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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0.14 [10:01]
예수와 석가모니 (5)
초기불교 사상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
 
정성민

 다섯 번째 담론

과연 석가모니가 말하는 열반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열반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신앙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열반이라는 용어는 너무나 생소하여 그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단하고 명료하게 정의한다면, 열반은 번뇌와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심리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근심과 불안, 번뇌와 괴로움의 연속인데, 어쩌면 열반은 이러한 현실적인 고통에서 정신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열반은 어쩌면 구원이라는 기독교적인 용어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사성제의 세 번째 원리인 괴로움을 없앨 수 있는 거룩한 진리, 즉 열반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이야기에서는 괴로움을 없애기 위하여 괴로움의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이기적인 탐욕이나 갈애, 즉 갈망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열반은 바로 갈애의 종식이라 말할 수 있다. 이를 쉽게 설명한다면, 현실세계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무병장수하고 싶어 하는 간절한 소망과 또한 우리가 사후세계를 통해서라도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간절한 욕구에서 우리의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바로 열반인 것이다. (라훌라,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75)

 

그러므로 열반은 해탈이라는 용어와 동의어라고 볼 수 있는데, 해탈은 속세의 속박과 번뇌 그리고 그로인한 고통에서부터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해탈은 현세적인 삶에서 겪게 되는 그 모든 번뇌와 괴로움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마음에 도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열반에 관한 석가모니의 생각은 빠알리대장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된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

(Ibid, 77에서 간접인용)

 

결국 열반은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갈애, 즉 간절한 욕망이나 욕심을 부수어버리거나 그 뿌리를 완전히 뽑아버리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우리가 부귀영화나 무병장수를 누리고자 하는 현세적인 욕망과 더불어 사후에도 영원히 존속하고자 하는 내세적인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근심케 하고 번뇌케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욕망이나 욕구를 없애버리는 것이 마음이 평안해지는 최상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행승이여, 조건적이든 무조건적이든 욕망을 여의는 것이 최상이다. 그것이 자만의 분쇄이며, 갈증의 파괴이며, 집착의 뿌리를 뽑음이며, 윤회의 자름이며,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이다.”(Ibid에서 간접인용)

 

결국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삶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번뇌와 고통으로 가득 찬 이생의 삶을 평안과 기쁨의 삶으로 바꾸는 유일한 길은 바로 우리 안에 내재하는 이기적인 탐욕이나 갈애를 파괴해버리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탐욕과 갈애를 진정으로 몰아낸다면 그 때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오는데, 이러한 상태를 바로 열반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라다여, 갈애가 부수어진 것이 열반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Ibid.)

 

그러므로 석가모니가 말하는 열반은 내세적인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지극히 현세적인 체험이라고 볼 수 있다. 석가모니는 열반이라는 신비한 체험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다.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고, 공간이 무한한 경지도 없고, 의식이 무한한 경지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경지도 없고, 지각하지도 않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도 없고,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고, 해도 달도 없다. 나는 바로 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멈추는 것도 없고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기반도 없고 유전도 없고 대상도 없는 이것이야말로 나는 괴로움의 종식이라 부른다.” (Ibid, 79에서 간접인용)

 

어쩌면 열반에 대한 석가모니의 이러한 표현은 우리가 죽어서야 경험할 수 있는 내세적인 체험으로 오해되어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사는 동안에 체험할 수 있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석가모니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번뇌와 고통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이러한 현재적인 자유와 해방의 체험이 바로 해탈이요 열반인 것이다.

 

하지만 힌두교나 기독교적인 전통 속에서 이해한다면, 석가모니가 말하는 열반의 체험은 마치 사후세계에서나 가능한 현상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의 모습과도 매우 흡사하기에 때문에 그렇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요한계시록 21:1-7)

 

여기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천국의 모습과 석가모니가 말하는 열반의 모습이 거의 동일한 장소이거나 현상으로서 느껴질 수 있는데, 이는 천국과 열반(극락)을 표현하는 언어적인 묘사들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천국과 열반이 우리 일반인들에게 유사하게 보이는 그 구체적인 이유를 살펴본다면,

첫째는 천국이나 열반을 기술하는데 있어서 부정적인 묘사를 통해서 천국이나 열반의 존재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는 석가모니가 열반을 “땅도 물도 바람도 공간도 죽음도 다시 태어남”도 없는 상태나 장소로 표현하였는데, 요한계시록에서도 사도 요한이 “천국은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곳”으로 표현한 것과 일맥상통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석가모니가 말하는 열반이나 극락의 체험은 전혀 내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즉, 석가모니가 강조하는 열반의 체험은 진정으로 현세적인 것이다. 지금 내가 이 땅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평안하고 행복한 체험이 바로 열반인 것이다.

