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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2.14 [16:11]
건강한 금욕주의는 무엇일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34]
 
정성민

1. 건강한 금욕주의는 무엇일까?

 

모든 종교는 금욕주의를 지향한다. 어쩌면 종교의 공통분모라고 말할 수도 있다. 금욕주의는 인간의 육체적인 욕망을 죄악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밥 먹고 즐기는 것, 잠을 실컷 자는 것, 오락을 즐기는 것 그리고 성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 등의 육체적인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금욕주의는 육체적인 욕망을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규정한다. 육체적인 욕구를 추구하는 것은 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금욕주의는 대부분 이러한 이원론적인 성향이 강하다. 육체와 물질을 무시하고 오직 영적인 것 만을 중시한다. 쉽게 말해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욕주의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너무나 영적인 세계만을 강조하여 감각적인 욕구나 상식과 같은 인간적인 면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삶의 현실을 너무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성적인 욕망의 문제점만을 지적한다. 실제로 성적인 욕구로 인하여 인류가 종속된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만일 건강한 금욕주의를 유신론적 입장에서 그리고 유아론적 입장에서 정의한다면, 건강한 금욕주의는 영, , 육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신 앞에서 바로 서기 위하여 자신의 육신적인 욕구를 필요에 따라 절제하고 다스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영혼을 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하여 필요에 따라 그리고 그 가능한 범위 안에서 육체적인 욕구를 제어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영적이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하여 자신의 감각적인 욕구를 절제하고 다스리면서도 동시에 인간적이고 육체적인 욕구조차도 수용할 수는 없을까? 이는 균형 있는 신앙의 가능성을 향한 질문이다. 즉 건강한 금욕주의가 가능할 것인가 대한 질문이다. 여기서 필자는 인간의 육체적인 한계를 넘어서 거룩한 삶을 추구하려는 너무나 지나친 금욕주의를 고행주의로 부르고자 한다. 그리고 거룩한 삶을 위하여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인간적인 범위 안에서 적절하게 제어하고 다스리려는 시도를 건강한 금욕주의로 부르고자 한다.

 

사실 고행주의(지나친 금욕주의)와 건강한 금욕주의 사이의 갈등은 모든 종교에서 발견된다. 고행주의와 건강한 금욕주의는 외형상으로 서로 유사한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육체적인 욕구와 욕망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면에서 일치한다. 차이가 있다면 바로 정도의 차이인 것이다. 그러기에 고행주의도 일종의 금욕주의이다. 단지 인간의 신체가 지닌 정도나 한계를 넘어서 지나치게 금욕을 강조하는 것이 문제다. 고행주의는 신적인 거룩함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신의 육체를 제어할 뿐만 아니라 더 나가 억압하는 행위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고행주의는 자학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러한 고행주의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그 한 예를 들자면, 4세기 경의 라틴 교부 제롬이다. 예일대 교회사 교수, 곤잘레스는 제롬의 지나치게 금욕적인 삶을 이렇게 기록한다,

 

제롬은 또한 성(Sex)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따라서 수도생활로 은둔함으로써 이러한 짐을 벗어버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수도원 속에서마저 악몽에 시달렸고 로마에 있는 무희들의 환상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스스로 자기의 육체를 학대하고 극단적으로 엄격한 생활을 통해 이러한 생각들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그는 또한 목욕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 씻김을 받았으므로 다시 더 씻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우겨대었다. 그러나 이 모든 금욕생활로도 충분치 못하였다. 그는 정욕과 유혹을 잊고 자기의 마음을 다른 것으로 채우기 위해 히브리어를 공부하기로 결정하였다.[1]

 

결국 고행주의는 육신 안에 갇힌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육체를 한없이 괴롭히고 제어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영혼은 순결하고 육체는 악하다고 생각하는 이원론적인 사고를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대표적인 고행주의의 종교는 아마도 힌두교와 자이나교일 것이다. 자이나교가 철저히 살생을 피하는 것은 어쩌면 고행주의의 한 단면일 수가 있다. 이에 대하여 정세근 교수는 말한다,

 

'불살생', 흔히 간디에 의해 '비폭력'으로 알려진 덕목이 바로 자이나교의 제1규율이다. 그들은 철저히 살생을 피한다. 수행자들은 책을 넘길 때는 부채로 쓸고, 숨쉬다가 날파리가 들어갈까봐 코와 입을 거르는 마스크를 하고, 생명체가 살아있는 물은 밟고 지나가지 않으며, 길을 다닐 때 빗자루로 쓸며 다닌다.[2]

 

2. 석가가 추구하는 금욕주의는 무엇일까?

