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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2.13 [19:01]
“병든 자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김명혁 목사(한복협 회장), 연희동 목자와 양들 교회 설교 전문
 
김명혁
성경 본문: 마9:12,13

오늘 제가 목자와 양들 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설교를 하기 때문에 저 자신에 대한 소개를 간단하게 합니다. 저는 11살 때까지 북한에서 살다가 11살 때인 1948년 8월 고향과 부모님을 떠나 38선을 넘어서 서울로 왔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하나님을 바로 믿기 위해서 평양을 떠나 서울로 왔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북한에서 목회를 하시다가 제가 월남한지 2년 후인 1950년 6월 사동 탄광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저는 11살 때부터 부모님과 고향을 떠난 고아와 나그네의 생활을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저의 삶을 너무 많이 축복해주셨습니다. 한국과 미국에서 마음껏 공부한 후 귀국해서 교수의 일과 목회의 일을 마음껏 했고 선교의 일과 구제와 봉사의 일도 마음껏 했습니다. 제가 개척해서 29년 동안 목회하던 강변교회를 2008년 1월 13일 은퇴한 후 지난 5년 6개월 동안 주일마다 전국에 있는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며 설교하고 있는데 오늘은 연희동에 있는 목자와 양들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김천우 목사님이 오랜 동안 노숙자 사역을 해 오고 있기 때문에 오늘 “병든 자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사실 저는 영등포에서 26년 동안 노숙자 사역을 하고 있는 임명희 목사님이 목회하고 있는 광야교회를 매년 한 두 번씩 방문하며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숙자들의 합동 결혼식 주례를 여덟 번이나 했습니다. 저는 노숙자들을 돌아보는 노숙자 사역을 아주 귀중하게 보고 있습니다. 제가 3년 전에 “내가 본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모습 열 가지” 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일이 있었는데 그 열 가지 중에서 처음 세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20여 년 이상 영등포 지역의 세상을 등진 그리고 거칠기까지 한 노숙자들에게 인내와 사랑으로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하며 저들의 친구로 살아가고 있는 광야교회의 임명희 목사와 정경화 사모의 환히 웃는 얼굴 모습이 너무너무 귀하고 아름답다. 둘째, 20여 년 동안 성남과 구로 등지의 좌절과 분노에 쌓여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친구와 변호인과 의사의 역할을 하며 최근에는 저들의 자녀들을 위한 국제다문화학교를 세우려고 하는 김해성 목사와 이선희 목사의 끈질기고 진실한 삶의 모습이 너무너무 귀하고 아름답다. 셋째, 20여 년 이상 재난 당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파키스탄으로 아프간으로 서울역 지하도로 어디든지 달려가며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제공하는 지극히 작은 자들의 친구로 그리고 삶의 안내자로 살아가는 김범곤 목사의 소박한 삶의 모습이 너무너무 귀하고 아름답다.”

그렇습니다. 노숙자들과 나그네들과 병든 자들과 고난 당하는 자들을 돌아보는 것은 너무 귀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노숙자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신10:17-19). 사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집이 없는 노숙자로 한 평생을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8:20).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곳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어린 시절을 애굽으로 가서 피난 생활을 하셨고 공 생애 동안 잠 잘 곳과 쉬실 곳이 없었고 돌아가실 곳도 없는 철저한 나그네와 노숙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그네와 노숙자들에 대한 깊은 동정과 사랑의 마음을 지니고 사셨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죄인들에 대한 깊은 동정과 사랑을 지니고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병든 자들과 죄인들을 멸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2,13).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의 몸을 어루만지시며 병을 고쳐주셨고 열병 환자의 몸을 어루만지시며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노숙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셨고 병든 자들과 죄인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신10:17-19). 그래서 다윗은 죄를 사하시고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2-5).

