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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09.23 [07:03]
김이수 헌재소장 후보자 “군영 내 동성애 행위 처벌되어야”
“군대 내 동성애 옹호 주장은 사실과 달라”
 
김철영

   

김이수 헌재소장 후보자는 동성 군인 간 군영 내 음란한 행위는 처벌되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히 했다.”며 자신이 군대 내 동성애 옹호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

▲ 김이수 헌법재판소 소장 후보자     © 헌법재판소 홈페이지

 

 

김 후보자는헌재 2016. 7. 28. 2012헌바258: 구 군형법 제92조의5-” 판결과 관련 명확성 원칙에 반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며 계간이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을 처벌하는 위 규정이 행위의 구체적 기준을 규정하지 아니한 채 그 밖의 추행이라는 포괄적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어떤 행위가, 누구와 누구의 행위가, 그리고 언제, 어디서의 행위가 처벌받는 행위인지 수범자로 하여금 예측할 수 없도록 하여 헌법상 명확성 원칙에 반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자신의 견해는 결코 동성애에 관한 찬반 논의가 아니라고 밝혔다.

 

그는 특히 동성 군인 간 군영 내 음란한 행위는 처벌되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히 했다.”소수의견에서도 동성 군인 간 군영 내 음란한 행위는 처벌되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헌법재판회의참석을 위해 리투아니아로 가는 도중 11일 새벽에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잠시 경유하면서 SNS로 김철영 목사(세계성시화운동본부/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에게 입장을 알려온 김 후보자는 우선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서 관련 결정문 전문을 읽어볼 것을 권했다

 

김 후보자는 참고로 이 사건은 선임병이 후임병을 추행한 사안으로 그 심판대상 조항은 구 군형법 제92조의5그 밖의 추행부분이므로, 사회적으로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군대 내에서의 동성애(‘계간’, sodomy)에 대한 형사처벌의 위헌성 문제를 다룬 사안은 아니다.”고 밝혔다.
  

한편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는 현재 평신도 공동체인 새길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금년 새길교회는 11일부터 서울 오산고등학교 소월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한완상 장로(전 통일부총리), 이만열 장로(전 국사편찬위원장), 민영진 목사(전 한국성서공회 총무) 등과 함께 설교자로 참여하고 있다.

 

김 후보자는 한국 장로교 정통보수신학을 지킨 고 정규오 목사(광주중앙교회 담임목사 역임)의 막내 사위이기도 하다. 고 정규오 목사는 예장합동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조선신학교 재학 당시 송창근, 김재준 교수가 자유주의신학을 가르친다며 당시 한완석, 박창환, 조동진 목사를 비롯한 51인 학생들과 함께 신앙동지회를 구성하여 보수신학 수호운동을 벌였으며, 장로회신학교 1회로 졸업해 한국 장로교의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지켜온 인물이다.

김 후보자는
광신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는 정규남 박사(구약학자)와는 동서지간이다.

 

다음은 지난해 102일 주일예배 때 행한 김 후보자의 설교문 전문이다.

욥의 고난과 세 친구

(욥기 2:11-13, 6:2-4, 42:7)

2016102일 주일예배

김이수 형제(헌법재판관)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은, 욥이 이 모든 재앙을 만나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욥을 달래고 위로하려고, 저마다 집을 떠나서 욥에게로 왔다. 그들이 멀리서 욥을 보았으나, 그가 욥인 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한참 뒤에야 그가 바로 욥인 줄을 알고,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으면서도,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도 처참하여, 입을 열어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 욥기 211~13-

[, 내가 겪은 고난을 모두 저울에 달아 볼 수 있고, 내가 당하는 고통을 모두 저울에 올릴 수 있다면, 틀림없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니, 내 말이 거칠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과녁으로 삼고 화살을 쏘시니, 내 영혼이 그 독을 빤다. 하나님이 나를 몰아치셔서 나를 두렵게 하신다.]

- 욥기 62~4-

 

[주님께서는 욥에게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분노한 것은,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욥기 427-

 

