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
광고
교계뉴스문화/교육국제/NGO/언론생활/건강파워인터뷰오피니언연재정치/경제/사회한 줄 뉴스
전체기사보기
편집  2018.12.12 [10:42]
두 남자를 구한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
성경속 조연들
 
김윤희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여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현대처럼 점점 외모에 치중하는 사회 속에서 그러한 요소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진정으로 보석과 같이 빛나는 여인을 만나고 싶다면 눈여겨 보아야 할 덕목은 ‘지혜’가 있는 여성이냐 하는 것이다.

현대 여성들, 미안하지만, 특히 한국 여성들에게는 지혜가 부족하다. 영리할 망정, 유능할 망정 지혜롭지 못한 여성들이 많다. 우리의 교육 현실이 그렇다. 입시 위주의 철학 없는 교육은 한 사람의 인격 형성에 있어서 역기능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격의 깊이와 내면의 수양과 관계 있는 지혜로운 여성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환경만 탓할 수는 없고, 앞으로 세계 속에서 여성들이 목표로 해야 하는 미덕은 지혜로운 여성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여성은 귀하고, 그런 여성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진정한 필요(real need)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여성이 ‘지혜로운 여성’인가? 말로 정의를 내리는 것보다는 여기에 한 사람을 소개함으로 그 정의를 대신하고자 한다.
 
i. 아비가일은 누구인가?(삼상 25장)
구약성경에 두 사람의 아비가일이 나오는데, 한 사람은 다윗의 자매(sister)이다(대상 2:16, 17). 또 한 사람은 여기 소개하고자 하는 인물인데, 이 사람도 다윗과 깊은 관계가 있는 여성이다.

1. 나발의 아내(삼상 25:1∼3)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저자는 교묘하게도 그의 이름을 밝히기도 전에 ‘그는 심히 부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재산은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25:2). 욥과 비교해 보면 욥은 당시 동방사람 중에 가장 부자였는데,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었다(욥 1:3). 이것을 보아도 이 사람이 상당히 부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물질이 그의 존재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물질을 위해 살고, 물질로 만족하다 죽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다. 마치 신약에서 ‘곡식을 쌓아놓고 만족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 12:16∼21)에 등장하는 부자를 은연 중 떠오르게 하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나발이다. ‘나발’이라는 말은 ‘어리석은 자’라는 뜻이다. 어떤 부모가 이러한 뜻의 이름을 주었겠는가 라는 논리로 이것이 나중에 붙여진 별명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으나(타당한 이론), 우리 나라에서도 태우(泰愚, ‘크게 어리석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까지 한 것을 보면 ‘나발’이 이름이라고 해도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닌 것 같다. 이 사람은 ‘완고하고 행사가 악한 자’(삼상 25:3)라고 평가되어 있다. 부자고, 악하고, 어리석은 자가 나발이다.

반면에 그의 아내가 여기에서 등장하는데, 그녀의 이름이 바로 ‘아비가일’이다. ‘아비가일’은 ‘나의 아버지는 기쁨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답다’(삼상 25:3)라고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서 ‘총명하다’는 단어는 잠언에서 ‘지혜롭다’(잠 1:3)라고도 해석된, 지혜문학의 핵심단어를 사용함으로 그녀는 ‘미모와 지혜’를 지닌 여성으로 소개되어 있다. 즉, 나발과 아비가일은 지혜문학에서 강조하고 있는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를 대표하는 것으로 저자는 표출하고 있다.

2. 다윗과 나발(삼상 25:4∼13)
사실 나발 스토리는 다윗 스토리의 일부로 나오기 때문에 다윗 스토리의 전체 맥락 속에서 나발 스토리의 역할을 이해해야 한다. 다윗은 이미 사무엘에게서 왕의 기름 부음을 받은 상태에서(삼상 16장) 사울의 시기를 받아 쫓기는 신세가 되어,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삼상 22:2에 따르면 400명 가량인데, 25:13에 따르면 600명이었다; 비교, 삼상 23:13) 방황하는 시기에 있었다. 그러나 사무엘상 본문에 보면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다윗의 왕권에 대한 인정이 확산되어 가며, 그는 왕으로서의 위치를 점점 굳혀 가고 있었다.

