적인 유혹이나 소유에 대한 집착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열망은 마귀가 주는 생각인 것이다. 물론 석가가 마귀를 하나의 실체로서 생각할 리는 만무하다. 석가에 의해 마귀라는 용어 또한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상징적인 개념일 뿐일 것이다. 왜냐하면 연기법이나 무아론에 의하면, 마귀와 같은 영적인 존재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앞서 밝힌 대로 연기법은 석가의 사상적인 바탕이고, 연기법에 의한 궁극적인 깨달음의 결과는 바로 무아론이다. 결국 연기법과 무아론에 의해 영적인 존재는 부정되는 것이다.

 

5. 기독교는 이러한 불교의 궁극적인 지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올바른 새김은 인간의 신체, 인간의 감정, 인간의 마음, 그리고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을 하는 것이다. 특별히 인간의 감정이나 마음에 관하여는 우리 자신의 감정이나 마음을 우리 스스로 객관적인 삼자가 되어서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에 대하여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관찰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깨닫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변한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영혼과 같은 영원한 것들은 그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다. 결국 인생무상이라는 철학적인 결론이다.

 

이러한 올바른 새김에 대하여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두 가지의 사실이 문제가 된다.

첫째는 과연 석가가 주장하는 올바른 새김이 정말로 객관적인 관찰인가의 문제이다.

석가가 주장하는 세계관은 바로 그가 생각하는 객관적인 관찰위에 세워졌다. 그가 주장하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관찰은 무엇일까? 바로 무신론적인 합리주의인 것이다.

그의 과학적인 사고도 또한 무신론적이다. 그러기에 무신론적인 과학적 합리주의가 그가 생각하는 객관적인 관찰인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유신론적 과학적 시각과 유신론적 합리주의의 가능성을 믿는다. 과연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오직 인간의 육체적인 눈으로 확인이 된 것들만 사실로 받아들이는 무신론적인 과학주의만이 객관적인 진리일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도 없는데 말이다. 결국 신을 전제로 하는 인간의 이성적인 합리성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물론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없지만, 유신론적 과학주의나 합리주의가 더 완벽하고 객관적인 관찰을 가능하게 한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과연 올바른 새김으로 인한 궁극적인 깨달음이 진실한가의 문제이다. 석가의 궁극적인 깨달음은 무아론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특별히 영혼과 영적인 존재는 그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기독교는 영의 세계를 믿는다. 하나님도 영이시고, 인간의 영혼도 영적인 실체이다. 심지어 마귀도 영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영적인 세계의 신비를 인정하는 것이다. 과연 영적인 세계를 완전히 거부하는 불교의 가르침과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는 기독교의 가르침 중에 어떤 것이 옳을까? 그 해답은 또한 각자의 몫이다.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석가의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에 따라 그 모든 영적인 세계를 부정한다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1]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129.

[2] Ibid, 128.

[3] Ibid, 131.

[4] Ibid, 131-32.

[5] Ibid, 132쪽에서간접인용.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구글+
기사입력: 2018/09/07 [05:23]  최종편집: ⓒ newspower
 
뉴스
최근 인기기사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개인정보취급방침회사소개후원 및 광고 만드는사람들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136-5) 본관 107호 TEL 02-391-4945~6| FAX 02-391-4947,
Copyright2003-2018뉴스파워. all right reserved. mail to newspower@newspower.co.kr 등록번호 서울 아 00122 등록일 2005.11.11 발행 및 편집인 김철영. 청소년보호책임자:김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