욥기는 족장시대(BC 1800-1500년대)의 저작입니다. 욥기의 작자는 엘리후가 썼다는 설도 있지만 미상입니다. 욥기는 고통과 고난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최초의 책입니다. 인간 지성의 가장 위대한 걸작품이라고 빅토르 위고는 말했습니다. 욥기는 모두 4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 시가이고 초반부와 종반부만 산문체로 되어 있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욥은 흠이 없고 정직하며,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욥기1:1) 그는 큰 부자로 많은 자선활동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순회재판관으로서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였으며, 지역의 원로로서 지역의 현안에 관하여 의견을 내는 사람이었습니다.(29) 고난 받는 사람을 보면 함께 울고, 궁핍한 사람을 보면 함께 마음 아파하였습니다.(30:25)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다른 족속의 약탈로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강풍이 불어와 큰아들집이 무너져 거기서 파티를 하고 있던 10명의 아들, 딸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이번에는 욥의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악성종기가 생기는 재앙을 당합니다.(1:13-19) 그러자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던 자들까지 욥을 조롱합니다.(30:1-14)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경험합니다. 고통의 경험은 인간의 보편적인 조건입니다. 정대현 형제는 최근에 발간한 [한국현대철학]에서 인간 조건으로 고통을 맨 먼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의 고통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손봉호 교수는 [고통받는 인간]이란 저서에서 고통이 인간의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경험임을 강조하면서 나는 아파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Dolero ergo sum)"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모든 종교들의 핵심주제도 고통입니다. 불교에서는 생노병사, 즉 삶 자체가 고통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삶에서 고통만큼 심각하고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고통은 자신의 부주의나 잘못으로 초래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가해집니다. 그리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제도, 구조, 법률, 집단, 공권력 등 비인격적인 힘이 고통을 가하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비인격적 힘이 가져다주는 고통은 인격체들이 가할 수 있는 악보다 파괴적입니다. 이러한 힘이 가해질 때에는 때로는 진상(사안의 진실)을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때로는 사안의 진상이 은폐되기도 합니다. 항의와 분노의 대상이 분명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고통은 그만큼 더 커집니다. 고통이 의도적으로 가해진 것이 아니어서 설령 비인격적 세력에 구조를 형성한 책임은 없더라도 적어도 구조를 정의롭게 바꿀 책임은 있습니다.

 

고통은 부정적 경험이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이에서 해방되기를 바랍니다. 고통을 극복하기를 희망합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통상 인간으로 하여금 반성적 사유를 못하게 하고 동물적 존재로 떨어지는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말이나 비명, 신음, 눈물 등으로 더욱 강하게 자신을 표현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를 갖게 되고, 필요한 행동을 요청합니다. 고통에 대한 항의이며, 고통의 감소나 제거를 바라는 호소입니다  

 

욥은 아무런 죄가 없는 자신이 위와 같은 고통을 당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므로(10:7,10:23) 그 고통이 너무 크다고 호소합니다.(6:2-4) 자신의 무죄를 하나님께 끈질기게 호소하면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애타게 정의를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을 비난합니다.(30:20) 그리고 그 호소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이제는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시는 대답을 듣고 싶다.”(31:35) “나는 내가 한 모든 일을 그분께 낱낱이 말씀드리고 나서 그분 앞에 떳떳이 서겠다.”(31:37)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함께 울고 슬퍼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맹자는 인간의 근본 본성 네 가지(사단)중 하나로 측은지심을 들고 있습니다. 그는 측은지심 인지단야(惻隱之心 仁之端也), 무측은지심 비인야(無惻隱之心 非人也), 즉 어려운 상황을 만난 사람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면 인간에게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호소에 응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간이 윤리적 주체라면 타자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공감하는 윤리적 의무와 책임이 부과됩니다. 칸트는 이 윤리적 의무는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심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레비나스는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에 영향을 받고 상처받아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수동적 감수성에 토대하여 윤리적 책임을 도출합니다. 고통을 겪는 타인이 나의 도움을 요구할 때 타인의 짐은 나의 짐이 되고, 내가 응답할 때 나는 타인의 고통을 대신하는 대고적(대속적) 주체가 됩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여 그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하는 윤리적 원천은 바로 고통 받는 사람의 처지가 되어 사고하고 상상하고 얼마나 힘들까하고 느낄 수 있는 반성적 역지사지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능력이 없으면 자신의 행위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독일의 유대인이주국 책임자로서 유대인 학살명령에 관여한 아이히만의 재판을 1961년 예수살렘 법정에서 방청하였습니다. 잘못된 지도자의 명령, 히틀러의 명령에 대한 복종을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절대적 의무로 생각한 아이히만은 그 반성적 사유능력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는 말합니다.

 

욥의 친구 세 사람(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욥의 처참한 소식을 듣고 멀리서 함께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위로자) 욥의 모습을 보고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 썼습니다. 이는 슬픔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방식입니다. 그들은 욥의 고통이 너무 처참하여 입을 열 수가 없었으므로 이레동안 침묵합니다. 이 침묵은 욥의 고통을 기꺼이 함께 겪는 것이며 그와 동행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침묵의 공감이 최선이었습니다.(2:11-13)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드디어 침묵을 깨고 욥이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게 된 자신의 처지를 탄식합니다. 이유 없이 억울하게 고통을 받고 있다고 호소합니다. 욥은 고통을 호소하면서 세 친구들로부터 위로의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친구들이 증인이 되어 주고 변호인이 되어 주고 중재자(중보자)가 되어주길 바랐습니다.(16:19-21) 그리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무죄를 변론해주길 소망했습니다.