선지자 사무엘은 물론이고, 선지자 갓,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 제사장 아비아달(삼상 22:20), 그리고 마침내 사울 왕까지도(삼상 24:20∼22) 그를 왕이 될 사람으로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왕을 세우는 사무엘의 역할은 성취되었으므로 25장 본문을 사무엘의 죽음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제 본문(삼상 25장)에서는 오직 지혜로운 자들만이 다윗의 왕권을 인정하며 어리석은 자들은 그것을 인정치 못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마침 다윗이 광야에 있는데, 근처에서 나발이 양털을 깎는다 함을 듣고 열 명의 소년들을 보내어 식량을 요청한다. 양털 깎는 시기는 큰 축제 기간이므로(참고; 삼하 13:23∼28) 잔치를 베풀고, 포도주가 나오는, 식량이 풍부한 호기(好機)였다(삼상 25:8  “좋은 날에 왔은즉”).

다윗은 열 소년들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나발에게 요청할 것을 지시한다(삼상 25:5∼8). 이것은 다윗 스스로를 ‘네 아들 다윗’(삼상 25:8)이라고 부르며 나발에 대한 존중과 존경심을 표하는 것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후에 사울도 다윗을 ‘내 아들’(삼상 26:25)이라고 부름으로 어쩐지 나발은 사울을 연상시킨다. 소년들에게 먼저 평강의 인사를 하고, 다윗이 나발의 목자들을 얼마나 잘 보호해 주었는지를 고하고, 나발의 소년들에게 베푼 것처럼 다윗의 소년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을 정중히 요청하도록 지시한다.

이러한 다윗의 조심스러움에 반하여 나발의 대답은 읽는 이로 하여금, 그는 애당초 그러한 예우를 받을 자격조차 없는 이였음을 느끼게 한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삼상 25:10, 11)라고 ‘나불’거리고(저속하지만 그에게 어울리는 단어임) 만다.

나발의 대답은 다윗이 베푼 호의에 대해 선을 악으로 갚는 모욕적인 언사 그 자체이다. 다윗의 존재뿐 아니라 그 부모까지도 들먹이며 다윗을 따르는 무리들도 주인을 떠난 종들이 모인 불법적인 집단이라는 것을 은근히 비꼬면서, 자기 종들이 먹을 것을 왜 정체 불명의 자들에게 주겠느냐는 것으로 요청을 무시해 버린다.

사무엘상 24장과 26장을 보면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노리는 추격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울 왕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므로 사울 왕을 감동시키는 고상한 인격의 면모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25장은 그 두 장 사이에서 전혀 다른 사건을 다루면서도 방금 언급한 모습과는 또 다른 다윗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다윗은 남의 뒤를 봐주고 돈을 뜯어 가는 불량스러운 무리들과 결국 같은 위치에 있는 처량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자기의 수하들 앞에서 나발에게 당한 모욕과 그 동안 나발의 종들을 위해 애써 준 대가가 허사로 돌아오자 명예를 되찾고 앙갚음하기 위한 선택을 한다. 그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히기 위해 400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나발에게로 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 바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다.

3. 다윗과 아비가일(삼상 25:14∼35)
저자는 여기에서 나발의 소년의 입을 빌려 다윗이 실제로 자신들을 선대하고 보호하였으며, 오히려 자신의 주인인 나발을 불량한 사람으로 표출하고, 다윗은 의로운 사람으로 묘사한다(25:14∼17). 이제 나발의 소년이, 다윗이 그의 수하들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전하자 여기에서부터 아비가일의 활약상이 전개된다. 그녀는 본문에서 자세히 기록된 대로 상당한 양의 식량을 준비하여 앞서 보내고, 자신도 곧 뒤따라 가다가 다윗의 무리들을 만나게 된다.

저자는 이 순간에 다윗의 맹세를 기록함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25:21, 22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에서 나발의 ‘악으로 선을 갚는’ 행위는 사무엘상 24:17에서 사울의 다윗을 향한 행동과 동일하며, 다윗과는 대조를 이룬다: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계속적으로 성경은 다윗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나발과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를 죽이러 가는 다윗의 모습은 그러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을 또한 보여 주고 있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보자마자 최대의 예우를 갖추고(25:23, “다윗의 발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고”, 반복적으로 다윗을 ‘내 주’로 호칭함), 그녀의 길고도, 지혜롭고도, 설득력 있는 언변을 토한다(25:23∼31). 그녀의 스피치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아비가일은 남편의 죄를 자신의 것으로 돌리고, 나발의 행동에 대해서는 관심을 둘 만한 가치가 없음을 지적한다. 그의 이름대로 그는 ‘미련한 자’일 뿐이라는 것이다(25:25). 이 한마디로 사실 나발이라는 자는 이 사건에서 이미 관심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제는 나발과 다윗이 아닌 아비가일과 다윗의 문제임에 초점을 맞춘다.