사실 기독교 신앙에서도 우리가 이생을 살아가면서 천국과도 같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를 현재적 천국이라고 말하는데, 어쩌면 기독교가 말하는 현재적 천국이 바로 열반의 체험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성경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체험할 수 있는 현재적 천국의 삶을 이렇게 기록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 3:17)

 

결과적으로 성경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그 모든 번뇌와 근심에서 자유로워지는 하늘의 평안을 체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현재적인 천국의 체험과 석가모니가 말하는 열반, 곧 현재적인 극락의 체험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성경이 말하는 현재적 천국체험과 석가모니가 말하는 현재적인 극락체험은 매우 유사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체험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 모든 세상적인 근심과 불안, 즉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평안하고, 기쁘고, 행복한 마음을 지금 이 시간,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는 기독교와 불교의 천국체험이 비슷하게 보일 수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주장하는 현재적인 천국은 하나의 신비하고도 초월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초월적인 영이 그를 믿고 따르는 각자의 영혼들에 임할 때에 경험하게 되는 하늘의 평안이나 기쁨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석가모니가 말하는 열반, 곧 극락체험은 전혀 신비하지도 초월적이지도 않다는 것인데, 이는 열반은 지극히 정신적이고 이성적인 체험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열반은 우리가 그 어떠한 절대적인 진리를 깨달았을 때에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심리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지각과 더불어 의식이 있는 이 육척단신의 몸속에서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나는 시설한다.” (Ibid, 87에서 간접인용)

 

결국에 번뇌와 고통의 발생과 소멸은 우리의 신체인 몸 안에서 발생되어진다는 것인데, 이는 번뇌와 고통의 생성이나 소멸이 외부적인 힘이나 요인들로 인하여 발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지를 벗어나 절대적인 진리를 깨닫는 것은 초월적인 존재가 임하여서 영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신체, 즉 우리의 “육척단신의 몸”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이 말은 곧 네 가지 거룩한 진리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인 우리 자신 속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것은 또한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을 낳는 외부적인 힘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따라서 지혜가 계발되고 배양되면 지혜는 있는 그대로의 삶의 비의와 사물의 실제를 보게 된다. 비의가 벗겨지고 진리가 보이게 되면 환상 속에서 열병처럼 윤회를 연출하던 모든 힘은 사라지고 더 이상 업은 형성되지 못한다. 더 이상 환상이나 윤회에 대한 갈망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질병의 원인을 발견해서 환자에게 보일 때에 치유되는 정신질환과 같다.” (Ibid, 87)

 

그러므로 기독교가 말하는 현재적인 천국개념과 석가모니가 말하는 열반의 체험은 거의 정반대적인 개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현재적인 천국체험은 신과 영혼을 전제로 하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현상이라는 것이고, 석가모니가 말하는 열반체험은 신과 영혼의 존재, 더 나아가 사후세계의 존재조차도 부정함과 동시에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직면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마음의 평정심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석가모니가 말하는 열반체험은 전혀 신비하거나 초월적이지도 않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정신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은 <맛지마니까야>라는 경전에서 석가모니가 자신의 제자 뿟꾸싸티에게 열반에 관해 설명한 내용이다,

 

“사람은 여섯 가지 요소, 곧 땅, 물, 불, 바람, 공간과 의식으로 이루어져있다. 그것들을 분석해보면 ‘내 것’, ‘나’, ‘자아’라는 것은 발견할 수 없다. 사람은 어떻게 의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어떻게 기쁘고 불쾌하고, 기쁘지도 불쾌하지도 않는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느낌을 알아채더라도 그의 마음이 초연하게 되면, 그는 자기의 내부에서 평정심을 발견한다. 그러면 그는 어떤 최고의 정신적인 상태의 성취로 향할 수 있어, 순수한 평정심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Ibid, 80-81에서 간접인용)

 