 

석가는 힌두교적 고행주의를 거부하였다. 또한 감각적 유물론자들의 쾌락주의도 거부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행주의와 쾌락주의 사이의 중간적인 길을 가르쳤던 것이다. 바로 중도이다. 그렇다면 석가가 말하는 중도는 실제적으로 무엇일까? 아마도 중도는 고행주의라는 극단적 금욕주의를 벗어나서 적절한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석가는 자신의 몸을 지나치게 학대하고 손상시키는 행위들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데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깨우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석가가 말하는 금욕주의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배를 가득 채우지 말고 음식을 절제하고,

욕심을 적게 하고 탐욕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Stn.707)

 

밤이 지나 새벽이 밝아오면, 마을 어귀로 가는 것이 좋지만,

마을에서의 초대나 가져온 것에 너무 반겨서는 안 됩니다.

성자의 삶을 사는 님은 마을에 이르러 가정집에서 조급하게 행동해서는 안 되고,

음식을 얻고자 하는 이야기를 끊고, 암시적인 말조차 꺼내지 말아야 합니다.

얻은 것이 있다면 좋고, 그러나 얻지 못한 것도 잘 된 것이니,

어떤 경우라도 나무로 되돌아오듯, 그와 같아야 합니다. (Stn.710-12)

 

음식이나 음료나 먹을 만한 것이나 또는 옷을 얻더라도 쌓아 두어서는 안 되며,

그것들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잠을 많이 자서는 안 됩니다. 부지런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나태와 환상과 웃음과 유희와 성적 교섭과 거기에 필요한 장식물도 함께 버려야 합니다. (Stn.924, 926)

 

그러니까 석가가 말하는 금욕주의는 음식도 먹고, 잠도 자는 것이다. 단지 게으르거나 나태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욕심을 부리지 말고 절제하는 것이다. 단지 성욕에 관하여는 고행주의와 마찬가지로 매우 엄격하게 금기시한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만일 수행을 하는데 성욕이 문제가 된다면 극단적인 경우에 성기를 제거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고행주의다. 하지만 석가가 가르치는 금욕주의는 그러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보다는 신체의 더러움에 관한 명상을 통해서 마음속의 성적인 욕망을 지워버리도록 노력한다. 석가가 명상하는 신체의 더러움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이 몸뚱이는 부정하고 악취를 풍기며, 가꾸어지더라도,

온갖 오물이 가득 차, 여기저기 흘러나오고 있다. (Stn.205)

 

또한 그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나온다.

눈에서는 눈꼽, 귀에서는 귀지가 나온다.

코에서는 콧물이 나오고, 입에서는 한꺼번에 담즙이나 가래를 토해내고,

몸에서는 땀과 때를 배설한다. (Stn.197-98)

 

딴하와 아라띠와 라가를 보고 성적 교섭에 대한 욕망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오줌과 똥으로 가득 찬 존재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두 발조차 건드리길 원하지 않습니다. (Stn.835)

 

석가가 말하는 금욕주의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중간보다는 오히려 고행주의에 훨씬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석가의 가르침은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절제하여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건강한 금욕주의로 비춰질 수 있다. 석가는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를 잘 안다. 그는 말한다, 세상에서 실로 감각적인 욕망은 버리기 어렵다. (Stn.772) 하지만 그는 우리가 이러한 감각적인 욕망을 제어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감각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면 정신적인 고통은 더해지고 결국 해탈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석가는 말한다,

 