둘째, 아비가일은 여기에서 중요한 신학적 관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녀를 사용하여 다윗이 자신의 손으로 피를 흘려 보수하는 것을 막으셨다는 것이다(25:26). 즉, 원수 갚는 것은 다윗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삼상 25:26). 결국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망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다윗이 그에게 손을 대지 않아도 나발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자초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는 자들’은 아비가일의 경우에는 자신의 남편을 일컫고 있지만, 결국 사무엘 상의 전체 문맥 속에서는 다윗의 원수들 전체를 일컫고 있다. 또한, 이것은 삼상 26장에 나오는 사울을 빗대고 있다. 다윗은 26장에서 사울의 생명을 건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며(26:10, 11),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자세를 보인다(26:24). 사울 자신도 이러한 다윗을 보며 본인이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고백한다(26:21). 그렇기 때문에 나발 사건을 통하여 저자는 사울도 어리석은 자이며, 그런 자들은 모두 나발의 운명과 같을 것이라는 것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아비가일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의 왕권을 인정하며,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고백을 한다(25:27∼31).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울 것’이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으며, 그러므로 다윗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라는 놀라운 결론을 맺는다. 사실 아비가일의 이러한 발언은 다윗 스토리 전체 주제와 맥락을 같이하는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된 종은 후에 왕으로 세움을 받았을 때에 후회하거나 흠집이 될 만한 일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나발 같은 자를 상대로 불미스러운 전적을 남길 가치는 더더욱 없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호와께서 다윗을 후대할 때에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여기에서는 분명히 모르지만 이 말의 열매는 곧 맺히게 된다(25:40).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아비가일을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녀의 지혜를 칭찬하고, 그녀에게 복을 빌어 주면서(세 가지- 하나님, 그녀의 지혜, 그녀 자신- 축복을 빈다.) 그녀를 평안히 돌려보낸다(25:32∼35).

4. 나발과 하나님(삼상 25:36∼39a)
아비가일이 돌아가 다음날 술에서 깬 나발에게 모든 자초지종을 밝히자 그는 충격을 받고(왜 그랬는지는 저자가 밝히고 있지 않다),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죽게 된다. 여기서 강조점은 아비가일의 말대로 다윗이 하려고 했던 일이 하나님의 영역임을 깨닫고 물러났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점이다. 이 사건을 들은 다윗은 “나발에게 당한 나의 욕을 신설하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찌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25:39)라며 나발의 죽음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5. 해피 엔딩(삼상 25:39b∼42)
나발이 죽자 다윗은 곧바로 정중히 아비가일에게 청혼하고, 그녀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어떻게 고상한 인격의 두 사람이 남편이 죽자마자 그럴 수 있는가 라고 용납하기가 힘들 테지만, 성경은 그런 우리의 심기와 관계없이 ‘미모와 지혜’의 여인을 맞이한 다윗과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미남자요(‘아름답더라’, 삼상 16:12, 아비가일에게 쓴 것과 같은 단어를 쓰고 있음), 지혜로운 충고를 들을 줄 아는 남편을 맞이한 아비가일의 만남을 해피 엔딩으로 마친다.

