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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0.23 [19:01]
어떤 종류의 믿음인가?
권력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내면의 성숙도를 보여야
 
김상재

죤 웨슬레는 신앙을 이해하는 핵심단어가 바로 ‘권위’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한 웨슬레의 통찰은 전적으로 부패한 우리 인간이 그 부패를 이기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힘은 칼빈의 엄중한 전적 타락교리가 아니더라도 인간 스스로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성찰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 스스로’의 내부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극복점은 오직 인간의 바깥, 즉‘위로부터’내려오는데 그 내려온 ‘위’는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인간의 조건을 걸고 넘어갈만한 ‘절대’의 권위로 설정되고 경험된다.
 
그 ‘절대’의 좌표, 구축 점에 걸려 뒤집혀서 비로소 인간은 절대좌절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것을 그치고 모든 것이 ‘가능한’절대 소망과 긍정, 거듭나는 의인이 된다는 것이 우리 신앙의 기본 정통 공식인데 이러한 기본을 웨슬레는 핵심적으로 잘 말해 준 것이다.

그러면 신앙, 즉 진리는 관념이나 어떤 내적 집적물의 통합적 우주론으로 설명하는 자연종교와는 달리 필연적으로 권력적인 성격을 띠고 그 권력적 권능을 추구한다. 허무와 죄의 고통, 죽음, 좌절의 바다를 역동적으로 흡입, 부정하고 새로운 생명과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힘과 그‘믿음’능력은 그 자체가 벌써 권력적 능력이 아닌가? 

 
▲ 미켈란젤로의 벽화 '바울의 회심' 신앙의 힘은 이와같이 무한과 유한의 대립적 역동성을 기본으로 하는 권능적 힘이다. 그러나---     © 김상재

물론 이 권력은 예수님께서 스스로도 명백하게 명시 하셨듯 세속적인 차원의 권력은 아니다. 내적 권력이고 영적 권능으로서의 권력이다. 그 내적인 힘으로서의 내면성이 강조되면서 결국은 외면의 현실까지도 그 힘의 영향력에 의해 변개가 되지만 그 내적 힘의 근거적 원리로서는 세속적 역학의 힘으로서는 그러므로 부정된다. 곧 가이사의 권력이나 로마제국의 정치적 힘으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다스리는 신앙적인 힘으로서의 힘을 강조함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그래서 성경은 세속의 권력이나 가이사의 제국을 가치적으로는 부정한다. 그 힘은 허위요 지나가는 바람, 생명과는 무관하게 가벼운‘겨’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의 힘은 이 세계내적 시간 안에서는 영역을 넓혀 가능한 한 선교적으로 많은 대중을 확보하고 그들의 눈과 귀에 들려져야 하므로 코스모폴리탄적인 확대를 지향한다. 세속의 권력과는 또 다른 영역으로 차원을 달리하지만 그 다른 영역에서는 또한 필연적으로 확대와 포괄, 다변한 표현력과 대중적인 힘을 얻고자 하는 권력의지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고백하는 그리스도는 계시록에 선포되는 것처럼 역사의 터미네이터이며 세속적 역사와 물리적인 우주까지 다 통섭, 포괄하는 심판의 주이시며 최후의 언어자가 아니신가? 


결국 이렇게 하나님의 진리는 ‘잃어버린’우주와 인간을 원래의 창조주의 뜻대로 돌리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만큼 그 내용의 귀착점은 전 세계이며 전 우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진리의 내용과 언어는 필연적으로 항시 전체를 포월 하거나 그 전체의 역학점을 뒤집는 권능으로서의 영적인 권위의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진리는 이와 같이 결국은 우리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투과해 의미화하고 그 뜨거운 의미로 삶의 전 부분을 변개시킬 수 있는 영적인 힘인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진리의 특징적인 역동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은 언제든지 자연종교의 범주로 휘어지고 퇴행적으로 내려앉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한 편, 우리 신앙의 이러한 (관념이 아닌) 권위의 역학점을 핵심으로 하는 주 내용은 일찍이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지적해 주었듯이 우리 인간들의 연약함으로 인해 그 전달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부작용들을 생산할 수 있어 일말의 우려들을 남길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별히 진리를 전달하고 경험하는 사람과 그 사람들의 문화가 미숙할수록---. 

먼저는 흔히 진리의 권위와 진리의 전달자의 권위를 동일시하는 오류들이다. 자신이 그 힘에 의해 역동적인 변화를 경험한 만큼 그 진리를 전달해 준 전달자에게 필요이상의 권위를 투사하는 부작용이 그것이다. 말씀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충분한 경외심과 존경심을 표하는 것은 성경도 교훈하는 바이지만 어떤 경우는 그 경외와 존경이 지나쳐서 그 전달자에게 불필요할 정도로 의존적이 되고 몰이성적으로 맹목적이 되는 경우들도 흔히 있다. 이런 경우는 전달자의 영적 능력이 클수록 더 잘 나타나고 심지어 이런 예에서는 전달자에게 치명적인 도덕상의 문제가 나타나도 그 전달자를 변함없이 추종하는 그런 심리적 현상들에서도 잘 나타난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도 사례로 보고해 주었듯이 미국의 유명한 tv설교자들이 불미스런 스캔들로 무너졌을 때 여전히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며 그들을 추종하며 따랐던 일단의 사람들이 그런 경우들이라고 할 수 있다. 
 
