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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08.18 [07:52]
CCC 대학생 여름수련회 발자취를 좇아
그 여름, 은혜의 바람이 분다
 
정희수
▲ 2016년 CCC 전국 대학생 여름수련회     ©정희수

 

CCC 전국 대학생 여름수련회를 통하여 학생들이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자신들의 비전을 발견할 수 있도록 수련회 전체진행을 원활하게 하는데 있다.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이 뱃속의 아기가 다시 태어나듯이, 사형수가 풀려나듯이, 깡마른 샘 바닥에 생수가 터져 나오듯이 예전에 해마다 여름수련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여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벅찬 삶의 전환으로 가득하다.

 

CCC여름수련회는 크게 ‘입석시대’(1962~1974), ‘심천시대’(1977~1986), ‘송호리 시대’(1987~1990), ‘몽산포시대’(1991~1999)로 구분한다. 물론 그 기간 동안 수련회를 꼭 그 장소에서만 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게 부른다. 그리고 그 시대마다 특징이 있었다. 40여 회의 여름수련회가 지난 지금, 과거 수련회 역사의 현장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입석시대’(1962~1974)

 

▲ 입석수련회     ©정희수

한국CCC 여름수련회의 태동은 입석에서 이루어졌다. <순론노트>에 나오듯이 CCC학생들은 믿지 않는 친구들을 수련회에 초청해서 “주여 내 친구를 구원해 주옵소서. 내 생명을 취하시더라도 꼭 구원해 주옵소서.” 라며 생명을 건 기도를 드렸다. 그 결과 300~650명의 영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께 나아오는 사도행전의 역사가 일어났다. 구원과 헌신의 이 감격적인 현장은 민족복음화와 캠퍼스 복음화의 출발선이 되었다.

 

입석수양회는 초기 CCC가 급격히 성장하는 원동력이었다. “입석”이라는 곳은 CCC의 성지요 다락방과 같은 곳이었다. 입석은 CCC형제·자매들의 영적 고향과도 같다. 여기서 수많은 학생들이 살아계신 주님을 참으로 만났고 신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고백들이 수없이 쏟아졌다. 그 때 그 당시 대학생이면 너나할 것 없이 가장 가난했고 그 시절에 수양회에 참석하기 위해 헌 책과 옷가지를 팔고 혹은 노동을 해서 여비를 만들었다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심천시대’(1977~1986)

 

▲ 심천수련회     ©정희수

 

CCC 역사의 전설처럼 들려오는 심천수련회가 이 시대에 속한다. 10인용 천막을 치고 그곳에서 생활하고 낮에는 강의장으로 사용했다. 350명의 순장들이 300명의 불신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2명만 빼고 모두 예수님을 영접한 일화는 1966년 입석수련회를 대표하는 일화이다.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1978년에도 4,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573명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전해진다. 이 시대는 무엇보다도 수련회를 통해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생생한 간증이 주를 이루고 있다.

 

심천수련회는 1977년부터 시작되었다. 복음성가 <가서 제자 삼으라>의 2절에 나오는 ‘미루나무 우거진 숲속에서’는 심천수련회 장소인 미루나무 섬이 배경이다. 당시에는 7월말에 수련회가 열렸기에 선발대가 들어가 작업할 때는 장마로 인해서 떠내려가기 직전에 나무에 올라가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집회 전까지 계속된 비로 인해 수백 가마의 쌀과 부식, 그리고 시설물을 일일이 간사들과 학생들 이 등에 지고 거센 물살을 헤쳐 건너기도 했다.

 

특히 심천수련회의 백미는 밤 집회였다. 강변 백사장에서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불빛 하나 없는 가운데 반짝반짝 쏟아지는 별빛 아래서 원고도 없이 불을 뿜는 김준곤 목사님의 설교가 심령을 파헤쳤다. 뒤집어지고, 울고, 회개하고 헌신하고…. 세상에 그런 집회는 다시없을 것이라고 당시 참석했던 선배들이 전한다.

 

‘송호리시대’(1987~1990)

▲ 송호리수련회     ©정희수

1987년부터 영동 송호리 캠프장에서 열렸다. 이 시기에 수련회에는 5천 명에서 1만 명이 대거 운집하여 함께 ‘가서 제자 삼으라’를 목청껏 찬양하며 개인과 가정, 그리고 캠퍼스와 민족과 세계를 품고 밤새워 기도했다. 이때부터 개인 텐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때 대학 재학 중이었던 형제·자매들은 아직도 그 감격을 잊지 못한다. 김준곤 목사의 초청메시지가 시작될 때부터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더니 소나기가 퍼부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자리를 뜨지 않고 자기만의 싸움을 치러 내며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영접하는 결단을 갔다. 1,000여 명 이상이 인생의 BC와 AD의 선을 그었다.

 

‘몽산포시대’(1991~1999)

 

▲ 몽산포수련회     ©정희수

CCC 전국대학생여름수련회는 입석, 심천 미루나무 섬, 영동 송호리 캠프장을 거쳐 1991년부터는 몽산포 해수욕장에서 열렸다. 모두 여섯 차례의 여름수련회가 개최된 몽산포는 젊은 크리스천들의 ‘예수한국’을 꿈꾸는 영적 수련장으로 통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 선교의 문이 열리기 전에 몽산포 앞바다에 들어가 서해 건너 중국을 바라보며 기도했던 일이 모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놀라운 것은 그 사이에 중국 선교의 문이 열렸다.

 

1992년 수련회는 ‘예수한국, 성령 충만’을 주제로 열렸다. 해마다 비바람과 한판 승부(?)를 펼치기도 했다. “비에 젖은 밥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광야수련회 특유의 자부심 섞인 추억이 가득했다. 비를 맞아가며 양손에는 신발과 성경책을 들고 선 채로 메시지를 듣고, 빗물에 말은 밥을 먹어야 하고, 비에 젖은 텐트 안에서 추위에 떨며 잠을 자기도 했다.

 

‘콘도시대’(2000~ )

 

▲ 콘도수련회     ©정희수

1997년 고성의 바람, 1998년 몽산포의 비, 1999년 인천에서의 비로 3년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하여 많은 고민 끝에 달라진 시대를 반영해서 2000년에 드디어 콘도시대가 열게 된 것이다. (그때를 추억하는 사람들은 ‘97학번을 위로하는 수련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홍천 대명콘도를 시작으로 횡성 현대성우리조트, 부산 벡스코(CM2007대회)와 제주도(LOVE JEJU)에 이어 2009년부터는 평창 한화 휘닉스 파크에서 수련회가 열리고 있다.

 

처음 콘도로 수련회를 갔을 때 화장실이 수세식이라는 것만으로도 다들 감격했다. “천국 같다.”, “CCC가 이런 곳에서 수련회를 하다니 꿈만 같다.”는 말이 당시의 순장들의 심정을 잘 표현한다. 물론 여전히 어려움은 있다. 13층까지는 걸어서 올라가야 하고, 15~25명이 한 숙소에서 같이 생활해야 한다. 하지만 환경은 어려웠어도 우리는 늘 감사했고, 그것이 우리를 더 강인하게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광야세대’들에게는 부러움과 아쉬움이 되었다. 그 동안 입석과 심천, 송호리, 몽산포로 이어지면서 CCC사역의 한 해 결산처럼, 축제처럼 여름수련회를 해왔다. 수많은 선배들이 CCC 대학생 여름수련회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났고, 인생의 큰 변화를 경험했다. 무엇보다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간증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올해는 또 어떤 역사가 기록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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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6/13 [15:44]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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