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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0.12.05 [21:34]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유적지(1)
최근까지도 불교계는 불법건축물로 철거 주장
 
강경구
존 혜론으로부터 시작되는 아픈 희생위에 피는 선교의 꽃

▲ 혜론(John W. Heron, 혜참판)    
 테네시 종합대학교 의과대학을 개교 이래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혜론(John W. Heron, 蕙論)은 뉴욕 종합대학교 의과대학 졸업후 블랙웰 아일랜드병원에서 실습한 후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 1884년 봄 북장로교회에서 정식으로 임명한 조선선교사 1호였지만 일본에서 입국한 시기는 1885년 6월 21일이다. 1884년 7월 4일 한미조약 성립이후 선교의 문이 열리고, 같은해 9월 20일에 북미합중국 북장로회 선교 의사 알렌(安連, Horace N. Allen)부부가 경성에 입국하고, 85년 4월에는 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元杜尤, Horace G. Underwood)와 미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亞扁薛羅, Henry G. Appenzeller)가 입국한 후였다. 모교로부터 교수 초빙을 거절하고 한반도에 들어온 혜론은 1887년 광혜원(廣惠院)의 제 2대 원장이 됐으며, 고종의 시의가 됐다. 당시 혜론이 고종에게 받은 벼슬은 ‘가선대부’였고, 사람들은 그를 혜 참판(參判)으로 불렀다. 그는 번창을 구가하던 광혜원을 제중원(濟衆院)으로 바꿨다. 그의 마음안에는 특권층이 아닌 가난한 민초들에게 가있었기 때문이다. 혜론이 백성들의 아픔을 보듬던 당시 한 병원의 일지(1885년 4월10일~그해 말)에 적힌 충격적인 내용을 보자면 “조선인들의 절반은 천연두로 죽고, 매독은 아주 흔한 병입니다. 회충 환자가 1년간 760건이나 되고 피부병과 무좀은 백성들 거의 전부가 걸려 있습니다. 학질은 만병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각기나 디스토마 환자도 많습니다. 환자의 통계를 보면 장티푸스 환자가 1,147명, 소화불량과 기타 환자가 3,032명, 유행성 감기가 114명, 호흡기 환자가 476명, 정신병 환자가 833명, 성병 환자가 1,902명, 눈병 환자가 105명, 피부병 환자가 845명, 부인병 환자가 67명이었습니다.”로 적어지고 있다.

혜론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혜론 선교사는 7월이면 들끓던 전염병과 풍토병을 피해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남한산성에 휴양차 갔지만각종 질병으로 의사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을 놓고 쉴 수 없다는 판단으로 다시 제중원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며칠 못되어 그 자신도 이질에 전염되어서 3주 동안의 극한의 아픔으로 신음하던중 아픈 몸으로 6백여리나 되는 시골 회진중 젊은 부인과 두 딸을 남겨 두고 1890년 7월 26일 34살의 나이로 순교한다. 한국에 온 지 5년 만이었다. 머나먼 이역 만리 언어와 삶의 환경이 달랐던 한반도, 셀 수 없이 많았던 풍토병과 공포스러웠던 질병들 속에서 복음전도를 방해하는 정치적 변수들 속에서도 성서번역에 열심을 다했으며, 죽기 한 달 전인 1890년 6월 25일 한국성교서회(聖敎書會/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를 창설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문서 출판의 전기가 혜론에 의해 마련된 것이다.