 
▲ 피사의 사탑과 그 탑보다 더 기울어진 것으로 유명한 독일 북부의 수르후젠교회당. 오늘날 교회는 사회의 '흔들리지 않는'안식처요 중심이 되기     ©김상재

 
그리고 이런 ‘권위’의 전달과정에서 보여 지는 또 하나의 미숙한 점은 진리라고 하는 그 권위에 의해 진리의 권위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고 말하는 그 전달자의 카리스마나 인상적인 확신에 의해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예이다. 이런 경우도 앞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는 부작용으로 신앙인의 진리에 대한 확신과 정체성이 주체적으로 수립되지 못하고 그 진리에 대한 믿음이 설교자의 개인적 오류와 한계들에 좌우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건강한 그림이 아니다. 이런 현상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므로 일단의 설교자들은 진리 그 자체의 힘에 지배받으려 하기 보다는 진리보다 먼저 자신의 언행과 목소리, 제스쳐가 권위 있게 보이도록 애쓰려는 노력들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다음으로는 진리의 범주, 그 신앙 권위의 범주에 대한 오해와 이해상의 오류들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다변한 부작용들을 들 수 있다. 진리가 권위의 성격을 띤다고 할 때 그 권위를 세속적인 차원과 잘 분간을 하지 못하고 쉽게 물리적인 방식과 표현으로 이해되고 표출되는 현상들이 그것이다. 곧 진리의 권위는 그 진리를 전달하는 성직의 권위(획득된 권위가 아닌 스스로 주장되는 차원에서)로도 이해되어 일종의 권력으로도 쉽게 오인되고 그 ‘권력’의 권위를 위해서는 일정수준 이상의 물리력이 따라야 하고 그에 맞는 지배력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곧 진리는 지배하고 과시하는 형식으로도 나타나야 한다는 가치관이 그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야만 하나님의 성공으로 평가되고 거대행사와 대형 이벤트, 자극적인 물량으로 시위하고 표현되어야 제대로 된 기획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현상들이 특히 우리 사회에 자주 나타날 수 있는 것은 현실적으로 물량과 자극의 방식으로 해야 통할 수 있다고 믿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하위문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권위에 대한 미숙한 이해는 권위를 자연스럽게 또 기존의 정치질서나 현실적으로 힘을 행사하고 있는 특정 이념과 동일시하고 그 세속적인 권위와 연계시키는 집착과 발상들로 귀착되기도 한다. 내면으로 들어가는 진지한 방법보다는 눈에 보이는 손쉬운 방법들을 택하는 것이다. 정교분리의 원칙을 천명하면서도 이렇게 실제적으로는 야합적 정치참여를 통해 권력적 힘을 확보하기를 원하고 그러면서도 좌파적 참여를 향해서는 정교분리 운운하며 부정하는 이율배반적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진리가 일반적으로 이렇게 표현되고 추구되어 진다면 그 진리는 외면을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세속의 권력과 힘, 그 정글의 법칙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게 세속과 구분이 어려운 이런 시장성 차원의 진리라면 결국 그 진리는 언제든지 권력욕구로 변질될 수 있는 진리이고 욕망의 대상으로 쉽게 전락할 수 있는 ‘열린’진리가 아닌가? (그렇게 되면 결국 교회도 신앙의 이름과 그 보증된 권위로 신앙인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세속적인 힘과 물량을 하나님과 신앙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더욱 영악하게 ‘세속적인’ 사람들을 대량으로 양성해 내는 집단으로도 쉽게 변질될 수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통치를 이렇게 일면 세속적 힘의 연장으로 인식하려는 이러한 경향은 달라스 윌라드의 말처럼 우리가 아직도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인간적 수단에 우리가 스스로 사로잡혀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우리 인간들의 연약과 한계, 미숙한 점들을 통찰해 보면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권위’와 영적 ‘권세’(힘)이라고 하는 기독교 진리의 정통적 이해를 잘 분별하고 정확하게 믿을 수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일차적인 믿음 못지않게 그 권위를 바로 믿고 그 힘을 이해하는 해석도 중요해 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운명을 변개시키는 이 놀라운 믿음의 권능! 이 권위에 붙어있는 총체적인 진리의 범주들을 잘 이해하고 아름답게 선용할 수 있는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도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헤아린다면 믿음이라고 하는 권위 앞에서 우리가 성찰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어떤 심리학자의 충고처럼) 믿음이냐? 아니냐? 하는 것과 함께 동시에 그 믿음이 어떤 종류의 믿음이냐? 하는 반성적 질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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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12/29 [14:56]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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