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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2.17 [17:04]
루터와 츠빙글리의 성만찬 논쟁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13)
 
김현배

슈파이어 제1차 제국의회 - “루터의 종교개혁을 채택할 수 있게 됨

▲ 슈파이러 제국의회 장소 임페리얼 성당     ©뉴스파워 김현배

  

결국 루터 한 사람이었다. 루터를 중심으로 한 개혁운동은 하나의 커다란 조직을 갖추면서 독일 내에서 새로운 신앙운동을 일으키며 확산되어 갔다.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교리를 강조하였고 거룩한 예배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면서 개혁된 미사형식의 틀을 잡았다. 독일에서 루터주의는 미사와 예배 형식에 변화를 주면서 예배의식을 발전시켜 갔고, 교회조직을 갖추어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루터는 24곡의 찬송가로 된 예배서도 작성했고 음악과 찬송을 강조하였다. 특히 루터가 지은 찬송가 중 가장 유명한 곡은 종교개혁의 군가라고 할 수 있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이다. 이 곡 가사 덕분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루터의 사상을 익히 알게 되었다. 이처럼 루터의 종교개혁은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는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과 그의 문서 보급이 확산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종교개혁운동을 억제하여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저지하고 싶었다. 결국 황제 칼 5세는 라인 강 연안에 자리 잡은 독일의 오래된 도시 슈파이어(Speyer)에서 1526년 제1차 제국의회(Diet of Speyer)를 소집했다. 예상 외로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많이 참석했다. 그들은 개혁 원칙을 단념할 수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의회 결과가 나왔다.

 

의회는 각 지역마다 그곳을 통치하는 제후의 종교를 믿게끔 허용해 주었다. 즉 각 지역의 제후의 종교가 그 지역의 종교가 된다는 의미이다. 개신교 진영의 제후들 대부분이 각 도시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였다. 또한 지역교회(Landeskirche) 로서 루터파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되었으며 루터의 종교개혁을 채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의회의 결정은 루터파의 확산에 매우 유리한 기여를 하였다. 개신교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1521년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한 보름스 제국의회의 법령이 갈수록 실천할 수 없는 것이 되어 갔다.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승리했다. 하지만 그 승리는 잠깐이었다.

 

 

슈파이어 제2차 제국의회 - “종교개혁이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제동을 걸다

 

루터를 향한 교황청의 증오심은 계속해서 커져만 갔다. 황제 칼 5세도 독일 군주들의 세력이 강해진 것을 보면서 루터라고 하는 한 인간이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분란을 심어주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화가 났다. 황제는 1529315, 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를 소집했다. 황제는 개신교의 세력 확산에 대한 대처 방안과 제1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결정을 무효화하고 종교개혁의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이번 2차 의회에는 로마 가톨릭교회 세력이 다수 참석했다. 그들은 루터를 추방함으로써 보름스 칙령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2차 제국의회 결과가 나왔다. 개신교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황제는 가톨릭 측의 압력에 못 이겨 3년 전 1526년의 슈파이어 제1차 제국의회 결정 사항을 번복하는 결의를 하였다. 이것은 루터교 지역교회의 실질적 폐지를 의미한 것이다. 의회는 개신교를 믿고 있는 주들은 그 종교를 믿도록 허용하되 다른 주들은 가톨릭을 그대로 믿으며 가톨릭교회의 예배가 어디서나 허용된다는 내용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친 가톨릭교회 정책으로 선회한 것이다.

 

의회는 더 이상 종교개혁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공포하면서, 명령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황제의 처벌이 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한 15215보름스 칙령을 강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이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제동을 건 것이다.

 

 

1529년 슈파이어 항의 - “프로테스탄트”(개신교)

▲ 슈파이어 프로테스탄트 기념교회     ©뉴스파워 김현배

 

 

루터교 대표단은 다수의 가톨릭파에 의해 결정된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결의사항을 반대하였다. 루터 지지파 제후들 역시 침묵할 수 없었다. 그들은 종교개혁 진영 전체가 말살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고 판단했으며,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권위에 복종할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그들은 루터파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던 1526년 의회 결정을 유지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그들은 1529425, 교회와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칼 5세의 종교정책에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문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일치단결해서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결정에 대해 황제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황제와 로마 가톨릭 지도자들에게 항거했으나 이들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슈파이어 항의는 루터가 보름스에서 외친 항의의 재개이자 확대였다. 이렇게 항의한 사람들은 “Protestant”(항의하는 자)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이것이 개신교의 이름이 되었다.

 

항의서에는 작센의 선제후 요하네스, 헤센의 영주 필립, 브란덴부르크-안스바하의 게오르크, 뤼네부르크의 에른스트, 안할트의 볼프강 등 5명의 군주들과 독일 14개 제국 도시들의 대표들이 서명했다. 루터의 개혁운동을 지지했던 복음주의자들이다. 14개 도시는 스트라스부르크, 뉘른베르크, 울름, 콘스탄츠, 린다우, 켐프텐, 뇌르들링엔, 하일브론, 이스니, 생 갈렌, 로이틀링엔, 바이센부르크, 빈추하임, 멤밍엔 등이다 

 

1529년 마부르크 회의 - “루터와 츠빙글리와의 성찬 논쟁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는 종교개혁이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제동을 걸었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루터 지지자들은 황제에게 강하게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이후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가장 위험한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따라서 그 어느 때 보다 더 로마 가톨릭을 적으로 삼고 있는 프로테스탄트들의 연합과 협력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그 당시 독일과 스위스에서의 종교개혁운동은 근본적인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루터와 츠빙글리는 성찬의 참 의미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헤센의 필립은 이 교리적 차이만 해소될 수 있다면 독일과 스위스의 개혁운동이 연합할 수 있고, 연합된 힘으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독일과 스위스 지역의 프로테스탄트들의 연합은 매우 긴박한 요구였다.

