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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1.15 [20:02]
과연 신은 악의 문제에 책임이 있을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6]
 
정성민

 인도의 신들은 자연 종교적인 신들로서 의인화된 신들이다. 예를 들면, 우뢰의 , 물의 , 태양 신, 폭풍의 수도 없이 많다.[1]이는 마치 그리스 신화를 통해서 알려진 그리스의 신들과 유사하다고 있다. 마치 신들이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의인화된 신들이다. 그러므로 석가가 생각하는 신들은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싶은 욕망에 불타기도 하고 어떠한 대상에 집착하며 괴로워 하는 유한한 존재들에 불과한 것이다. 석가모니는 의인화된 신들에 대하여 이렇게 주장한다,

 

보라! 신들을 포함한 세상의 사람들은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생각하여 정신·신체적인 것에 집착해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라고 생각한다. Stn. 756)

 

사실 석가가 말하는 신들은 초월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처럼 슬픔과 고통을 겪는제한적인 존재들에 불과한 것이다. 석가는말한다,

 

그들은 신들을 포함한 세상에서 이것들이야말로 즐거움이라 여긴다. 그래서 그것들이 사라질 때에는 그것을 괴로움이라고 생각한다. Stn. 760)

 

결국에 석가가 말하는 신들은 자연현상을 주관하는 각각의 신들이다.[2]어쩌면 농경사회 속에서 풍요를 갈망하는 토속적인 신앙이 이러한 자연종교를 가능케 했다고 본다. 다분히 기복적이고 미신적이지 않을 없다. 석가는 이러한 자연 종교적인 신들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의 존재에 관하여서 우리가 분명하게 수는 없다는 불가지론적인 무신론을 가르쳤다.  이는 힌두교의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기복신앙[3]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석가는 이를 통해 현실과 타협하는 타락한 종교, 힌두교를 개혁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실을 정세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론(공산주의)마르크스 혁명을 가능하게 했듯이, 법이 불교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무지막지한 , 그들에 의해서 벌어지는 괴이한 일들, 선행과 악행이 윤리적이지 않고 멋대로이고, 지옥이나 천당이 인격도야와 무관해지고, 우리는 오로지 신을 찬양하거나 봉양하여 그에 의해 구원되거나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진정 일이 없다. 석존이 부정한 것이 바로 이러한 제멋대로의 신이었다. 그들의 횡포와 변덕을 석가는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4]

 

종교철학자, 파니카에 의하면, 석가는 전통 힌두교의 의인화된 신들을 인정하길 거부하였다. 이유는 마치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신들은 결국 신인동형설(anthropomorphism)[5]이기 때문이다. 석가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취향이나 사고방식에 따라 신을 자기들 멋대로 규정하고 만드는 것을 거부하였다. 나아가 만일 궁극적인 초월자가 정말로 유신론자들이 말하는 바로 신이라면, 신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과 부조리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결국 석가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철학적인 이유는 바로 신정론의 문제라고 있다. 그렇다면 신정론이란 무엇일까? 신정론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에 발생한다. 만약 하나님이 전능하시면서 그리고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세상에 악은 존재할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정반대이다. 세상은 인간들이 범하는 도덕적인 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재앙과 같은 비도덕적인 악들로 가득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질병과 죽음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슬프고 괴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 그리고 고통의 문제에 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속의 악의 문제와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신은 의로울 뿐만 아니라 선하다는 입장을 변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가 신정론이다.