욕망을 조건으로 존재의 환희에 묶인 자들, 그들은 미래와 또는 과거를 생각하면서,

현재나 과거의 감각적 욕망에 탐착하므로, 스스로 해탈하기 어렵고 남에 의해 해탈을 얻기도 어렵다. (Stn.773)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고 열중하는, 어리석고 비열한, 바르지 못한 행위에 빠진 사람들, 여기서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하고 그들은 괴로움에 짓눌려 비탄해 한다. (Stn.774)

 

결과적으로 석가가 쾌락주의를 완전히 거부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감각적인 욕구를 제어하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통제해야만 한다. 하지만 통제가 너무 심해지면 고행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지나친 금욕주의는 어쩌면 고행을 위한 고행이 될 수 있다. 즉 고행주의가 완벽주의로 향한 집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석가가 고행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자신을 학대하는 고행을 통해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려는 시도가 결국 집착이라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서 이는 스스로를 비우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자연스러운 시도가 아니라 완벽하고 거룩한 생활이라는 목표를 정해 놓고 이를 향해서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몰아 부치는 것을 말한다. 어쩌면 거룩한 생활의 완벽한 실현이 또다른 욕망이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어쩌면 완벽주의를 향한 강박증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육체적인 욕망을 다 버렸다는 사실에도 너무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석가는 말한다,

 

거룩한 님은 경계들을 뛰어넘어, 알고 또한 보아서, 집착하는 일이 없다.

욕망에도 탐착하지 않고, 욕망을 떠났다는 사실에도 탐착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최상이라 집착할 만한 것은 없다. (Stn.795)

 

결과적으로 석가가 추구하는 것은 집착이 없는 거룩한 삶이다. 석가는 고행주의와 같은 완벽주의를 위한 집착은 불필요한 고통을 불러오기에 거부한다. 결국 석가가 추구하는 거룩한 삶은 지나친 고행주의가 아닌 건강한 금욕주의적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가는 성적인 욕망에 관하여서는 거의 고행주의에 가깝다. 석가는 말한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몸에 대한 욕망에서 떠나야 한다. (Stn.203)

탐욕에 물들어 아름다워 보이는 인상을 회피하라. (Stn.341)

내 마음에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기대가 없다. 보라, 존재의 청정함을! (Stn.435)

 

그렇다면 과연 석가의 금욕주의는 무엇이 문제일까? 유신론적인 입장에서나 유아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석가의 금욕주의는 우리가 왜 금욕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나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신과 하나가 되거나 아니면 신에게 가까이 다가서기 위하여 거룩한 삶을 추구한다면 문제가 없다. 그리고 자이나교처럼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기 위하여 비 살생과 비폭력의 거룩한 삶을 추구한다면 또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석가가 금욕주의적 삶을 추구하는 이유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 자기 만족을 위해서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신도 존재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다고 믿는 영혼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아주 짧고 허무한 인생을 살아간다. 당신의 악행을 심판할 사후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정세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불교는 영혼의 부재를 말한다. 영혼이란 자아의 불멸성을 말하는 것이다. 자아는 고정적이지 않은 변화 속의 것이다. 만물과 마찬가지로 나도 일정함이 없이 흐른다. 산 나도 정체성이 없는데, 죽은 내가 정체성이 있을 리 없다. 불교는 연기를 말함으로써 신에 의해 결정된 윤회가 아닌 인간행위의 윤리적 인과성을 강조한다. 신이 개입하지 않고도 인간 스스로 윤리적 상황을 창조하며, 개혁하고 실현한다. 선악의 규율을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그는 인간으로서 범하는 죄악을 씻고 마침내 삶의 질곡에서 해방된다. 그런데 불교는 윤회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 영혼이 없고, 나의 정체성도 없는데, 어떻게 윤회할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윤회의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불교는 영혼을 부정하면서도 불변하는 물질적 실체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신이 세계를 창조하지도, 인간은 숙명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았다. 자아도, 실체도, 업도 연기에 의한 것이므로 허구이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가는 하루하루를 육체적인 욕망을 절제하고 비폭력과 자비의 거룩한 삶을 살라고 가르친다. 도대체 석가가 주장하는 청정한 삶을 왜 살아야 할까? 이러한 석가의 금욕주의는 어쩌면 자기만족내지는 자아도취로 비춰질 수 있다. 다음은 자신을 따르는 금욕주의자에 대한 석가의 자아 도취적인 발언이다,

 

쾌락과 불쾌를 버리고, 청량하여 집착 없이

온 세상을 이겨낸 영웅, 그를 나는 고귀한 님이라고 부릅니다. (Stn.642)

 

3. 과연 기독교 신앙은 건강한 금욕주의를 가르칠까?