호남 선교의 위기와 아픔
▲ 순천기독교 박물관 옆 코이트 선교사(Robert Thornwell Coit, 고나복)     ©강경구
 유진 벨 선교사가 남장로교회 소속으로 조선땅에 첫발을 내딛었던 1895년 4월은 봄빛으로 물든 하늘과 대지를 시샘하는 매서운 추위가 있었을 법하다. 혜론이 순교한지 5년뒤였다. 여전히 각종 풍토병과 일본 군국주의의 악랄한 정치적 핍박이 예견되고 있었던 척박한 한반도를 선교사들은 계속해서 찾아들었다. 최근 한 인터넷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유진벨 선교사의 4대 후손인 인요한 박사는 “당시 조선은 선교사 자녀들 유아사망률이 50% 이상이었고, 처음 태어난 아이들 10명중에 8명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전했다. 그는 또한 “그 당시 전라도의 유아사망률이 아프리카보다 더 높았다. 풍토병으로 희생된 것으로 파악된 선교사 가족이 45명”이라고 밝혔다. “당시에 제일 많이 죽었던 것이 세균성 이질 장티푸스였고, 말라리아, 홍역까지 지금은 어린이들이 걸리는 전염병들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무섭게 돌았다.”고 했다. 인요한 박사는 “중요한 것은 선교사들이 한국 풍토병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걸리면 거의 다 죽었다.”면서 당시대의 질병에 대한 심각성을 말해주었다. 코이트 선교사(한국명 고나복)는 애들이 일주일 사이에 두명이 죽어서 정신질환에 걸려 한국을 떠났을 정도로 당시대의 한반도, 호남의 척박한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결국, 1900년도 초 전라도 땅에서 질병으로 인한 선교사 가족들의 희생이 잇따르자 1915년부터 남장로교 안에서는 호남선교기지의 본토로의 철수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누구를 위한 복음(福音) 이었는가?
▲ 양림동산 선교사 묘역     © 강경구
미 감리회 소속 의료 선교사였던 홀(W. J. Hall 1860~1894)은 1894년 평양 개척 선교사로 파송되어 청일전쟁 직후 전염병이 창궐한 평양에 들어가 환자를 돌보던 중 자신이 전염병에 감염되어 별세했다. 캐나다 출신 독립 선교사 매켄지(W. J. McKenzie 1861~1895)는 동료 선교사들의 만류에도 “토착 선교를 하려면 토착민과 함께 살아야 한다”면서 황해도 소래로 내려가 토착민 마을에서 함께 살다가 열병에 걸려 희생됐다. 혜론의 순교이후 미망인이었던 해티 깁슨은 게일선교사와 재혼했지만 1908년 그녀 역시 결핵으로 별세했다. 유진벨 선교사의 첫 배우자였던 로티 위더스픈(Lottie Witherspoon Bell, 1867-1901)은 1901년 4월 임신 7개월의 몸으로 선교활동 도중 심장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두 번째 아내는 제암리 교회 학살 현장을 돌아보고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로 숨졌다. 유진벨의 외손자 휴 린튼(Hugh M. Linton, 1926-1984)은 선대에 이어 제3대 한국선교사로 일했지만 세 아들을 결핵으로 잃었고, “순천의 검정고무신”이란 별칭으로 순박하고 아름다운 희생의 삶을 살다가 고흥 간척 사업도중 그 자신도 1984년 교통사고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오웬(owen, clement carrington, 한국명: 오기원) 은 1909년 4월 급성 폐렴으로 선교사역도중 순교했다. 1913년 코이트 선교사(Robert Thornwell Coit, 고나복) 는 주에서 순천으로 이주하였고, 다른 선교사들과 다르게 어린 두 자녀 딸 로버타와 아들 토마스를 데리고 이주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던중 코이트의 두 아이들이 풍토병인 이질에 걸려 하루 간격으로 죽고 말았다. 그 좋지 않은 환경으로 아이들을 데려간 그의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피멍이 들도록 가슴아팠을 코이트 선교사는 두 아이를 가슴에 안고 순천 선교의 중심이었던 매산동 뒷동산 흙속에 아이들의 육신을 뉘었다. 아이들의 죽음이 평생 그에게는 지워지지 않은 아픔이었을 것이다. 이 아픔을 ‘불세례’(baptism of fire)라 칭했을 정도였다. 평생 그를 괴롭혔을 호되고 아픈 시련으로 고국으로 돌아간 그는 병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만 했고, 블랙마운틴 선교사 마을에서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했다.
양화진의 한 쪽 묘역에는 이름없는 작은 비석들 30개 정도가 묻혀 있다. 선교사 자녀들의 육신이 묻혀있는 곳이다. 안타깝게도 고국에서는 쉽게 구했을 항생제가 없었던 이유로 죽어갔던 아이들이다. 1912년 32살의 나이로 미혼이었던 미국 남장로교 간호선교사 쉐핑은 초기 파송시점에 소화기계 한국 풍토병으로 알려진 스푸르(sprue)에 걸려 평생을 고생했으며, 1934년 향년 54세를 끝으로 소천한 이후 사망원인이 풍토병(sprue)과 영양실조로 밝혀졌다.

지리산 선교유적지의 유래와 선교적 가치
▲ 1920년대 지리산 노고단 일대에 지어진 선교사 유적지     ©강경구
 1900년, 새로운 세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백척간두의 조국... 강대국의 침탈이 표면화 되었고 일본은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하며 한반도를 야금야금 삼키기 시작했다. 15년간인 1915년까지 한반도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그래도 정치적 위험이나 토착종교와의 갈등이 아닌 위생과 질병이라는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그게 당시 한반도였고, 광주였다. 남장로교의 선교 스테이션의 철수문제는 의외로 심각했고 버티기에는 전라도에서 선교사들의 희생은 너무나 컸다. 그런 선교 위기론 속에서 나온 대책이 바로 1920년도 초반 지리산 노고단에 선교사들의 풍토병을 피할 건물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1912년 유진벨 가문의 윌리엄 린튼은 유진벨의 딸인 샬렛과 1920년도에 결혼했으며 그때부터 선교사들이 풍토병을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위한 구체적인 대안들이 만들어졌다. 미궁이었던 건축비는 그래햄이 미국에서 기금을 보내왔다. 그래서 그곳은 “그래햄 리트릿 센터”로 명명됐고, 최초 30채에서 56채로 늘어났다. 이후 남장로교는 6월 말부터 9월 초까지 3개월간 가족들을 올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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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파워 광주 주재기자/ 전)전남도민일보 기자/ 전)전남매일신문 도시재생 칼럼니스트/ 의학박사(수료), 대체의학석사, 경영학석사/시인(광주문협/문학춘추)/ 현)조선간호대학교 겸임교수/ 전)조선대학교 초빙교수/ 현)광주복지재단 강사/ 2013 농촌봉사대상 개인 국무총리상/ 2017 자원봉사부분 단체 대통령상/ 2018 농촌봉사 단체 농축산식품부장관상 / 2013, 2014, 2015 전라남도 도지사 표창 /2014,2017 담양군 표창/ 2014 광주 동구 표창/ 2015 화순군 표창/ 2016 장흥군 표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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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4/29 [15:45]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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