사실 인간이 저지르는 도덕적인 악과 자연 재앙과 같은 비도덕적인 , 나아가 질병과 죽음으로 내몰리는 고통의 현실 속에서 인간들은 도대체 사랑의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는 아우성을 지를 수밖에 없다.[6]그러므로 이러한 신정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의 신관을 바꾸면 된다. 바로 사랑의 하나님을 포기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폭군하나님으로 남게 만드는 것이다. 아니면 아예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 악의 문제는 저절로 풀리게 된다. 다음은 신정론의 문제에 대한 가톨릭 신학자, 니터의 주장이다,

 

우리가 그리는 하나님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현실이기에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이미지에 문제가 있거나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지난 2004년도에 인도네시아, 인도 그리고 태국을 강타하여 수십 만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쓰나미를 있다. 과연 이러한 자연적인 대재앙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인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자연재앙도 하나님의 행위라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다. 수십 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자연재앙이 하나님의 높으시고 선하신 뜻에 따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거나 혹시 막을 있는데 막지 않으셨다면, 이는 정말이지 비도덕적인 것이다. 쓰나미라는 엄청난 자연재앙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고 정당화하기에는 너무나 비이성적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이러한 비도덕적인 것으로부터 면제시켜준다면, 무엇인가가 잘못된 것이다.[7]

 

1. 지금 석가모니가 살아있다면, 다시 한번 말하는데, 하나님과 같은 존재는 없다!!!말할 것이다. 

 

세상 속에 현존하는 악의 문제에 대한 석가의 반응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되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신관을 포기하였을까? 아니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였을까? 석가의 선택은 바로 번째 것이다. 석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에 대한 모든 책임으로부터 하나님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였던 것이다. 결국 석가는 세상 속에서 경험하는 악이라는 아주 미묘한 실체를 이해할 없기에 마침내 신의 존재를 포기해야만 하는 철학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것이다. 이는 현실의 참혹함으로 인해 "신의 죽음"선포했던 니체의 무신론적 철학과도 유사하다. 만일 그렇다면 어쩌면 석가는 현대 무신론 철학의 선구자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와 악의 문제에 관한 석가의 입장에 대해 니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석가모니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하여 말하기를 꺼렸을 뿐만 아니라 악에 관하여도 분명하게 말하기를 꺼리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의 문제에 관한 불교의 입장은 너무나 복잡하고도 논쟁적이다. 불자들은 어떤 사람이나 물건들 혹은 사건들을 악하다고 부르길 원치 않는다. 아마도 불자들이 어떤 사람이나 사건들을 악하다고 부르거나 규정을 짓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거나 관계를 악화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사람이나 상황을 악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우리가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거나 아니면 우리가 상황을 나은 방향으로 해결하지 못하게 것을 불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인 악에 관한 입장이었다면, 자연적인 재앙과 같은 악은 어떻게 이해해야 것인가? 지진이나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는 자연의 변덕스러움에 의한 것인가? 이에 대한 불자들의 답변은 기독교인들을 아주 놀라게 것인데, 바로 우연히아니면 단지발생한 것이라는 것이다. 자연재해는 단지 바람의 움직임이나 지질층의 변화 아니면 온도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일 뿐이다. 이는 우리 인간들이나 짐승들에게 전해지는 유전자적 결함조차도 마찬가지다. 그냥 그런 것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유를 찾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거나 그냥 발생하기 위해서 발생된 아주 뜻밖의 일일뿐이다. 어떠한 특별하거나 구체적인 이유는 없는데, 이는 어떠한 신적인 의지가 작용했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자연재앙이나 유전적 결함은 그냥 우연히 발생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냥 맞서야만 한다. 여기서 불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고통들을 맞설 있다는 것이다.[8]

 

가톨릭 신학자, 레이몬드 파니카는 석가의 무신론적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만일 우리가 유신론자로서 신에 관한 이미지나 개념에 집착하여 그것이 없이는 없다고 한다면 석가모니는 그렇게 하라고 말할 것이지만, 역시 최고의 종교는 다신론을 거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무신론이라고 주장할 것이라는 것이다.[9]

 

사실 신인동형설과 같이 하나님을 의인화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너무나 본능적이다. 그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유는 인간이 신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 자신들의 꿈이나 소망을 성취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죽음과 질병 그리고 감당할 없는 자연적인 재앙들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을 신을 의지하므로 극복하려 한다는 것이다.[10]

 