▲ 허센의 필립 공작     ©뉴스파워 김현배

 

 

이처럼 두 사람의 상이한 견해차를 해소하고 하나의 연합을 이루어 보기 위해 허센 주의 제후 필립 공작(Philipp von Hessen, 1504-1567)1529101-3, 마부르크(Marburg)에서 회담을 개최했다. 반교황적 정서를 지닌 필립은 분열된 개신교회 양 진영의 일치를 모색하기 위해 루터와 츠빙글리를 초청하였다. 마부르크 회담에 초청받은 양측의 인사들은 독일 쪽에서는 루터와 멜란히톤이, 스위스 쪽에서는 츠빙글리와 부처가 대표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루터, 츠빙글리 및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이외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루터와 츠빙글리는 성찬에 있어서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께서 실재로 임재 하신다는 문제에 대해 3일간 대화와 토론을 전개했으나 좀처럼 견해차를 좁힐 수 없었다. 성찬 문제를 둘러싸고 경건했던 두 사람 사이에 논쟁이 불붙었다. 이 논쟁에는 엄청난 시간과 정력이 소비되었다. 그것은 16세기 대부분의 개신교들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었다.

 

성찬에 있어서 루터와 츠빙글리 모두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체설(transubstatiation)이 큰 오류임을 확신하면서 비판하였다. 하지만 서로의 견해 차이는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마태복음 2626절의 이것은 내 몸이다”(Hocest corpus meum)는 말씀에 대한 해석 문제였다.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성찬상의 떡과 포도주에 임재하신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도의 편재설에 근거하여 실재론적 견지에서 자신의 실재 임재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즉 루터의 입장은 성찬에 그리스도가 임재하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믿었다.

 

사실 루터 입장에서 볼 때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체설을 반대한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루터는 1527년에 츠빙글리의 성만찬 견해를 반대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적 임재를 부정한 츠빙글리를 성례전의 능력을 부정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 루터와 츠빙글리의 성만찬 논쟁 모습     ©뉴스파워 김현배

 

 

반면에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루터와는 달리 성찬의 떡은 갈보리에서 단번에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즉 성찬은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한 회상이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이라 하였다. 도리어 츠빙글리는 성찬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임재하신다고 주장하였다.

  

츠빙글리에게 성찬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이었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새롭게 하는 하나의 기념예찬이었다. 떡과 포도주에 대해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상징할 뿐이지 더 이상 신비로운 사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주의 요소 속에 육체로임재 하신다는 루터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루터가 아직까지도 로마 가톨릭의 미신적 잔재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폄하했다.

 

두 사람의 주장은 임재상징의 대립으로 축약된다. 특히 화해를 조정하고 나선 스트라스부르크의 종교개혁자 마틴 부처(Martin Butzer, 1491-1551))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견해를 양보하지 않았다. 이들 간의 상이한 견해 때문에 루터와 츠빙글리 양측은 결국 갈라지고 말았다. 또한 필립이 의도했던 로마 가톨릭 세력에 대항한 개신교 동맹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성찬론에 대한 루터와 츠빙글리의 신학적인 차이점 때문에 이후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의 대립, 즉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대립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즉 루터를 중심으로 한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루터파(Lutheran)를 형성하게 되었고, 츠빙글리와 칼빈 등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개혁파(Reformed)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후 지금까지 루터주의와 개혁파들의 성만찬에 대한 견해가 나뉘어진 것이다.

▲ 마부르크 회의 장소 마부르크성     ©뉴스파워 김현배

  

물론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사이의 성찬 논쟁은 스위스 로이엔베르크에서 풀렸다. 마부르크 회담이 열린지 약 450년이 지난 1973, 로이엔베르크에서 만난 양 진영의 대표단들은 1529년 마부르크 회의 때 서로 대립되었던 성찬론에 대한 신학적 갈등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 회담에서 성찬론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방식에 대한 논쟁은 중지하고 성찬의 의미에 집중하자고 합의했다. 이 역사적인 선언문이 발표된 것을 로이엔베르크 합의’(Leuenberg Agreement)라고 부른다.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그때 종교개혁자들의 합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     ©뉴스파워 김현배

 

 

 

역사적으로 볼 때 마부르크 회담은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의 공식적인 충돌이라고 말해도 무방하지 않을 만큼 종교개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개신교가 나뉘어져 있다는 것은 비극이다. 분열은 큰 아픔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둘로 나뉘어진 것을 하나 되게 하셨다. 하지만 루터와 츠빙글리는 십자가의 성찬 문제로 인해 하나 되기는커녕 오히려 둘로 나뉘어져 버렸다. 안타깝고 가슴 아픈 사건이다. 물론 진리와 비 진리는 서로 화해될 수 없다. 그런데 루터와 츠빙글리의 성찬 논쟁은 진리 안에서의 해석 문제였다. 좀 더 그들이 생명의 차원에서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많다.

 

 

오늘 이 시대에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서로 하나 되어 개혁과 부흥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개혁과 부흥은 함께 하는 것이지 서로 나눠질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부흥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들은 진리 안에서 서로 한마음 되어 계속 개혁에 힘쓰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흥을 갈망해야 할 것이다.

 

 

▲ 김현배 목사     ©뉴스파워

김현배 목사는 현재 베를린 비전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영국 런던신학교와 웨일스 복음주의 신학대학교에서 청교도와 부흥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는 총회세계선교회(GMS) 파송 독일 선교사이며, 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국 부흥의 주역들”(CLC)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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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1/11 [00:16]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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