 

세 친구들은 침묵의 공감으로 욥을 고통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이 고통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님을, 자신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발언을 계속 강하게 주장하자, 세 친구들은 드러나지 않은 어떤 죄, 구체적 내용이 없는 막연한 죄 때문에 욥이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취지의 답변을 합니다.(4:8, 22:4-5) 심지어 욥에게 내리시는 벌이 욥의 죄보다 가볍고(11:6), 욥의 자식들의 죽음은 자식들의 죄 때문이라고(8:4) 발언의 강도를 높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고통과 죄악을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통은 죄나 악행에 대한 벌이고 원칙적으로 죄를 범한 자신이 책임에 맞는 죄 값을 치러야 하는 것으로요. 그러나 모든 고통이 죄의 결과는 아닐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인은 벌(고통)을 받지만 벌을 받는다고 하여 다 악인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9:3)에서 날 때부터 눈멀게 태어난 것(고통)이 그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 친구들은 욥의 처지가 되어 생각하지 않고(12:5) 무죄라는 욥의 주장을 경청, 공감하지 않았습니다. 욥에게 말이 많다고 짜증을 내었습니다.(8:1) 공감 없는 진부한 훈계(하나님은 죄 없는 자를 처벌하지 아니한다, 죄인이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로 친구들은 더 이상 욥을 위로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욥으로 하여금 배신감을 느끼게 하고, ‘빈말로 위로하는 자’(21:34)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세 친구들이 욥에게 한 발언이 어리석었다고 평가합니다.(42:7-8)

 

하나님이 전능하고, 공의로운 인격적 신이라면 그런 자비로운 신이 왜 욥에게 참혹하고, 비합리적이고, 불공정한 고통을 허락하는 것일까요? 욥은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고난의 과정에서 한 욥의 발언이 죄가 되는지, 그 죄 때문에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 그 죄를 회개하지 않아 고통을 못 벗어난 것인지를 따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아무 죄가 없음을 알고서도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세상은 창조자의 절대적 주권 하에 있지만 그중에는 악한 힘도 있습니다. 사탄은 악한 힘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릴 때 악(사탄)을 활용하기도 합니다.(고린도후서 12:7) 다만 사탄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욥기 1:12, 2:6, 38:10)

 

과연 욥이 하나님을 외면하지 않고 욥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가해진 고통의 시험을 이겨낸 것인가요? 하늘에서 벌어진 일을 욥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욥에게는 청천벽력의 고통이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욥이 몇 달 동안 고난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판결이 잘못되었다,(9:22, 31: 5-6) 하나님이 자신의 호소와 기도에 대하여 응답을 하지 않고 있다(30:20)는 취지로 하나님을 비난했습니다.

 

4의 인물인 젊은 예언자 엘리후는 하나님은 양심의 소리나 고난을 통하여 이미 응답을 하고 있는데 욥이 못 듣고 있을 뿐이다.(33:14-16) 판결 비난에 대해서는 욥이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독한 것이고(34:7, 34:37) 이는 교만한 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에 관하여 한 말이 옳다고 하셨습니다.(42:7) 하나님이 옳다고 한 것은 고난과정에서의 욥의 모든 발언이 모두 옳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그렇다고 엘리후의 위와 같은 정죄가 틀리다는 것도 아니다.)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내 판결을 비난하려느냐?(38:2, 40:2, 40:8)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 내용과 주님의 능력과 지혜를 깨닫지 못하고 함부로 말하였다는 내용의 욥의 고백에 비추어 그렇습니다.

 

그리고 욥은 티끌과 잿더미위에 앉아 처음으로 회개합니다. (42:6) 회개하는 것은 자신의 주제넘음, 교만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겸손하게 머리를 숙여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고통당하기 전의 죄가 있어 이를 회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회개 후 하나님은 위와 같이 욥의 말이 옳다고 하시고 욥을 내 종이라고 부르십니다.(42:7) 시험 전 부르던 칭호인 내 종’(1:8, 2:3)을 다시 사용하십니다. 욥이 하나님과 바른 인격적 관계에 있다는 것을 승인하는 선언이고, 욥의 문제제기 즉 고난을 당할 죄가 없었다는 주장이 옳았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고통은 본래 부정적 경험이지만 신약시대에는 인류전체가 받아야할 벌(고통)을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받음으로 고통이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통이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고통이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경우에는 고통을 감수하기도 합니다.(능동적 수동성) 종교의 순교자나 수도자들이나,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은 사람들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의미 있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신약성경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5:4),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5:10),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벧전3:14)라고 합니다. 여기서 복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복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웃의 고통을 함께 하면서 이웃과 더불어 연대를 하는 공간을 구성하게 되고, 이 연대는 하나님나라로 향하는 거룩한 연대입니다.

 

고통은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긍정적인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고통은 신앙을 더욱 굳건하고 강인하게 훈련시킵니다. 이에 대해서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는 로마서 53절 등 성경에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 고통은 비정상적인 상황을 인식하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몸에 이상이 있으면 그 사실을 경고하여 이를 고치게 하듯이, 정신적인 삶이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에 자리 잡은 교만을 드러내어 고치게 합니다.(33:19)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오랫동안 답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욥을 대하고서도 직접적으로 답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욥에게 질문만 던집니다.(38:41참조) 그러나 욥은 희망을 점점 잃어가고 믿음이 약화되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무죄를 치열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붙들었고 드디어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으며 결국 하나님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긴급한 부르짖음에 침묵하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며, 그 분의 고통을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욥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병치해보는 일은 어떨까요? 욥이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궁극적 고난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음으로서 욥의 고난의 의미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만이 이 땅의 욥에게 위로를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마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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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9/11 [14:59]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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