 

기독교 역사를 바라볼 때, 기독교 안에서도 고행주의와 건강한 금욕주의 사이의 혼동이 있었다. 고행주의자들은 어쩌면 강박적으로 신앙을 지키려는 자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 신앙이 박해를 받던 초기 기독교 시기에 순교를 자처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을 지키려고 어쩔 수 없는 당하는 순교가 아니라 자발적인 순교를 통해 순교의 영광을 얻어보려는 신앙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어쩌면 이들은 석가가 말하는 고행주의자들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4세기에 이르러 로마가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313)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래서 기독교에 열심인 자들은 더 이상 순교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에 그들은 더 이상 교회 내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이들은 광야로 나가서 자신들의 신앙을 외롭게 지켜야만 했다. 광야에 머물며 사는 신앙인들의 목적은 마귀와 투쟁을 하는 것이었다. 이는 세상적인 것을 탈피하고 천사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로 먹여 주시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천사들의 찬송소리를 들으며 자신도 함께 찬송하였다. 이들은 점차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게도 되었다. 때론 근심과 걱정에 쌓여 고민하는 사람들을 상담해주며 위로해주었다. 진정한 신앙을 위해 교회를 뛰쳐나가 광야로 향한 이들은 대부분은 금욕주의자들로 볼 수 있다. 어쩌면 고행주의자가 더 많을 수도 있다. 초대교회 최초의 사막의 수도사로 알려진 안토니는 그의 부유한 재산을 다 버리고 사람들이 살지 않는 무덤에서 고행의 길을 걸었다. 그는 누군가 며칠 만에 한번씩 갖다 주는 빵 만을 먹고 살았다고 한다.[4]

 

이들 고행주의자들의 생활 목표는 마태복음 19:21의 말씀대로 완전한 거룩한 삶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그 모든 감각적인 욕구와 욕망을 죽여야만 했다. 고향과 친척도 버려야 했다. 그리고 금식하고 깨어 있으며, 앉아서 자야 하고, 좁은 방에 갇혀 지내며, 살갗을 자극하는 올이 굵은 베옷을 입어야 했다. 몸을 씻는 일도 포기하고, 심지어는 무거운 사슬을 걸치거나 나무 십자가를 져야 했다. 여자에게는 눈을 돌리지 않아야 했다. 그들은 마치 들짐승처럼 생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세상적인 것으로 유혹하며 마음에 나쁜 생각을 심어주는 마귀와 내적인 싸움을 싸워야 했던 것이다.[5] 5세기에 기둥 성자로 알려진 시몬이 (?-459) 30년 동안을 기둥 위에서 앉아 수도하면서 살았다. 이는 고행주의자들의 신앙과 삶이 어떠했음을 짐작하게 해 주는 일화이다. 이는 결국 초기 기독교 신앙이 고행주의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4세기부터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교회가 세속화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신앙인들이 진정한 신앙을 지켜 내기 위해서 교회로부터 광야와 사막으로 도피하였다. 이들이 함께 모여서 생활하게 되면서 결국 수도원 운동(320년경)이 시작된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지나친 금욕주의를 실천하면서 고행적인 신앙을 고수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너무 지나치게 육신을 무시하고 영적일에만 몰두하여 영육 간의 균형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세초기 고행주의 신앙을 극복하고 건강한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한 수도사가 등장한다. 그가 바로 누르시아의 베네딕트(?-547)이다. 그는 고행을 장려하지 않는 그만의 독특한 수도원을 창설하였다. 수도원장은 수도사들의 건강을 보살필 의무를 가졌으며, 그들이 하루 두 끼를 충실하게 식사를 하는지 살피고, 병자와 어린이, 그리고 나이 많은 이들에게는 특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매일 채플에서 공동으로 예배하는 일에 4시간을 바쳤으며, 개인적으로 명상하며 기도하고 종교 서적을 읽는 일에 4시간을, 육체적인 노동에 6시간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수도원은 식량을 완전히 자급자족할 수 있다. 그리고 먹고 자는 일에 나머지 10시간을 소모하였다. 이것은 베네딕트가 수도원의 규율을 인간적인 기준, 즉 상식선에서 정했음을 보여준다. 수도사들은 늘 조용한 가운데 경건한 분위기에서 생활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러나 무조건 정숙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필요 없이 수다 떠는 것은 금하였던 것이다.[6]  

