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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2.08 [11:01]
원망에서 아멘으로(느5: 1-13)
김흥규 목사(인천 내리교회) 한국 교회 거룩성 회복 메시지
 
김흥규
▲내라교회 김흥규 목사     ©뉴스파워

사회적 모순이 돌출되다
성벽 재건 작업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습니다. 원수들의 외부 공격이 그런대로 정리되자 이번에는 내부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밖에서 원수들이 퍼붓는 공격은 오히려 유다인들의 결속력을 굳건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 이것은 공동체 전체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만 보더라도 밖에서 오는 도전과 환란은 오히려 교회의 순화와 부흥을 재촉했지만 안에서 일어난 분쟁은 쇠퇴를 불러왔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도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은 이방인들이 아닌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이제 느헤미야의 성벽 공사는 또 한 차례 중대한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부정부패의 문제였습니다. 사회 개혁이 절박했습니다. 오랫동안 되풀이 해온 불의와 착취를 추방하지 않으면 성벽 공사는 무위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극단적인 경우 내부의 불만이 폭발되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공멸로 치달릴 수도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지금까지 위기에 빠질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 왔습니다. 하지만 한참 공사가 진행될 때 터진 이 사회 정의의 문제야말로 고매한 인격에 기초한 느헤미야의 눈부신 리더십을 또 한 번 확인해줍니다.

온 유다 백성들이 성벽을 쌓고 있었을 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일이 터졌습니다. 도저히 건너뛸 수 없는 부자와 빈자 사이의 갭이었습니다. 묵과할 수 없을 정도로 불의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물론 권력자들이나 부자들에 의한 압제와 착취로 인한 사회적 불의와 경제적 불평등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상당히 오래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친 뒤 예루살렘에 귀환한 유다 사회에서 이와 같은 계층 간의 갈등과 대립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첨예했습니다. 해외에서 체류하는 동안 경제적 이윤에 눈을 뜬 상인 출신들이 예루살렘에 유달리 많았기 때문이지요.

성벽 공사 기간 동안 유다 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기근과 식량난, 그리고 과중한 세금 징수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모순이었습니다. 가뭄이 계속되면 식량난은 저절로 가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흉년으로 인해 농작물을 얻을 수 없는데 포로 귀환자들과 그 자녀들의 인구수는 자꾸만 늘어가니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으로 식량난은 커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다가 페르시아 제국에 바쳐야 할 공물과 세금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점점 늘어갈 때 그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남자들은 모조리 토목 공사에 동원되었을 때 부녀자들이 당해야 할 경제적인 압박감은 훨씬 더 심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먼저 아낙네들로부터 원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가부장제의 유다 사회에서 여성들이 불만을 표출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인데 그만큼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로 인하여 유다 사회에는 내부의 갈등이 폭발 직전까지 간 것일까요? 크게 네 그룹의 사람들이 사회적 불의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서 아우성을 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토지가 없는 상태에서 양식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2). 이들은 땅이 없으니 농사를 지을 수 없고 기근으로 양식을 구하기도 어려운 데에다가 부양해야 할 식구는 많은 사람들입니다. 생계유지 자체가 어려웠으므로 할 수 없이 느헤미야에게 도움을 청한 사람들이지요.

둘째로, 농사지을 토지는 있으나 흉년으로 인해서 곡식을 얻을 수 없게 되자 밭과 포도원과 집을 저당 잡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3). 부동산은 있지만 흉작이 계속되고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물가가 폭등하자 할 수 없이 재산을 저당 잡히고 양식을 산 사람들이지요.

셋째로, 과도한 세금을 내기 위해서 밭과 포도원을 담보로 돈을 꾼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4). 페르시아 제국은 예루살렘을 비롯한 속주들에게 해마다 엄청난 양의 공물과 세금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이들은 밭과 포도원을 담보로 큰 빚을 얻어 페르시아 왕실에 공세를 바친 사람들입니다.

넷째로, 저당 잡힌 밭과 포도원을 다 빼앗긴 채 자신의 아들딸마저도 빚을 갚기 위해 노예로 팔아야 할 위기에 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 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5).