그러면 이제부터 “병든 자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이 설교는 노숙자들을 위한 설교라기 보다는 저 자신을 위한 설교이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설교를 자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하는 설교는 제가 작년 11월 미국 풀로리다주 올란도로 가고 오는 비행기 안에서 쓴 글인 “의인보다는 죄인이 보고 싶어지는 시대” 라는 글을 참고하고 인용하면서 하는 설교입니다. 그 글이 금년 1월 6일 기독교신문에 조금 줄여서 실리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 글을 쓴 후 즉시 순 복음교회의 이영훈 목사님에게 보내드렸더니 다음과 같은 답 글을 보내왔습니다. “보내주신 글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죄인보다는 의인이 많은 시대에 용서와 사랑과 긍휼보다는 분노와 증오와 정죄가 난무하는 시대에 목사님의 글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지고 주님의 눈물이 가슴을 적셨습니다. 저를 사랑해주시는 목사님 마음 항상 감사드립니다. 더욱 강건하시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이영훈 목사 올림” 그러면 이제부터 제가 쓴 “의인보다는 죄인이 보고 싶어지는 시대” 라는 글을 참고하고 인용하면서 “병든 자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병든 자들보다는 건강한 자들을 좋아하고, 죄인들보다는 의인들을 좋아합니다. 가난한 자들보다는 부자들을 좋아하고, 어리석은 자들보다는 지혜로운 자들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건강한 자들보다는 병든 자들을 귀하게 여기셨고,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을 귀하게 여기셨고,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자들을 귀하게 여기셨고, 지혜로운 자들보다는 어리석은 자들을 귀하게 여기셨고, 강한 자들보다는 약한 자들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각색 병든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문둥병자와 중풍병자와 열병환자와 귀신들린 자들과 혈루증 환자와 소경들과 벙어리 등 모든 병든 자들을 어루만지시며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같이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2,13).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6:20).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3,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 사도 바울은 세상적인 지혜나 강함보다는 십자가적인 어리석음과 약함을 높이 예찬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2-25). 사도 바울은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오히려 병과 약한 것들을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기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그러면 이제부터 병든 자들과 죄인들을 귀하게 보시는 성경 말씀들을 찾아보면서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과 죄인들을 얼마나 귀중하게 보시고 병든 자들과 죄인들에게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 사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와 죄인들을 심판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분부를 불순종하는 죄를 범했을 때 심판을 받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사람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리시는 홍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죄악이 관영했을 때 하나님께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내려 다 엎어 멸하시는 불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죄를 범하는 자가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죄와 죄인들을 심판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죄인들이 죄를 고백하며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시고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축복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죄인 다윗이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3) 라고 눈물로 자기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며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놀라운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베푸셔서 다윗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태어나시게 하는 놀라운 축복까지 베푸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존 전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라고 처절하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축복하셔서 메시야의 탄생과 사역과 고난과 죽음을 예언하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만드셨습니다.

신약 성경이야말로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는 죄인들과 병자들을 하나님께서 귀중히 보시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며 놀라울 정도로 크신 은혜를 베푸신다고 가르칩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약 성경은 의인들과 건강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진 책이 아니고 죄인들과 병자들을 위해서 쓰여진 책같이 보일 정도입니다. 특히 복음서들은 거의 전부 죄인들과 병자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입어서 구원함을 받은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복음서들 중에서 죄인들과 병든 자들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진 누가복음에 기록된 죄인들과 병자들에게 임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눅 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백부장에게 임한 은혜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그 백부장은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증오하던 이방인이었고 로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백부장은 자기가 멸시를 받을만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에게 직접 나아갈 수도 없고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수도 없는 멸시를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미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백부장은 유대인의 장로 몇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병중에 있는 자기 종의 병을 고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병 중에 있는 자기 종을 불쌍히 여기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서 그 종의 병을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했을 때 백부장은 자기는 멸시를 받아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수 없다고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말씀 한 마디만 하시면 자기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하며 예수님에 대한 자기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의 고백을 들으시고 놀라운 칭찬과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눅7:9). 그 종은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은혜가 죄인과 병든 자에게 동시에 임한 것이었습니다. 의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은혜가 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죄인들과 병든 자들에게만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임할 수 있다고 생각해봅니다.

둘째로, 눅 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에게 임한 은혜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그 여자는 길거리의 부도덕한 여자였을 것입니다. 만인의 멸시와 천대와 증오를 받던, 돌에 맞아서 죽어야 마땅한, 죄인 중의 죄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디선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을 때 죄인인 그 여자는 그 말씀을 듣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기는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고백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축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너무 놀랍고 너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자기가 범한 지난 날의 모든 죄를 주님 앞에 낱낱이 고백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아 식사하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여자는 바리새인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물론 초대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저 달려간 것이었습니다. 죄인인 그 여자는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 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온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저는 돌아 맞아 죽어야 할 개 같은 죄인입니다. 저는 한 두 번 또는 일곱 번 죄를 범한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수 없이 계속해서 더러운 죄를 짓고 또 짓고 또 지었습니다. 저는 죄 덩어리입니다.” 그 여자는 자기의 모든 죄가 사람들 앞에 들어나는 것을 개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를 멸시하고 정죄하는 바리새인 시몬의 멸시와 정죄도 개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 크고 놀라운 은혜와 칭찬과 축복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눅7:47).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눅7:48). 주님께서는 또한 주님을 향한 그 여자의 사랑이 많음을 알아주시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7:47). 사랑을 알아주시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는데 주님께서는 죄인인 그 여자의 사랑을 알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축복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7:50). 참으로 놀랍고 놀라운 은혜가 죄인인 그 여자에게 임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에게는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가 임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의인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가 오직 멸시와 천대와 증오를 받던 개 같은 죄인에게만 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죄인들에게만 임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눅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에게 임한 은혜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눅18장에는 종교 생활을 잘 하는, 윤리적으로는 흠 잡을 것이 없는, 바리새인 한 사람과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던 세리 한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감사의 기도를 멋지고 길게 드렸습니다. 세리는 가슴을 치면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한 곳은 의인인 바리새인이 감사 기도를 멋지고 길게 한 곳이 아니고 죄인인 세리가 처절한 회개의 기도를 짧게 드린 곳이었습니다. 결국 세리는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눅18:14).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모순되는 듯한 일이었습니다. 윤리적으로 흠이 없고 종교적인 생활을 나름대로 충실하게 했던 바리새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던 죄인 세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가 한 것은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 것뿐이었는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편애하시는 것 같습니다.