거듭 말하자면, 석가모니가 말하는 이러한 열반의 체험은 사후세계의 체험이 절대로 아니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죽었을 때에 열반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옳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은 후에는 우리가 지닌 그 모든 번뇌와 고통에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저절로 해방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석가모니가 사후세계를 전혀 믿지도 그리고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석가모니에게 있어서 열반에 들어간다는 표현이나 극락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전혀 타당하지 않고 옳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석가모니가 말하는 열반은 사후에 우리가 거하게 될 장소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과 동시에 우리가 그렇게 열망하던 열반이나 해탈, 곧 근심과 고통으로부터의 절대적인 자유는 자동적으로 얻어지는 것이기에 석가모니에게 있어서 사후세계는 전혀 걱정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사람들은 ‘붓다가 죽은 후에는 열반이나 완전한 열반에 든다.’라는 부적합한 표현을 하는데, 이것이 열반에 관한 많은 상상적인 관념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붓다가 열반에 들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에 사람들은 열반이 어떤 존재가 있는 상태나 영역, 또는 장소로 여기에 되거나 열반을 이미 알려져 있는 ‘존재’라는 단어와 연관시켜 생각하게 된다. ‘열반에 들었다’는 일반적인 표현은 원전과 일치하지 않는다. ‘죽은 후에 열반에 들었다.’는 말은 없다. ‘빠리니붓따’라는 말은 열반을 깨달은 붓다나 아라한의 죽음을 의미할 때에 사용하지만 ‘열반에 들어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빠리니붓따는 단순히 ‘완전히 소멸함’ ‘충분히 꺼짐’ ‘아주 없어짐’을 뜻한다. 왜냐하면 붓다나 아라한은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Ibid, 84-85)

 

이런 면에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다른 종교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거의 모든 종교들은 내세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즉 절대적인 진리나 최고의 선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석가모니가 가르치는 열반은 바로 이생에서, 즉 지금 이 시간, 바로 여기서 내가 경험하고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죽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Ibid, 87) 그래서 석가모니는 그 모든 번뇌와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최상의 지혜, 즉 최상의 거룩한 진리를 이생에서 깨우칠 것을 제자들에게 권고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은 최상의 지혜를 성취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앎은 가장 거룩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기반을 둔 이러한 해탈은 흔들리지 않는다. 수행승이여, 허망한 것은 거짓이고, 진실한 것은 열반이고 진리이다. 그러므로 수행승이여, 이러한 사람은 최상의 지혜를 성취한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한 것이 열반이라는 것은 곧 최상의 거룩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Ibid, 82에서 간접인용)

 

그렇다면 과연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그 거룩하고 절대적인 진리는 무엇일까? 석가모니가 깨달은 절대적인 진리란 “세상에서 절대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조건 지어져 있기에 인생은 무상하고, 더 나아가 자아와 영혼과 같은 불변하고 영원하며 절대적인 실체는 이 세상에는 전혀 없기에 우리의 인생은 더 더욱 무상하다는 사실”을 말한다.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83) 우리가 이러한 절대적인 진리를 깨달을 때 비로소 환상이나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신이 없다는 사실,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이라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 또한 영혼이 영원히 거하는 사후세계조차도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로 인한 인생무상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 바로 석가모니가 말하는 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근본적인 시작점인 것이다. (Ibid, 83.)

 

 

결과적으로 우리를 그 모든 번뇌와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거룩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모든 강박관념(유신론, 유아론, 사후세계의 존재)에서 벗어나게 됨과 동시에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또한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 순수하고 청정한 평정심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영원히 살고자하는 간절한 소망을 버리고 현실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열반의 삶에 관해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그는 유와 무를 정신적으로 창조하려고 하거나 의도하지 않는다. 그가 유와 무를 시설하거나 의도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세상의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열망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의 완전한 열반에 들어 완전한 평온에 머문다. 그는 “다시 태어남은 종식되었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안다. 그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을 체험했을 때에 그것들은 무상하여 자신을 속박시키지 못하며 감정을 자극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 느낌이 어떻든지 간에 그는 속박을 여윈 것을 체험한다. 모든 이런 느낌들은 기름이나 심지가 다하면 꺼지는 램프의 불꽃처럼, 육신의 해체와 함께 진정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자아투영이 없이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사물을 평가하고 향유한다. 깨달은 사람은 즐겁고 당당하고 깨끗한 삶을 즐기고, 자기능력에 만족하고 고뇌에서 벗어났으며 고요하고 평온하다. 그는 모든 이기적인 탐욕, 증오, 무지, 속임수, 교만을 비롯한 모든 더러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순수하고 부드러우며, 보편적인 사랑, 자비, 친절, 동정, 이해와 관용 등으로 가득 차있다. 자기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가 순수하다. 자아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있고 무엇인가 되려고 하는 탐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심지어 정신적인 것까지도- 소유하거나 축적하려 하지 않는다." (Ibid, 82, 88.)

