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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9.16 [18:02]
예수와 석가모니 (4)
초기불교 사상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
 
정성민

네 번째 담론:

과연 석가모니가 깨달은 진리란 무엇인가?

 

석가모니는 고행을 통해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석가모니가 생각하는 최고의 경지는 삶이 주는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어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최고의 경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곧 죽음의 불안이나 두려움으로부터도 완전한 해방을 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석가모니는 출가한 후 6년 동안의 지독한 고행을 통해서도 그가 바라던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없었다. 결국에는 육체를 괴롭히는 금욕적인 고행을 통해서는 이러한 경지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그로인해 그는 고행을 멈추고 단식도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석가모니는 숲 속에 들어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수행을 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때에 그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깨달음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석가모니의 깨달음의 과정을 <불교성전>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몸과 마음이 탐욕과 집착을 떠나 고요히 자리 잡고 있어야 그 고행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싯다르타는 참담한 고행을 다시 시작했다. 싯다르타는 그 당시 인도의 고행자들이 수행하던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고행만을 골라 수행했다. 먹고 자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고 몇 톨의 낟알과 한 모금의 물로 하루를 보내는 때도 있었다. 그의 눈은 해골처럼 움푹 들어가고 뺨은 가죽만 남았다. 몸은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로 변해갔다.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아직도 완전히 번뇌를 끊지 못했으며 삶과 죽음을 뛰어넘지도 못했다. 그는 여러 가지 무리한 고행을 계속했다...... 고행을 시작한지 다섯 해가 지나갔다. 지독한 고행을 계속해보았지만 자기가 바라던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어느 날 싯다르타는 그가 지금까지 해 온 고행에 대해 문득 회의가 생겼다. 육체를 괴롭히는 일은 오히려 육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를 괴롭히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맑게 가짐으로써 마음의 고요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고행을 중지하고 단식도 그만 두기로 했다. 그리고 지나치게 지쳐버린 육체를 회복하기 위해서 네란자라 강으로 내려가 맑은 물에 씻었다. 그때 마침 강가에서 우유를 짜고 있던 소녀에게서 한 그릇의 우유를 얻어 마셨다. 그 소녀의 이름은 수자타였다. 우유를 마시고 나니 그의 몸에서는 새 기운이 솟아났다. 그 후로 숲 속에 들어가 석가모니는 그가 바라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윤병상, 종교 간의 대화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9), 140-41에서 간접인용.)

 

과연 석가모니는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석가모니가 깨달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석가모니가 깨달은 진리는 ‘사성제’, 곧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에 잘 나타나 있다. 사성제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 석가모니가 베나레스 근처 이씨빠따나에서 옛 동료인 다섯 명의 고행자들에게 행한 최초의 가르침이다. 이를 초전법륜이라고도 하는데, 사성제는 "네 가지 높은 깨우침" 또는 "네 가지의 고귀한 진리"라는 뜻으로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의 4가지 진리 또는 깨우침을 의미한다. 흔히 이 네 가지를 간단히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부른다. 우리가 사성제를 잘 연구한다면 부처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가르침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성제의 첫째 가르침은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고 부르는 고제(苦諦)다. 이것은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말하는데, 한 마디로 인생 그 자체가 괴로움의 총체라는 것이다. 다음은 고제에 관한 설명이다,

 

먼저 괴로움(苦)의 진리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고, 원수를 만나게 되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과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그로 인한 걱정, 근심과 번민과 슬픔이 괴로움이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 그 생명을 보존하고 키워가려면 천만 가지 고통을 겪게 되므로 이것을 태어남(生)의 고라 한다. 늙는 것을 괴로움이라 함은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머리털이 희어지고 이가 빠지며 얼굴이 쭈그러지고 등이 굽으며 기력이 쇠해진다. 몸은 날로 무거워 앉으면 허리가 아프고 다닐 때는 지팡이에 의지하게 되니 이것을 늙음(老)의 고라 한다. 병드는 것을 괴로움이라 함은 온 몸이 균형을 잃고 기혈이 순조롭지 못해 두통이나 치통을 앓고 눈이 어둡고 귀가 먹는다. 또는 열병, 냉병, 풍병, 습병으로 사지가 뒤틀리고 온갖 고통이 엄습하니 이것을 병(病)고라 한다. 마지막으로 죽음의 괴로움이란 중생들이 그 몸의 기력이 다하고 목숨이 끝나려 할 때 죽음의 막다른 길에 이르러 여러 가지 견디기 어려운 심한 고통을 받게 된다. 이것을 죽음(死)의 고라 한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생을 받아 태어난 것은 결국 모든 고통의 집합체인 것이다. 이것이 고(苦)의 진리이다.(종교 간의 대화, 146-47.)