아마 네 그룹의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이 네 번째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흉작으로 먹을 양식을 구해야만 했고 과도한 세금도 납부해야만 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자기 밭과 포도원을 다 저당 잡혀서 빚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제 때에 빚을 갚지 못하자 저당 잡힌 부동산을 부자들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래도 빚을 다 청산하지 못하자 이번에는 아예 자식마저 노예로 내주어야 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아들보다 딸이 종으로 팔린 경우가 있다는 언급은 첩으로, 즉 성적 노리개로 팔려나갔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라는 말에는 굶어죽든지 자식을 노예로 팔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이들의 기막힌 처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물론 재산을 담보로 해서 돈을 빌려주고 꾸는 것이 불법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한 정해진 기간 안에 채무를 갚지 못할 때 담보 잡힌 부동산을 압류당하고, 그래도 안 될 경우 아들딸을 노예로 넘겨야 하는 것이 합법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심각한 문제는 가난한 이들이 이와 같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부자들이 누리는 엄청난 반사 이익입니다. 부유층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극빈층 사람들의 형편을 고리대금과 같은 수단 등을 최대한 이용해서 부를 축적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분노→숙고→개인적인 책망→대회를 통한 공개적 촉구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느헤미야의 처리 방식입니다. 만일 이러한 사회적인 모순을 방치할 경우 유다 공동체는 자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의가 구현되지 않은 평화란 오래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렇게 될 경우 성벽 재건 공사도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느헤미야는 정면 돌파를 시도합니다.

백성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느헤미야가 보인 첫 번째 반응은 분노였습니다.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6). 사람이 죄에 가득차 분을 품고 또 분을 폭발하는 것은 잘못이지요. 하지만 거룩한 분노, 혹은 의로운 분노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에 한 부분이 의분(義憤)이며, 예수님을 비롯한 성서 속의 지도자들 역시 이러한 의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빈자들에 대한 부자들의 착취와 치부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가 의로운 분노를 발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정당한 분노라고 할지라도 이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하고”라는 구절(7)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 “깊이 생각하다”는 말은 분노라는 감정을 이성적인 차원으로 바꾸는 과정을 암시합니다. 느헤미야는 곧바로 자신의 분노를 여과 없이 폭발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럴 경우, 누가 보더라도 느헤미야의 분노가 거룩하고 의롭다고 할지라도 감정의 폭발만 가지고서는 사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지배층의 압제와 착취와 관련된 사회적 모순은 분노의 표출만 가지고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국회에서 의원들이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 함부로 고성을 지르는 장면을 자주 봅니다. 비록 그들의 주장과 분노가 의로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식의 직접적인 감정 폭발은 거꾸로 일을 그르치게 할 때가 더 많습니다. 느헤미야가 위대한 지도자라는 사실은 그가 이러한 분노를 잘 조절할 줄 아는 인물이라는데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분노를 안으로 삭이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감정적인 차원에서 이성적인 차원으로 돌아서는 시간을 가졌다는 말이지요. 느헤미야는 분노를 폭발시킨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차분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감정을 자제하는 시간을 가진 뒤 느헤미야는 이 엄청난 사회적 모순을 조장하는데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당사자들을 은밀히 불러 꾸짖기로 결심합니다.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7a). 사석에서 지배층 인사들의 잘못을 꾸짖은 것이지요.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느헤미야는 귀족들과 민장들, 즉 유다 지도자들이 형제에게 꾸어줄 때 이자를 받지 말라는 율법을 어겼다는 사실(출 22: 25; 신 23: 19)을 염두에 두고 폭리를 취한 것은 명백히 잘못이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이렇게 느헤미야가 부유층 인사들을 공개적으로 규탄하기에 앞서 먼저 사석에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부합됩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마 18: 15-16). 하지만 느헤미야는 이내 이 문제가 개인적인 책망의 수준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깨닫고 공개적인 대회를 엽니다. 개인적인 책망에서 대중 앞에서의 견책으로 방향을 바꾸려는 것이지요.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 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하였더니(7b-11).

느헤미야는 산발랏과 도비야를 비롯한 원수들이 일제히 기습공격을 해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잠시 공사를 중단시킨 채 대대적인 방어 체제를 구축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사회적인 부조리를 개혁하기 위하여 또 한 번 일손을 멈춘 채 대중 집회를 엽니다. 느헤미야는 원수들의 침략에 대비하는 것 이상으로 대대적인 사회 개혁 역시 긴급하다고 보았기에 한 시라도 빨리 손을 써야 할 공사를 멈춘 채 대회를 연 것입니다. 아무리 철옹성 같은 성벽이 세워진다고 해도 동포가 동포를 압제하고 착취하는 불의가 계속되는 한 그 성벽은 소용이 없기 때문이지요.