 

우리가 주지해야 할 사실은 석가모니가 말하는 이러한 열반의 경지는 어쩌면 기독교가 말하는 현재적인 천국의 체험내지는 성화의 체험과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로 열반이나 성화는 모두다 내세적인 체험이 아니라 현세적이고 현재적인 체험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열반이나 성화는 자신이 지닌 내면의 탐욕이나 욕망을 벗어나서 거룩한 삶을 지향한다는 측면에서 유사하다. 사도바울 선생이나 기독교 초대교부 어거스틴, 종교개혁자 칼빈, 그리고 18세기 영국의 복음전도자 존 웨슬리와 같은 사람들이 모두 이 땅에서의 거룩한 삶을 강조하였는데, 우리는 이를 성화라고 부른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기독교인들이 죄를 벗어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로마서 6:12-13)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로마서 6:17-22)

 

그렇다. 열반이나 성화는 그 내용적인 측면에서 아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바로 내가 지금 이 생에서 나의 욕망이나 욕심을 벗어나서 그 모든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것이다. 이러한 죄와 욕망에서의 자유와 해방은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고 기쁜 삶을 누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열반과 성화가 무엇이 다른 것일까?

비록 열반과 성화가 지향점이 비슷할지라도 여러 가지 면에서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첫째로, 열반은 내 자신 스스로의 수행이나 도덕적인 노력으로 내안에 거하는 그 모든 이기적인 탐욕과 갈애를 제거하는 것이기에 열반은 ‘자력적이고 능동적인 구원’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거룩해지는 ‘타력적인 구원’의 결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예수라는 구원자를 믿음으로 죄에서 자유로워지는 수동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예수를 믿고서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고 나서 스스로 거룩해지려는 성도 자신의 노력과 이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성화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어쩌면 성화가 신의 은총과 인간의 노력이라는 신인협동적인 결과라 말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열반은 이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 자력적인 구원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고, 성화는 열반보다는 수동적이고 타력적인 구원의 신비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열반은 죽은 후에 경험하게 될 안식이나 평안을 이생에서 미리 앞당겨 경험하는 정신적인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석가모니에게 있어서 사후세계는 존재하지 않기에 죽음 그 자체가 고통의 끝이요, 열반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죽게 되면 결과적으로 번뇌와 고통의 원인이 되었던 탐욕이나 욕망이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기에 열반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평정심이나 행복감이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다는 역설적인 사실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열반에 관하여 석가모니의 수제자인 싸리뿟따와 그의 친구 우다이의 대화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싸리뿟따> “벗이여, 열반은 즐거움이다. 열반은 즐거움이다.”라고 말했다.

그 때에 우다이가 물었다.

<우다이> “그러나 벗이여, 싸리뿟따여, 감수가 없다면 즐거움이 있을 수 있는가?”

싸리뿟따는 대답했다.

<싸리뿟따> “감수 그 자체가 없는 것이 즐거움이다.”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88에서 간접인용)

 

만일 우리가 지닌 번뇌와 고통의 원인이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탐욕과 갈애를 통해서 비롯된다면, 우리의 죽음과 함께 그 탐욕과 갈애가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지금 우리가 이생에서 겪고 있는 그 모든 번뇌와 고통도 또한 죽음과 함께 동시에 사라지게 된다는 해석을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석가모니가 말하는 열반의 경험은 죽어서야 경험하게 될 탐욕과 욕망이 없는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미리 앞당겨서 이생에서 경험하자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열반은 초월적이고 신비한 경험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열반은 우리가 인생무상을 깨닫고 그 모든 욕심을 버린 후에 경험하게 될 지극히 자연스러운 심리적인 현상, 즉 평정심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석가모니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리고 사후세계조차도 부정하는 무신론적인 철학자이기에 우리의 영혼이 영원히 거할 실제적이고 공간적인 장소로서의 극락이나 천국의 개념을 전적으로 부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가 전통 힌두교가 주장하는 윤회사상조차도 실제로는 믿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가모니가 윤회사상을 통해 자신의 열반의 개념을 펼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왜 석가모니는 자신이 믿고 있지도 않는 윤회사상을 폐기하지 않고 해탈이나 열반의 개념을 위한 하나의 틀로 사용하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에 대한 필자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2500년의 인도사회는 카스트라는 계급사회이었는데, 윤회사상은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와 같은 지배계급 사람들과 수드라와 불가촉천민과 같은 피지배계급 사람들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종교적인 믿음이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을 다스리고 길들이기에 윤회사상만한 좋은 사상적 도구가 있을 수 없었고, 더 나아가 피지배자들이 현실을 순응하면서 지배자들을 따르기 위해서도 윤회사상만한 위로가 없다는 것이다. 비록 석가모니가 사후세계나 윤회적인 삶을 믿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단도직입적으로 윤회사상을 부정할 수 있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석가모니가 힌두교가 주장하는 절대적이고 숙명적인 윤회사상을 보다 상징적이고 인본적인 윤회사상으로 전환시키는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을 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라훌라는 이렇게 설명한다,