 

이러한 인생의 괴로움은 아직 진리를 깨우치지 못한 사람이 겪게 될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즉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의 삶은 고통이라는 것이다. 고통은 크게 3가지로 분류가 되는데, 그 첫째가 앞서 말한 생로병사의 고통이고, 둘째가 만물이 영원히 지속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변화기 때문에 발생하는 변화의 고통이다. 삶의 행복한 느낌, 행복한 조건 등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인데, 이로 인해 고통, 아픔, 이별 등과 같은 불행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스럽고 괴로운 삶을 통해 체험하는 것이 바로 인생무상이다.

 

세 번째 고통은 형성의 고통으로 세 가지 종류의 고통 가운데서 가장 철학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인간은 다섯 가지 존재의 요소들(물질, 감수, 지각, 의지, 의식)로 구성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 정신적인 힘 또는 에너지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자아 혹은 영혼에 집착하게 되는데, 이러한 집착이 불러오는 고통이 바로 형성의 고통이다. 이러한 3가지 종류의 고통은 다시 8가지 고통으로 세분화될 수 있다,

  

1.생고(生苦): 태어나는 고통

2.노고(老苦): 늙는 고통

3.병고(病苦): 병드는 고통

4.사고(死苦): 죽는 고통

5.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6.원증회고(怨憎會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7.구부득고(求不得苦): 원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하는 고통

8.오취온고(五取蘊苦): 실제로 실체가 없는 "나", “나 자신”, “자아”라고 하는 대상을

실체가 있다고 믿고 집착함에 따르는 고통

 

여기에서 우리는 석가모니가 생각하는 인간관을 알게 되는데, 바로 오온(五蘊)이라는 개념이다. 오온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내지는 ‘다섯 가지 존재의 요소들’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것들은 물질(色), 느낌(혹은 감수, 受), 생각(想), 의지작용(行), 의식(識)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물질, 느낌, 생각, 의지 그리고 의식이라는 요소들로 구성된 존재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석가모니가 생각하는 인간은 다섯 가지 존재의 요소들로 구성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 정신적인 힘 또는 에너지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52) 이는 인간은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이나 자아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주장인데, 이러한 석가모니의 깨달음이 바로 열반에 이르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지식이라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이러한 견해는 자연과학적인 관찰과 분석에 따른 것으로서 영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속성을 지닌 종교들의 속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석가모니의 유물론적이며 무신론적인 인간관은 비관적이고 염세적이며 또한 허무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정통 불교학자인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첫 번째,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일반적으로 학자들 사이에서는 고성제라고 번역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불교적으로도 인생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에 대한 해석과 번역은 모두 그 참뜻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거나 오도할 우려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불교를 염세주의로 잘못 이해하는 이유는 이러한 제멋대로 풀이한 안이한 해석과 수박 겉핥기식의 해석 때문이다.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불교는 합리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종교이다. 불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 불교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이상향에 살도록 추스르거나 온갖 종류의 상상적인 공포나 죄악감에 놀라거나 괴로워하지 않도록 한다. (Ibid, 45-47)

 

라훌라에 따른다면,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세계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어리석은 이상주의에 속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가 쓸데없는 죄책감, 즉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지 않게 되고, 또한 실체도 없는 영혼이라는 존재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결국에는 전혀 존재할 가능성이 없는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나 집착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석가모니가 말하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인생관인 것이다. 그래서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불교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을 둘러싼 세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정확히 그리고 객관적으로 설명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유와 평화, 청정과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Ibid, 47)

 

