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군 도암면 원천리 이현필 생가를 찾아서 화순군 도암면 운주사가 지척이다. 천불천탑과 와불(臥佛)의 전설이 서린 내용을 황석영의 장길산에서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화순에 오면 으례히 운주사를 생각하고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알려진 화순 접경의 보성 대원사 길을 생각하지만 오늘 맨발의 성자요 한국의 성프란치스코로 알려진 이현필 선생의 생가를 찾아 나선다는 것 자체로도 기대감이 밀려든다.
9월의 하늘은 계절이 교차하는 환절기로 그 무성하던 초록도 서서히 지쳐가고 예고된 태풍들로 농부들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하다. 운주사 가는 길로만 알았던 도암면의 길들이 성자 이세종 선생과 그의 제자였던 이현필 선생의 뒤를 쫒는다는 왠지 모를 기대감과 문득 그려지는 어떤 두려움들마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천태산 자락, 일진광풍에도 고요함과 심산한 마음을 긴장시키는 경직이 흐르던 도암의 성자 이세종, 이공(李空)의 기도터에서 느꼈던 그런 마음이 해질녘 도암면과 춘양면을 지날 때 까지도 계속된다.
완연한 가을하늘과 바람... 작렬하는 태양과 서서히 고개숙여가는 벼 낱알들의 겸허함이 대지를 물들이고 나에게는 무딘 양심의 자성과 여린 신앙의 성찰로 인한 긴 숨을 쉬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허황된 세상의 것들과 자본주의의 칼날아래 무참하게 할퀴어지고 쪼개지는 답답함과 공허함 앞에 그대로 노출되버린 벗은 몸은 아닐런지... 성자 이현필에 대해 알면 알수록 새기면 새길수록 무시무시한 사실들이 밤마다 나의 뒤를 쫒아오고 나는 책과 인터넷을 뒤지며 밤잠을 설치고야 말았다. 오늘 이현필 생가에서 나는 처절하게 무너져 있는 나를 발견하고야 말 것이다.
맨발의 성자 이현필은 왜 다시 읽혀져야 하는가?이현필에게서 신앙을 전수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독신 수도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하루종일 맨발로 다니며 하루 한 끼로 생활하는 검소와 자기극복의 삶을 실천하였을 때 당시 기성교회로부터 ‘산중파’, 지나친 ‘금욕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동광원을 일생 동안 연구한 서울 은성교회와 은성수도원을 창설한 엄두섭 목사는 “이현필과 동광원의 행보가 기성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독선적이고 과격하게 보일 수 있지만, 기성교회에 피해를 끼치거나 위험한 단체가 아니라 고요히 예수의 길을 가는 순수한 수도공동체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이현필을 “맨발, 탁발, 남루한 모습으로 죄인 됨과 약한 자임을 고백하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였다.” 라고 평가하며 그를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맨발의 성자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 전남 화순군 도암면 원천리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의 생가에서 © 뉴스파워 강경구 | |
6.25 전쟁으로 피폐한 한반도는 좌우의 극한대립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데올로기란 대못으로 동족을 죽이고 학살하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전쟁중 사망한 사람들 중에 상당수의 기독교인이 있었고 이현필이 살았던 당시의 광주와 전남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화례 선교사는 수피아여고 교장으로 당시 박석현 목사가 시무하던 양림교회에서 피난을 가지 못한 상황에서 이현필과 동광원 식구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고 그들과 2개월 넘게 생활하면서 동광원과 이현필의 신앙에 대한 순수성과 신실함을 확인하여 기성교단의 이단 시비를 해소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했다고 한다. 그녀를 위해 동광원 식구들은 8명이나 순교하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유화례 선교사, 그녀는 1941년 신사참배 문제로 수피아여학교를 자진해서 폐교시켰던 장본인이고, 여수애양원의 한센인들의 어머니로 추앙받고 있는 사람이다.
영산포 관파 교회에서 일본인 관파(官波)목사를 통해 주님을 영접했다.
한일 병합 100년이 된 지난 8월 29일 하루종일 매스컴은 그날을 기억하자고 외쳐댔고, 일제의 만행과 독도 도발이라는 끊임없는 제국주의적 침탈본능을 일깨우자고 주장하였지만 다시 한일관계는 여전히 자국의 정치사회의 논리로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사실 일본의 기독교를 말할 때 우려의 목소리가 있고 일본 선교의 한계를 논하는 여러 기고글들이 관심을 끌고 있다. 여기서 일본인 목사 관파(官波)를 주목해 볼 필요도 있다. 이 관파(官波) 목사는 내촌감상(內村鑑三)의 계열로 대서업을 하면서 교회를 세웠는데 당시 그곳에 시무하던 여전도사와 관파 목사의 도움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한반도의 땅 전라도 나주 영산포 포구에서 관파 교회를 열어 직업을 가지고도 목회를 했다면 일제 식민지로써 수탈과 억압의 땅에서 일본인으로서 그의 신앙은 어땠으며, 하나님을 믿는 그의 마음 안에 조선의 후예요 한국 사람이었던 이현필을 대했던 그의 삶에 대한 관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영산포... 관파... 기자노트의 한 켠에 메모를 하고 포학한 식민지 국가로 이웃 나라를 침탈한 일본의 만행이 싫었지만 자꾸만 일본인 관파(官波) 목사에게 관심이 가지는 것은 그를 통해 이현필이 신앙의 첫발을 내딛었다는 것 때문이다.