앞서 말했듯이 석가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아니면 악의 최초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아무런 쓸데가 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그런 철학적인 논쟁은 우리의 실제적인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통스런 삶을 해결해 줄 있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면 말장난에 불과한 이단적인 사상이라는 것이다.[11]비록 석가가 하나님의 존재를 침묵하면서 부정하거나 긍정하지도 않았지만, 소승불교를 중심으로 불교 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어떠한 시도나 증거물들도 거부한다. 이런 면에서 석가의 사상이나 철학이 무신론적 체계로 간주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어떤 초월적인 신이나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는 면에서 본다면 불교는 어쩌면 종교로 보기 보다는 사상체계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악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세상이 악으로 가득 차고 이처럼 모순투성인데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해야 할까?  아니면 좋으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우리의 관념을 포기해야 할까? 신학적으로 , 인간이 자신이 지닌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악이 세상에 침투했다고 말할 있다. 아담의 선악과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변호할 있지만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손상을 입는다.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타락 그리고 뱀의 유혹을 미리 막지못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셨다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겪는 고난도 세상 속의 악도 궁극적인 선을 위해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처럼, 악도 선의 시녀라는 입장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보장될 있지만, 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속성은 손상을 입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간과하는 폭군 하나님으로 전락되어질 있다.


마지막으로
악의 기원을 마귀에게 두는 것이다. 이는 마귀가 하나님과 영역 전쟁을 벌이다가 하나님의 동산에 침범하여 인간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사랑의 하나님의 속성을 보장할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손상을 입힌다. 결국 악의 문제는 기독교인이 없는 딜레마인 것이다. 그렇다고 진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피조물인 우리에게 진실이 숨겨진 것뿐이다. 현재에 사는 피조물에게는 영원 속의 하나님의 계획과 비밀들을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은 하늘 위에 계시고 인간은 아래에 있다(전도서 5:2)전도서 기자의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인은 이해할 없는 악의 문제와 현실 속의 고통의 문제를 경험하면서 절망하거나 하나님을 의심해서는 된다. 오히려 이러한 모든 것을 통해서 궁극적인 선을 이루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더욱 굳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도서 7:13-14)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악인은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전도서 8:11, 13)



[1]일반적으로우리는힌두교를다신교로이해한다. 파니카는다신교와유일신교의신관의차이점에관하여다음과같이진술한다, 신성에관한다신론적인이해는유일신론에서말하는그것과는전혀다른것이다. 다신론의신들은마치살아있는우주의시민들과도같다. 우주는실재의근본적인구조를일컫는하나의이름일뿐이다. 신들모두가필연적으로창조주들일필요가없을뿐만아니라또한신들중의하나가반드시창조주일필요도없다. 창조는유일신론적인믿음의하나일뿐이다. 다신론적신앙에서는우주가강력한신성을가진신에의하여좌지우지되는것은아니다. 마치인간들이자연이나우주보다열등하지않듯이신들도우주보다는열등하지않은존재들이다. 신들은우주안에거하고, 동시에그들모두가우주를구성한다. 하나의신이전적인통치자로발견되지않을경우에우주는무질서가운데있다고생각한다면, 이는유일신론적인시각인것이다. Raimon Panikkar, The Rhythm of Being (Maryknoll: Orbis, 2010), 164.

[2]오강남교수는그의저서세계종교둘러보기에서전통힌두교가자연숭배라는사실을밝힌다. 자연을의인화하고신격화하여그들에게찬송하고기도를하였다고한다. 건강이나장수, 부귀나영화, 전쟁에서의승리, 그리고가뭄이나홍수와같은재앙을피하여풍년을간구하여소원을성취하는수단으로자연신들에게기도를드렸다는것이다. 오강남, 세계종교둘러보기 (서울: 현암사, 2003), 36-39.         