그러므로 석가모니가 바라본 인생의 본질은 괴로움이라는 것이고, 이 괴로움은 일반적인 삶의 고통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의미의 고통을 수반하는 것으로 인생무상, 공허함, 무아, 무실체 등의 철학적인 깨달음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현실을 직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석가모니는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생각을 품은 과학적인 철학자임이 분명한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종교들은 영혼이나 정신을 물질의 반대 개념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석가모니는 영혼이나 정신을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단지 유한한 물질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마음이나 정신을 단지 시각이나 청각과 같은 감각기관의 하나로 간주한다. 무아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다섯 가지 육체적인 감각기관은 우리로 하여금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가능하게 하고, 그로 인해 우리 안에 느낌이나 감정이 생기게 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어떠한 대상에 대한 이러한 느낌과 감정에 따라 우리의 생각이나 지각이 형성이 된다. 즉 그 대상에 대한 개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세계의 감각기관으로서의 마음과 다섯 가지의 육체적인 감각기관은 상호의존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석가모니에 의하면, 비록 우리의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느껴질 수 없는 세계가 바로 정신세계이지만 마음이라는 또 다른 감각기관을 통해서 정신세계의 대상들을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것은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조정되거나 개발될 수 있다. 붓다는 이 마음이나 정신을 포함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제어하고 수련하는 것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시각기관과 마음이 기능상 다른 점은 눈은 세상의 빛과 보이는 물질을 감지하는데 비해 마음은 관념과 생각의 세계와 정신적인 대상을 감지하는데 있다...... 그러나 생각과 관념은 어떠한가? 그것도 역시 세계의 일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느껴질 수 없으며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받아들여질 수가 없다. 그것이 다른 기관에 의해서 수용될 때에 그것이 바로 마음이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의 감각은 체험된 세계와 독립되어 있지 않다. 만약에 사람이 장님으로 태어나면 빛깔에 대한 생각을 가질 수 없으며, 소리에 대한 분석이나 다른 감관에 의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생각 이외에는 할 수가 없다. 세상의 일부를 형성하는 관념이나 생각은 육체적인 경험에 의해서 산출되고 조건 지어지며 마음에 의해서 수용되어 마음은 사물이나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마음이나 정신은 시각기관이나 청각기관과 같은 감관으로 간주된다. (Ibid, 53-54)

 

이렇게 마음과 육체를 하나로 보는 석가모니의 입장을 심신동일론 내지는 철학적 일원론으로 간주할 수 있는데, 이는 물질의 반대개념으로서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영원하고 불변하다고 생각하고 믿는 ‘영혼’내지는 ‘자아’는 없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의 정신이나 의식은 구별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섯 가지 존재의 요소들에 속하는 것이고 또한 서로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는 “인생은 짧고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Ibid, 61)

 

존재의 다섯 가지 요소들이 끊임없이 변하기에 인생은 무상할 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는 물질이나 실체란 없다”는 연기의 법칙은 인생의 괴로움을 보여주는 진리인 것이다,

 

연기의 법은 세상에 하나가 사라지면 다음 것이 나타나는 조건을 만들어준다. 여기에 변하지 않는 실체란 없다. 여기 영원한 자아, 개체,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진정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 의존되어 있는 정신적 물질적인 다발들이 정신-물리적인 기계처럼 작용할 때에 ‘나’라는 관념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관념이나 정신적인 형성에 불과하다. 곧 그것은 영원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Ibid, 61-62)

 

그렇다면 왜 이러한 고통이 인간들에게 따르는 것일까?

도대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일까?

이제부터 석가모니가 깨달은 거룩한 진리, 사성제의 두 번째 원리를 다루고자 한다. 이는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거룩한 진리인데,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가 있다. 그것은 곧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Ibid, 67에서 간접인용)

 

이러한 석가모니의 주장을 잘 살펴보면, 우리에게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가져다주는 원인은 외부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이 겪고 있는 비극의 원인은 하나님도 아니고, 마귀도 원인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는 인간에게 온갖 고통과 윤회를 불러오는 원인이 인간 내면에 있다는 것이다. 라훌라는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붓다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이 있다.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나 근원은 괴로움 그 자체 내부에 있으며,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과 또한 괴로움의 소멸을 가져오는 원인이나 근원도 괴로움 그 자체의 내부에 있으며,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주의 깊게 새기고 명심해야 한다. (Ibid, 70.)

 

결국 인간 내면에 있는 탐욕, 욕망, 갈애, 열망 등이 우리가 겪는 온갖 고통과 비극의 실제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탐욕과 갈애가 인간의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간주되어진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세상은 결핍을 느끼고 갈망하고 있으며 탐욕의 노예가 되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Ibid, 69에서 간접인용) 결국 인간의 이기적인 탐욕이 그 모든 고통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석가모니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질 수 있다,

 

붓다의 분석에 따르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싸움과 분쟁은 작게는 가족들 사이의 사사로운 다툼에서 크게는 국가 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기적인 ‘탐욕’에서 일어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모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은 바로 이기적인 탐욕에 뿌리박고 있다...... 누구든지 세상의 모든 악은 이기적인 탐욕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이 탐욕이 재생과 윤회를 낳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결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Ibid, 68-69)