넷째로, 눅 19장에 나오는 세리장 삭개오에게 임한 은혜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자기와 같은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혹시 자기도 예수님께서 부르실 수는 없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뽕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멀리서나마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 많은 군중 속으로 걸어가시던 예수님께서 자기에게로 가까이 오셔서 자기를 바라보시면서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오늘 자기 집에 유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19:5). 삭개오는 너무 놀라고 너무 놀랐을 것입니다. “정말 맞구나!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고 나 같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구나! 지금 나를 부르고 계시는구나!” 삭개오는 너무 놀라면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그 동안 남의 물건과 돈을 너무 많이 빼앗았습니다. 부정 부패를 너무 많이 저질렀습니다. 내가 이제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을 4배나 갚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했을 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임했습니다. 이와 같은 감격적인 놀라운 은혜는 의인들에게는 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직 멸시와 천대와 증오를 받는 죄인들에만 임하는 것 같습니다.

다섯째로, 눅 8장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임한 은혜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던 죄인 중의 죄인이었습니다. 스코트랜드의 유명한 신학자 맥클라렌은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가지 대표적인 죄악의 늪에 빠졌던 도저히 소생할 가능성이 없었던 죄인 중의 죄인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인간 쓰레기와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쓰레기 막달라 마리아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녀를 저주하시고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그녀를 일곱 가지 귀신에게서 건져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가까이 하기만 해도 죄가 묻어날 것같이 느껴지는 더럽고 혐오스러운 죄인 막달라 마라이에게 주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녀의 죄를 사하시고 그녀를 구원하신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죄인 막달라 마리아로 하여금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까이에서 보살피는 봉사자로까지 삼아주신 것이었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쌔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눅8:1-3). 너무너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결국 막달라 마리아는 눈물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난 날 자기가 저지른 수 많은 종류의 죄악들을 생각하면서 수 많은 죄악의 늪에 빠졌던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서 울고 또 울고 또 우는 눈물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인간 쓰레기 죄인을 사랑하시되 너무너무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울고 또 울고 또 우는 눈물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가서도 울고 또 울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시지 않고 일곱 귀신 들렸던 자기에게 먼저 나타나신 사실을 생각하며 그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여 울고 또 울고 또 우는 눈물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눈물과 사랑의 은혜는 의인들에게는 결코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소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인간 쓰레기 같은 죄인들에게만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여섯째로,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자와 포악한 로마 군인들과 강도 한 사람에게 임한 은혜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살펴봅니다. 요8장에 나오는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자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달라 마리아에게 임했던 은혜와 비슷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묵묵히 인정했을 뿐 아직 죄 청산의 열매를 하나도 나타내 보이지 못한 시점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포악한 로마 군인들은 저주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님께서 저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므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자기들이 죄인임을 묵묵히 인정했을 뿐 아직 죄 청산의 열매를 하나도 나타내 보이지 못한 시점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옆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던 강도들은 자기들의 죄 값을 치르면서 저주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강도 한 사람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가 한 말은 자기가 강도 짓을 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예수여” 라고 예수님을 부른 것뿐이었고 아직 죄 청산의 열매를 하나도 나타내 보이지 못한 시점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진리와 공의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드릴 수도 없는 모순되는 일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소망 없는 죄인들에게 너무 크신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다고 생각합니다.

일곱째로, 배신자 베드로와 핍박자 사울에게 임한 은혜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에도 승천하신 다음에도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배신자 베드로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고, 핍박자 사울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배신자 베드로와 핍박자 사울을 사도 중의 사도들로 삼으셨고 순교자 중의 순교자들로 삼으셨습니다. 결국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은 후세의 모든 악독한 죄인들의 위로가 되었고 소망이 되었고 모델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고백은 수많은 후세의 악독한 죄인들이 붙잡고 고백할 수 있는 보석과 같은 소망과 은혜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내가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4:13).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4). “죄인 중의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보석과 같은 소망과 은혜의 고백들을 붙잡고 울면서 주님 품으로 돌아온 사람들 중에는 육체의 정욕과 이단에 빠졌던 죄인 어거스틴이 있었습니다. 불교와 선도에 빠졌던 죄인 길선주 도사도 있었습니다. 마펫 선교사를 돌로 쳤고 장대현 교회당을 때려 부셨던 죄인 이기풍 깡패도 있었습니다.