▲ 방산교회는 이세종과 이현필 두 사람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로 지금은 등광리교회(1999년 초부터 현재 정칠영목사 시무)가 되었다. ©뉴스파워 강경구 | |
이현필은 하루도 한시도 쉬지 않았다. 이현필은 탁발 전도단을 만들어 제자들에게 신앙훈련과 전도훈련을 시켰으며, 전남 화순군 화학산 청소마을에서 고아원을 시작하여 1950년 1월에는 광주에서 정인세 선생을 통하여 ymca를 중심으로 ‘동광원’이란 이름의 고아원이 생기자 이 선생과 그의 제자들은 ymca가 시작한 동광원의 고아들을 헌신적으로 섬겼고, 결국 동광원은 이현필 선생의 운동단체가 되어 주도적으로 사회구제와 복지의 초석을 다졌다.
오갈 데 없는 많은 사람들을 “하룻밤씩 재워 주는 운동”은 나중에 ‘귀일원’(歸一園)의 모체가 되기도 했다.
여순사건과 전쟁에 휘말린 민족의 역사 현장에는 고아뿐 아니라 과부, 불구자, 무의탁 노인, 문둥병자, 폐결핵 환자들이 들끓었다. 최초에 10여명에서 6백여명으로 늘어나는 등 동광원과 귀일원 사역은 헤아리기 어려운 규모로 성장한다.
▲ 봉선동 귀일원은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장애우 돌보기와 섬김이 실천되고 있는 곳이다. © 뉴스파워 강경구 | |
1964년 이현필 선생은 ‘일작 운동’ (一勺運動)을 시작하여 매일 밥을 지을 때 자기 몫에서 한 숟가락씩 떠서 모았으며, ‘십원 운동’도 벌여 누구나 십 원씩 덜 쓰고 모아서 불쌍한 겨레를 돕자는 것으로서 오늘날 국민성금과 각종 모금사업의 모체가 되기도 했다.
동광원의 생활원칙은 첫째, 정절을 지킬 것. 둘째, 가난하게 살 것. 셋째, 순명 할 것. 넷째, 깨끗한 사랑으로 교제할 것. 다섯째, 부지런히 일해서 자작자급 할 것이 있으며, 동광원은
이현필 선생의 운동 아래 수도 공동체를 대변하고 ‘귀일원’은 사회복지 사역을 대변하게 되었다. 이현필 선생의 제자인 김준 초대 새마을 중앙 연수원장이며 중앙회 회장은 이현필의 치열한 삶과 실천가적인 모습들을 새마을운동에 그대로 도입하기도 했다
나의 무덤은 평토장(平土葬)으로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현필 선생은 1964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을 일컬어 죄인의 시체니까, 아무도 모르게 하고, 아무나 함부로 밟고 다니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관(棺)도 쓰지 말고 자기는 죄인이니 거적대기에 싸서 내다 파묻으라고 한 것이다. 최후의 순간이 가까워 오면서 이현필은 기도하기를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파 무척 애썼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마다 주님은 저를 피하셨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메 못참겠네. 아이고 기뻐!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어!...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 하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엔 천하의 상거지 꼴인 이현필에게 느껴지는 열정의 리더십과 삶에 대한 뜨거운 감동에 사람들은 미쳐서 이구동성으로 그를 따랐고 큰 감동과 눈물로 평생을 순결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봉사로 살아가고 있다. 맨발의 이현필의 생가 앞에서 구두와 양말을 벗고, 차는 멀리감치 주차해버리고 생가 주변을 돌아보다가 불현듯 천태산과 등광리, 그리고 이곳 생가가 있는 도암일대를 테마로 하여 예수의 살아있는 정신과 영성을 체험하는 곳으로 만들어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돌아서 나왔다. 잠깐이지만 맨발에 나있는 상처를 닦으며 느끼는 이 새털처럼 가벼워져버린 신앙의 무력감과 존재감앞에서의 과감한 탈출을 꿈꿔본다.
▲ 광주 수피아 여학교장 유화례 선교사를 지게에 싣고 모시고 들어가 1개월 남짓 숨어 지내던 곳이 지척이다. © 뉴스파워 강경구 | |
▲ 9월 10일 광주 남구 봉선동 귀일원에서 호남신학대학 차종순 총장을 모시고 열리는 이현필의 생애와 한국적 영성 세미나를 기대하며 ©뉴스파워 강경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