 

베네딕트는 믿음이 좋은 사람들 가운데도 엄격한 규율과 규칙적인 생활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서 수도원에 입문하는 조건을 강화하였다. 즉 지원자는 먼저 일 년 간 임시 수습생으로 생활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가 수도원 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교육을 못 받은 자나 문맹자들은 교육을 받도록 조처하였다. 물론 수도원을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기관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베네딕트 수도원은 교육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였다. 그리고 결국에는 AD 600~1100년 어간에 글을 깨우친 사람들 가운데 90%가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은 받은 사람들이 되었다.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베네딕트 수도원은 중세 초기의 사회 상황에 아주 잘 맞는 적절한 기관이었다. 베네딕트 수도원은 공동체가 가진 교육과 자기 보존 능력으로 말미암아 중세 유럽의 교육, 종교, 경제,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수 많은 인재들을 길러낼 수 있었다. 수도사들은 성경과 교부들의 신학적 전통을 연구하고 이를 전수하기 위하여 사본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였다. 수도원은 기독교 서적과 고전을 소장하는 도서관의 기능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세 초기에 세워진 한 수도원을 통해 우리는 건강한 금욕주의가 우리 자신을 바꾸고 또한 세상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나친 금욕주의는 고행을 장려한다지만 그 결과가 자기 파괴와 사회적 고립을 자초할 뿐이라는 사실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4. 과연 예수는 건강한 금욕주의자일까?

 

아마도 예수는 고행주의자는 아닐 것이다. 안식일에 그의 제자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밀밭에 있는 이삭을 잘라먹었다. 이때에 바리새인들은 예수에게 항의를 하였다. 어떻게 안식일에 남의 밀밭에 있는 이삭을 잘라먹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배가 고파서 남의 이삭을 훔쳐 먹는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안식일에는 더 더욱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마태복음 12:3-5, 7)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고행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개 고행주의자들은 원칙에 충실한 자들이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그 어느 것도 절대로 할 수 없다는 율법의 조항들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것을 깨는 것은 곧 죄이다. 이 말은 이들은 절대로 상황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예수를 따라다니다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제자들의 배고픈 상황보다는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다윗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다가 며칠씩 굶어서 죽게 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는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이 왜 있는지를 먼저 살피라고 말한다.

 