끝으로 불치의 병에 걸린 수 많은 사람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살펴봅니다. 아마 그 원조는 사도 바울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그 병을 고쳐달라고 세 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12:8,9). 결국 사도 바울은 남은 여생을 불치의 병을 몸에 지니고 보다 깊은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타내면서 살았습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10).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

사도 바울의 후예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평생 맹인으로 살던 패니 크로스비는 찬송가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평생 불구자로 살고 있는 조니 에릭슨과 레나 마리아와 니크 브이치치와 송명희 시인은 자신들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온 몸으로 순수하고 진하고 아름답게 고백하고 또 고백하고 있습니다. 송명희 시인의 다음과 같은 고백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눈물로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와 같은 놀라운 고백은 건강한 사람들의 마음과 입에서는 흘러나올 수 없는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주님의 지극한 은혜와 사랑을 받은 병든 자의 마음과 입에서만 흘러나올 수 있는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풍성하신 예수님께서 저주 받아 마땅한 죄인들을 너무 불쌍히 여기시고 너무 용서하시고 너무 사랑하시고 너무 축복하신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심하게 책망하시며 정죄하신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를 같이 하시면서 죄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따뜻한 손길을 펴시곤 했습니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의인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0-13). 사실 예수님께서 한 두 번 아주 심하게 책망하시면서 정죄하신 대상은 죄인들이 아닌 의인들이었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29,33). 자칭 의인들이 되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지 모릅니다. 차라리 멸시와 천대를 받는 죄인들이 되는 것이 보다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지금 한국교회에는 처절한 죄 고백의 눈물도 뜨거운 감사와 사랑의 눈물도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죄인 의식보다는 의인 의식을 지니고 분노와 증오와 정죄의 깃발만 휘날리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지금 104세 되시는 방지일 목사님께서 저에게 전화를 거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제 회개 기도 모임에서 한 회개가 죄 고발이지 회개야? 난 아멘 하지 않았어. 김 목사는 아멘 했어?” 그렇습니다. 죄 고발은 난무하지만 처절한 죄 고백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회개의 눈물과 사랑의 눈물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죄인 의식이 점점 사라지고 의인 의식이 점점 팽배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모습보다는 ‘분노’와 ‘증오’와 ‘정죄’의 모습을 지니며 나타내 보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이나 모슬렘 나라들은 속히 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죄와 허물을 들추어내며 협박까지 합니다. 자기의 입장과 다른 입장을 내 세우는 개인이나 교단이나 단체나 신학을 이단시 하며 정죄까지 합니다.

‘분노’와 ‘증오’와 ‘정죄’의 심정을 지니는 대신 모든 죄인들을 향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심정을 지니셨던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보고 싶어집니다. 저들은 모두 자신들을 극심하게 핍박했던 일본과 북한 사람들에게 ‘분노’와 ‘증오’와 ‘정죄’의 심정을 지니는 대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심정을 지니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의인’ 보다는 ‘죄인’이 보고 싶어지는 시대입니다. ‘의인’ 보다는 ‘죄인’이 되고 싶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부르시면서 용서하시고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면서 죄인들과 가까이 하셨던 것처럼 부족한 나도 죄인이 되어서 여러 종류의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도 하고 대화도 하면서 죄인들과 가까이 하고 싶어집니다.

기도를 바로 하지도 못하고 기도를 바로 할 자격도 없는 죄인이 날마다 백여 번 이상 중얼거리는 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로 오늘도 나를 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오늘도 나의 모든 죄악을 도말 하시고 깨끗하게 씻어주시옵소서! 보혜사 성령님! 오늘도 나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여 주시고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오래 전부터 이런 기도를 자주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눈물을 지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다음과 같은 기도도 자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제물 될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실 만한 제물로 만들어주시고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 특히 북한 사람들이나 모슬렘 사람들을 위해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를 간구할 뿐입니다. ‘의인’보다는 ‘죄인’이 보고 싶어지는 시대입니다. ‘의인’ 보다는 ‘죄인’이 되고 싶어집니다. 부족한 나도 죄인이 되어서 여러 종류의 죄인들과 어울려서 죄인들과 함께 살다가 죄인들을 위해서 죽고 싶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도 오늘의 한국교회를 바라보시면서 ‘의인’보다는 ‘죄인’을 보고 싶어 하실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들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두를 불쌍히 여기고 모두를 용서하고 모두를 사랑하는 주님 닮은 삶을 살다가 주님 닮은 죽음을 죽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연희동 목자와 양들 교회(2013.7.21)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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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7/18 [09:18]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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