대중 앞에서 느헤미야가 지배층을 향하여 날린 직격탄은 이런 것입니다. 먼저 온갖 고생을 다해서 이방인들에게 종으로 팔려갔던 유다 동포들을 몸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왔는데 부유층이 이제 그 동포들을 또 다시 팔아넘기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판이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던지 귀족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동안 잠자고 있었던 양심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느헤미야는 계속해서 지배층에게 이방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지 않으려거든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런 뒤 궁핍한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관행이 얼마나 뿌리 깊고 널리 퍼져 있는가를 자기의 경우까지 들어가며 스스로 그 치부를 드러냅니다. 느헤미야나 친족도, 심지어 부하들까지도 가난한 백성들에게 돈과 곡식을 꾸어주는 관행에 익숙하다는 자기 고백을 한 것이지요(10).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부당한 관행에 자기와 가족들 심지어 부하들까지도 자유롭지 않다는 불편한 진실을 이실직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도자로서의 느헤미야는 언제나 홀로 의로운 척 독야청청(獨也靑靑)하지 않습니다. 자기 역시 다를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를 똑같이 저질렀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자기부터 과감하게 끊겠다는 선언을 합니다. 남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치부부터 먼저 드러낸 뒤 함께 회개하고 함께 고쳐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제 느헤미야는 우리 모두가 답습해온 관행을 그만두자고 호소합니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해왔던 고리대금업을 근절할 것을 촉구합니다. 가난한 이들로부터 빼앗은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과 집을 주인에게 돌려줄 것을 권유합니다. 또한 돈과 곡식과 새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을 꾸어 주고서 받은 이자, 즉 그것들의 백분지 일(월리는 1%, 연리는 12%)을 즉각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내일이나 다음 달, 혹은 내년에 돌려줄 것을 약속하라고 말하지 않고 지금 당장 하라고 재촉합니다.
 
혁명보다 어려운 개혁이 이루어지다
마침내 느헤미야의 권유를 들은 지배층 인사들이 단안을 내립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12).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하는데 개혁이 이루어질 찰나입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지요! 가난한 백성들을 착취하여 부를 축적한 권력층이 부당하게 얻은 부를 환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가난한 백성들에게 편취하는 이자는 물론 저당 잡힌 것을 압류하는 일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당부한 모든 잘못을 시정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피의 혁명이 일어나거나 강제로 재산을 몰수하지 않는 한 이와 같은 자발적인 부의 환원과 부정축재의 근절은 좀처럼 드문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사에 이보다 더 놀라운 기적도 드물다 할 것입니다. 그만큼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얻었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느헤미야의 청렴결백과 사심 없는 성품, 올곧은 행실을 상류층이나 하류층이나 부자나 빈자나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이나 다 믿었기에 이와 같은 대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지배층 인사들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즉각 제사장들을 불러 모은 채 그 앞에서 결심한 것을 재차 맹세하도록 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한 약속은 언제나 헌신짝처럼 폐기될 수 있으므로 제사장들 앞에서, 즉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느헤미야는 몸소 자신의 주머니를 터는 퍼포먼스까지 합니다.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13).

여기서 옷자락을 터는 행위는 일종의 저주를 상징하는 의식인데 결심한 것을 실천하지 않는 자들은 마치 호주머니를 털어버리듯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빈털터리가 될 것이라는 상징 행위이지요. 술 맡은 관원으로서의 느헤미야의 신중하고도 치밀한 성품이 또 한 번 재현되는 순간입니다. 느헤미야가 유다 온 백성들 앞에서 이러한 의식을 행하자 백성들은 다 아멘으로 화답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약속은 지켜졌습니다.

부녀자들을 비롯한 백성들의 울부짖음으로 시작되었던 사건이 내남없이 모든 백성들의 아멘으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순간이지요. 백성들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양심의 가책 없이 행해져오던 부당한 관행들이 이처럼 극적으로 근절되고 개혁된 것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억눌린 백성들의 울부짖는 아우성을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할 것 없이 공동체 전체의 아멘으로 바꾼 것은 무엇일까요? 이기적인 탐욕을 위해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던 지배층을 공개적으로 회개하도록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부당한 이득을 돌려주도록 했고 다시는 이러한 관행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도록 이끈 비결이 무엇일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느헤미야의 종의 리더십이 빛을 발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군림하는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섬기는 종이었습니다. 일신의 부귀영화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유다 백성 전체를 위하여 희생하고자 하는 느헤미야의 진정성이 부패한 지배 집단에게까지도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아무 사심이 없는 청백리 느헤미야, 그의 고매한 인격과 삶이 유다 공동체 전체에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느헤미야야말로 예수님의 말씀을 연상시키는 섬김의 지도자였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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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5/03 [07:17]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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