 

하지만 이러한 탐욕조차도 고통을 일으키는 첫 번째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탐욕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주목되어지고, 고통의 원인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주요한 원인으로 인식될 뿐이라는 것이다. 알고 보면 탐욕조차도 어떠한 원인에 의해 조건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탐욕은 감수(느낌)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감수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접촉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으로 순환되면서 결국 십이연기라는 조건적 발생의 원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과관계적으로 분석하자면, 무지가 바로 그 모든 고통의 가장 근본적인 제일 원인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가 불교적으로 본다면 ‘무지’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이유를 살펴본다면 탐욕이나 갈애가 바로 무지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Ibid, 68) 기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원죄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인간의 자유의지적인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불교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그 모든 고통의 원인은 인생은 무상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자아나 영혼은 없을 뿐만 아니라 신이나 사후세계조차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업과 윤회에 관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인데, 어떻게 해서 탐욕이 윤회를 불러오는가의 문제이다. 석가모니는 정신적인 의지(또는 의도)가 바로 업이라고 말한다. 석가모니는 “정신적인 의지는 중생이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통하여 활동하며 존재의 뿌리를 만들어내어 존속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Ibid, 69에서 간접인용) 결과적으로 모든 고통과 비극의 직접적인 원인은 탐욕과 갈애라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은 이기적인 탐욕과 갈애조차도 하나의 정신적인 의지나 의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인 의도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자면 인간이 지닌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적인 의도가 바로 업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업을 하나의 행위나 행동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업은 바로 ‘의도적인 행위나 행동’을 말하는 것이고(71), 더 나아가 ‘업보’는 단순한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의도적이거나 의지적인 행위에 대한 보상이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욕망이 상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처럼 의도도 상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하다. 마찬가지로 의도적인 행위인 업도 선하거나 악하다. 좋은 업은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업은 나쁜 결과를 낳는다.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탐욕, 의도, 업과 같은 것들은 그 결과로서 어떤 힘,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지속하려는 힘을 갖게 된다. 선이든 악이든 그것은 상대적이며 윤회의 수레바퀴 안에 있는 것이다.(Ibid, 71)

 

결국 석가모니가 6년간의 수행을 통해서 깨달은 진리는 바로 이것이다.

1. 인생은 고통의 자체이고, 고통의 연속이다.

2. 이러한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은 인간의 이기적인 탐욕과 갈애이다.

3. 하지만 인간의 탐욕과 갈애는 바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무지가 바로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라 말 할 수 있다. 바로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만물이 다 변하기에 인생은 무상하지만 우리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무지하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창조주 하나님이나 사후세계, 영원한 자아나 영혼은 없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어쩌면 이는 한번 죽으면 끝나는 안개와 같은 세상에 왜 쓸데없는 미련을 가져가지고 번뇌하면서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느냐라는 석가모니의 외침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죽음으로 끝나는 허무한 인생을 받아들여서 지나친 탐욕과 갈애를 버리라는 것이다.

4.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사실들에 무지하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존속하려는 정신적인 의지를 갖게 되는데, 이로 인해 우리는 온갖 탐욕과 갈애를 경험하게 된다.

5. 이러한 영원히 존속하려는 정신적인 의지나 의도가 탐욕이나 갈애를 통해서 하나의 의지적인

행동이나 행위로 드러나게 되는데, 이를 바로 업보라고 말한다.

6. 우리는 이러한 업보로 인하여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결과적으로 석가모니가 깨달은 진리는 기독교가 믿는 신앙과는 정반대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석가모니는 신의 존재, 영혼의 존재 그리고 영원한 사후세계의 삶에 대하여 부정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에게 있어서 이러한 기독교의 신앙은 바랄 수 없는 것을 소망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질 것이 분명한 것이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무상과 허무를 깨닫고 현실세계에서의 탐욕과 갈애를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할 때에 우리가 그 모든 잡념과 번뇌 그리고 그로 인해 경험하게 되는 실제적인 고통들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석가모니가 깨달은 무지의 개념(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 영혼에 대한 믿음,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은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이 사실인가 아닌가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둘 중(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만일 석가모니의 깨달음이 진리라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모든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열반에 이를 수 있을까?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아라한(부처의 제자로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거룩한 사람)과 같이 깨달음을 얻은 자는 비록 그가 행동하더라도 업을 쌓지 않는다고 하는데, 다음 담론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열반에 이를 수 있는가, 즉 불교적인 구원론에 대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대하여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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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1/07 [20:13]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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