이러한 상황은 부모가 사망하면 애도의 의미로 3년간 상복을 입고 일체의 행동을 삼가 하는 한국의 전통적인 관습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삼년상은 고려초기부터 시작하여 조선시대 양반 가문에서는 아주 일반화되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관직을 그만 두어야 했다. 그리고 무덤 근처에 조그마한 거처를 짓고 거기서 무덤을 지키면서 애도를 표하였다. 탈상, 3년 상이 지날 때까지 술과 고기를 먹을 수 없으며 아내와 잠자리를 할 수 없었다. 과연 삼년상이 현실적으로 가능했을까? 아마도 고행주의자들은 삼년상을 지켜 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효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삼년상이라는 관습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삼년상을 제대로 치루면서 현실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건강한 금욕주의자들은 어떻게 삼년상을 치뤘을까? 아마도 3년내내 삼년상을 치루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년상 동안 벌어지는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맞이하면서 그들은 엄청난 도전 속에서 고민했을 것이다. 아마도 삼년상이라는 관습을 지키면서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정신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삼년상을 그 기간만큼 치루지는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면에서 조선시대 20대 왕 경종이 삼년상의 달수를 하루하루의 날 수로 고쳐서 13일을 소상, 27일을 대상으로 치르도록 왕명을 내린 이유를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삼년상이 만들어진 그 정신을 이해하고 그 정신을 현실적인 삶속에서 이뤄지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삼년상의 정신은 무엇일까? 곧 살아서 부모를 잘 공경하는 것이 최우선이고, 그리고 부모를 사랑하는 자식의 마음이 장례를 치루면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차선인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 삼년상의 모든 것이다. 삼 년 동안 무덤을 지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그저 형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고행주의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 삼년상을 지키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예수는 안식일은 하나님도 쉬고 인간도 쉬는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쉬는 것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사이에 혼동이 있을 수 있다. 고행주의자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하지만 건강한 금욕주의자들은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하나님도 인간도 안식하고 쉬는데 초점을 더 맞출 것이라 생각된다. 결국 안식일에 너무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먹는 예수의 제자들의 행위를 '쉬는데' 초점을 맞춘다면 그렇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고행주의는 신이나 영적인 면에 초점이 더 맞춰진 것이고 건강한 금욕주의는 신이나 영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지만 인간적인 기준도 더불어 함께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건강한 금욕주의자임이 틀림이 없다. 예수가 건강한 금욕주의자라는 사실은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용서해주는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던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3-11)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은 율법을 어긴 것이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 하지만 예수는 이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한다. 그러자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하나 둘씩 사라진다. 그제서야 예수는 그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고 집으로 돌려보낸다. 만일 예수가 고행주의자이라면 아마도 율법대로 그녀를 돌로 치라고 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율법의 정신을 잘 아는 예수는 그녀를 용서해 주셨다.

 

그렇다면 과연 그 율법의 정신은 무엇일까? 바로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율법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완전한 선행을 이루고자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를 빌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데에 율법은 요긴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율법을 지키면서 절실히 깨닫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는 간음한 여인을 죽이라고 정죄하는 자들에게 말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결과적으로 예수는 율법의 정신을 바로 알아서 그 정신을 간음한 여인에게 적용한 것이다. 결국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돌을 던질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눈으로 생각으로 음탕한 마음을 모두가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에게는 인간들이 지닌 성적인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예수가 건강한 금욕주의자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원칙과 율법에 사로잡혀 고행을 자처하거나 남의 고행을 조장하는 그런 고행주의자는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즐기는 모습을 바리새인들이 비난하는 것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마태복음 91-11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또한 예수가 고행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의 가르침을 듣고자 따라온 오천 명의 무리를 굶기지 않고 기적을 베풀어서 먹였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설명이 된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죽음은 고행이 아닐까? 물론 고행이지만 고행주의자의 선택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고행은 인류를 위해 꼭 필요한, 목적이 있는 고난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의 금욕주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적이 있고, 죄인들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 주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건강한 금욕주의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건강한 금욕주의는 육신을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육체를 학대하기 보다는 잘 조절하고 절제하는 훈련을 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예수가 추구하는 건강한 금욕주의는 영, , 육의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적절한 자기 절제를 통해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삶이 신을 기쁘시게 하고 신과 하나가 되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인간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깨끗이 하여 거룩하고 흠 없는 영혼을 유지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육신의 한계 안에서 자기 제어와 절제를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나치게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 행하는 고행은 자기 자신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건강한 금욕주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상식적인 기준에서 육신을 통제하고 다스려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1]유스토 곤잘레스, 초대교회사 (서울: 은성, 1987), 318-19.

[2]윤회와 반윤회, 164.

[3]Ibid, 178-79, 181-82.

[4]초대교회사, 223-24.

[5]김영재, 기독교 교회사 (서울: 합동신학대학원 출판부, 2005년 개정판), 159.

[6]김영재, 기독교 교회사 (서울: 합동신학대학원 출판부, 2005년 개정판),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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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21 [05:29]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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