ii.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나발이 주는 교훈. 나발은 전형적으로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영적으로 철저히 무감각한 자이다. 본인은 ‘왕의 잔치 같은 잔치를 배설하고’(25:36),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진정한 왕을 거부하고 있다. 아니 거부하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그의 하인들도, 그의 아내조차도 그를 가치 없는 인간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25:17, 25). 다른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그는 ‘선을 악으로 갚는다’(25:21)는 평판을 듣고 있다. ‘이러한 질 낮은 인간이 되지 말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모욕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살기 위해 날마다 고민하며, 그렇지 못할 때에 죄의식도 느껴가며 저마다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나발에게서 보아야 하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요소들이 우리 안에도 ‘죄성’이라는 용어로 꿈틀거리며 날마다 고갯짓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벌들’을 괜히 미워하면서도 ‘재벌같이 살고 싶은’ 욕구들,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해 통회하면서도 막상 사회에서는 조금도 손해 안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들, 신약에서는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했는데, 그것은커녕 누군가 나에게 억울하게 하지는 않을까 긴장하여 방어벽을 쌓는 모습들, 가족들에게 존경 받기보다는 함부로 대하는 일상의 삶들, 아내의 눈물과 탄식도 무시한 채 돈 벌기 위해 희생하는 자신을 알아주지도 못하는, 사회 생활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한 아내라는 은연 중의 메시지를 남기며, 본인은 성화를 낼 모든 권리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당당히 출근하는 남편들, 남에게 해도 끼치지 않지만 평생 남 한번 도와 줄 줄 모르는 꽁생원 기독교인들 등. 우리 모두에게는 이러한 유치한 면들이 있음을 기억하며 나발이라는 별명이 붙지 않도록 기도하며 살아야겠다.

둘째, 아비가일이 주는 교훈. 현재 한국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관심사 중의 하나는 성형과 다이어트다. 유능한 의과생들이 성형외과를 지망하느라 바쁘다고 하는데, 그만큼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로 가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잠언 11:22에 보면,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으니”라고 되어 있다. 원어에 보면 ‘삼가지 않는다’는 뜻은 삼상 25:33에 나오는 ‘지혜’와 같은 단어로서 ‘지혜로운 판단력’이 원어의 뜻에 가깝다. ‘지혜 없는 아름다운 여인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다’는 표현은 아름다운 여인이 돼지에 비유된 것이 아니라, 미모는 있으나 지혜로운 판단력이 없는 여인들은 돼지 코에 금 고리를 걸어놓은 것처럼 우스운 모양새라는 뜻이다. 그것처럼 희극적인 것도 없다는 뜻이다.

아비가일의 지혜는 영적인 것을 분별할 줄 아는 판단력에서 나왔다. 그녀는 마치 사무엘상을 읽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기름 부은 종 다윗에 대한 계획을 인정하고,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질을 알아볼 줄 아는 판단력을 지녔다. 또한 그녀는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과 인간의 책임 영역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아는 성숙도를 지녔다. 아비가일이 아니었더라면 다윗은 후에 다윗에게 치명적인 오류가 된 우리아와 밧세바 사건(삼하 11, 12장)의 전철을 왕이 되기도 전에 밟을 뻔했다. 나발을 죽이고, 그 아내를 차지하는 살인과 불륜을 저지르는 찰나에 그것을 막아 준 여인이 아비가일이었다. 하나님의 종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사자 역할을 한 것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외모에 신경 쓰는 시류에 영향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겠지만, 우리 모두는 영적인 분별력과 거기에서 나오는 지혜로운 판단을 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 때가 악하며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들은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돼지 코에 금고리’ 같은 우스운 꼴의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셋째, 다윗이 주는 교훈. 다윗 자체가 굉장한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다 말하기는 어렵고, 이 스토리에 나타난 한 면만 강조하고자 한다. 그것은 지혜로운 충고를 들을 줄 아는 그의 인격이다. 사울은 그 반대의 인물로 등장한다(삼상 22:14, 15). 후에도 다윗은 나단의 뼈 아픈 충고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지혜로운 판단을 하는 자들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지혜로운 자들의 충고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다. 설혹 그 충고가 아내, 혹은 자녀들, 또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올지라도 말이다.
 
김윤희 박사는 미국 트리니티신학대학원에서 신약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싱가폴 동아시아신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명쾌한 논리와 언변으로 기독교방송(cbs)의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구글+
기사입력: 2003/04/23 [17:33]  최종편집: ⓒ newspower
 
뉴스
인기기사 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개인정보취급방침회사소개후원 및 광고 만드는사람들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136-5) 본관 107호 TEL 02-391-4945~6| FAX 02-391-4947,
Copyright2003-2018뉴스파워. all right reserved. mail to newspower@newspower.co.kr 등록번호 서울 아 00122 등록일 2005.11.11 발행 및 편집인 김철영. 청소년보호책임자:김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