[3]힌두교의기복적인민간신앙은이들이드리는제사를통해서쉽게있다. 힌두교인들은매우종교적이라고있는데, 이는이들의자체가제사이고예배라는뜻이다. 이들은각자가섬기는신의모양을신상으로만들어집안에서모신다. 또한마을이나동네마다신전이있어그곳에있는신상앞에매일같이절하고예배한다. 어쩌면자신들의개인적인삶보다도자신들의신을예배하는것이소중하기에매일같이그리고하루종일신상을귀하게모시면서소중하게제사를드린다고있다. 마치신을인간처럼생각하여인간을대접하듯이하루종일신상을통해자신들의신을섬기고대접한다. 다음은윌리엄페이든의흰두교의제사에관한설명이다. 힌두교의제사에해당하는푸자(puja)이와유사한형식을가지고있다. 푸자는집에서매일드리는경우도있고 1년에번씩사원에서드리는경우도있다. 힌두교인들은신상공경으로신에대한공경을표현하는데, 마치왕실손님대하듯이신상을대한다. 힌두교의신은하루종일대접을받는셈이다. 아침에잠자리에서깨어나는순간부터대접을받기시작하며낮에는음식을대접받는다. 신이잠자리에드는밤에야하루의의식이마감된다. 하루동안의의식에는신상을목욕시키고옷을입히고기름을칠하고예물을바치고즐겁게해주는행위가포함된다. 이는종교적공경을표현하기위한일상적행위가집약된것이라있다.종교의세계, 146.  

[4]윤회와반윤회, 186-87.

[5]신인동형설은하나님을인간처럼생각하고행동하는것으로이해하려는사고인데, 이는하나님의능력을 "하나님의오른" 등과같은표현을사용하여마치하나님이오른손이있다거나하나님도오른손잡이로이해하여하나님과인간의속성이유사하거나동일하다고믿는종교적인이해이다. 

[6]니터는신정론의문제를이렇게설명한다, 우리를사랑하시는개인적인하나님은그의피조물이고통을당하는것을원하시지않을것이다. 이것은바로신정론의문제인데, 만약하나님이전능하시고사랑이풍성하신우리의  아버지이시라면우리가겪어야하는고통들중에서정말쓸데없는것들은막으시거나없애버리셔야만한다는것이다. 왜냐하면전능하시기에고통을미리막거나제거하실있고, 사랑이많으시기에자녀들의고통을간과하시지않을것이기때문이다. 그러나현실은정반대이다. 우리가그리는하나님의이미지와는전혀다른현실이기에무엇인가잘못된것이다. 결국우리가생각하는하나님의이미지에문제가있거나하나님이전능하시고사랑이많으신하나님이아닌것이다. 구체적인예를들자면, 지난 2004년도에인도네시아, 인도그리고태국을강타하여수십만명의목숨을빼앗아간쓰나미를있다. 과연이러한자연적인대재앙을하나님이의도하신것인가? 기독교인들은이러한자연재앙도하나님의행위라고말한다. 만약그렇다면, 나는그런하나님을믿지않을것이다. 수십만명의목숨을앗아간자연재앙이하나님의높으시고선하신뜻에따라하나님께서의도하신것이거나혹시막을있는데막지않으셨다면, 이는정말이지비도덕적인것이다. 쓰나미라는엄청난자연재앙을하나님의목적을이루기위한수단이라고정당화하기에는너무나비이성적인것이다. 만약우리가하나님을이러한비도덕적인것으로부터면제시켜준다면, 무엇인가가잘못된것이다. Paul Knitter,Without Budda, I could not be a Christian (Oxford: Oneworld Publications, 2009), 30.

[7]Ibid.

[8]Without Budda, I could not be a Christian, 39-40.

[9]Raimundo Panikkar, The Silence of God: the Answer of the Buddha (New York: Orbis, 1989), 23.

[10]Raimon Panikkar, The Rhythm of Being (Maryknoll: Orbis, 2010), 304.

[11]Y. Masih이렇게주장한다, 불교에서는악이나고통의원인을신에게돌리지않을뿐더러악이나고통의최초의원인에대하여생각하는것조차도못하게한다는것이다. 고통이나악의최초의원인을알고자하는시도자체가형상학적인이단이라는것이다. (Y. Masih, A Comparative Study of Religions (New Delhi: Shri Jainedra Press, 1990),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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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6/07 [08:39]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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