 

“죽은 후에 붓다나 아라한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은 대답할 수 없는 범주에 속한다. 붓다가 이것에 대해 말했다면, 거룩한 님은 죽은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는 우리의 언표로는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했을 뿐인 것이다. 밧차고따라는 유행자의 질문에 대답하여 붓다는 ‘태어남’이나 ‘안 태어남’이라는 말이 아라한의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질, 감수, 지각, 형성, 의식(다섯 가지의 존재의 다발)과 같은 것들은 그가 죽은 후에 완전히 파괴되고 뿌리 뽑혀져 다시는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85)

 

윤회에 대한 석가모니의 이러한 회색적이고 상징적인 입장을 휴스톤 스미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생은 죽은 다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윤회의 회전을 따라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다시 태어날 것을 바라지만 부처는 그와 같은 내세관을 부정한다.......석가모니와 어느 제자와의 대화의 요점은 내세의 존재에 관한 문제를 인간의 지식이나 언어로는 결코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내세에 있어서 사람의 영혼의 상태는 존속하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유한된 인간의 어떤 경험과도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현재의 의식이나 언어로 표현될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희미한 꿈이 잠을 깰 때 기억으로부터 사라져버리는 것과도 같다. 또는 새벽의 희미한 별빛이 아침 햇빛에 쫓기어서 사라져 버리는 것과도 같다....... 한 방울의 이슬이 흘러서 빛나는 대양으로 들어가는 것과도 같다. 어떤 이는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서 큰 바닷물이 흘러서 이슬방울 속으로 들어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니르바나에 대하여 더 많이 부처의 설명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지만 부처는 침묵을 지켰다. “우리는 묻고 또 물어보아도 당신은 그저 미소만 지으며 잠잠하십니다.”라는 말과도 같다.”

(세계의 종교들, 88-90.)

 

결론적으로 열반에 대해서 정리를 하자면,

1. 열반은 사후세계나 윤회적인 삶에서 보다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자유와 해방의 경험이다. 이러한 자유와 해방을 해탈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기에 열반은 곧 해탈이라고 볼 수 있다.

2. 열반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번뇌와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심리적인 경험이다. 즉 열반은 외부적인 힘, 즉 신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경험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열반은 자신의 무지를 깨달음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변화, 즉 평정심으로 표현될 수 있다.

3. 열반은 천국이나 극락과 같은 실존적인 사후세계를 필요치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죽음과 함께 우리가 가졌던 번뇌와 고통은 저절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반은 죽어서야 경험하게 되는 그 모든 번뇌와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미리 앞당겨서 이생에서도 경험하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석가모니는 열반을 최상의 지혜라 부른다.

4. 하지만 이생에서 이러한 열반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매우 극소수라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또한 이와 같은 도리 즉, 모든 형성의 그침, 모든 집착의 완전한 버림,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은 참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는 우리가 이생의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탐욕과 갈애를 버리고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기한 것은 예수님도 사람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거룩한 길을 걷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13-14)

 

여기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사실은 불교의 열반과 기독교의 성화는 그 지향점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 지향점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거룩한 삶, 근심 없고 평안한 삶, 그리고 기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되는 탐욕이나 갈망 혹은 갈애, 기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죄성’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기적인 탐욕 혹은 죄악된 속성을 극복하거나 제거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에서 석가모니와 예수의 가르침은 정반대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석가모니가 말하는 열반은 초자연적인 은총과 같은 외부적인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구원하려는 자력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고, 예수가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 인간이 응답하므로 경험하게 되는 초자연적이고 타력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음 6번째 담화에서는 석가모니가 가르치는 어떻게 열반에 이를 수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열반에 이르는 여덟 가지 올바른 길, 팔정도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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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1/18 [13:08]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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