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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0.24 [11:01]
청교도운동, 지펴진 개혁의 불씨
청교도 영성 1
 
원종천

16세기에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요한 칼빈은 큰 업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개신교회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 후 개신교회는 영적 쇠퇴의 길을 가고 있었다. 교회는 영적으로 메말라가고 있었고 교리 논쟁과 분파 투쟁으로 말미암아 교회 분열의 조짐마저 보였다. 종교개혁 1세들이 보여 주었던 신학과 경건의 적절한 조화가 깨진 결과였다. 신학과 경건의 괴리는 교회를 어려움으로 내몰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에서 뒤늦게 시작된 교회 개혁 운동인 청교도운동은 내면적 경건을 불러일으키며 신학과 경건의 조화를 회복시키는 운동을 전개했다. 나아가 청교도들은 이상적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영국 국교회의 기득권 세력에 항거했고, 사회와 국가에 책임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강조하며 국내에 의미 있는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이미 침체기에 들어선 유럽 대륙의 개신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이런 측면에서 청교도운동은 개신교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침체의 길을 가고 있던 개신교회의 영적 부흥에 청교도 신앙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청교도운동이 어떻게 발생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다.



개신교 지도자들의 수난

1534년 영국의 왕 헨리 8세(통치, 1509∼47)는 수장령을 선포하고 영국 교회를 로마 천주교로부터 탈퇴시켰다. 이제 영국 교회는 국왕을 수장으로 하고 독자 노선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교회개혁은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종교개혁과는 성격이 달랐다. 국왕이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로 영국 교회를 가톨릭교회로부터 떼어냈기 때문이다. 헨리는 신앙적 진리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진정한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외형적으로는 영국 교회가 개신교임을 선언했지만 로마 가톨릭으로부터의 내용적 변화는 사실상 없었다. 헨리는 신약성경을 번역한 윌리암 틴데일을 처형했고 자신이 원하는 이상의 교회 개혁은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헨리가 죽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1547∼1553)가 즉위했다. 9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 그를 위하여 개신교인 에드워드의 외삼촌은 섭정을 했고 유럽 대륙의 개신교운동에 문호를 개방했다. 이에 대륙에서 개혁자들이 들어와 개신교 사상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영국 교회에 의미 있는 개신교 교회 개혁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에드워드가 15세의 나이에 죽고 메리 여왕이 등극하게 되었다. 영국이 교회 개혁 와중에 엄청난 혼란에 빠져드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가톨릭 교도였던 메리 여왕(1553∼1558)은 개신교가 된 영국을 1534년 수장령 이전으로 환원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영국은 다시 가톨릭 국가가 된 것이다. 메리는 교회 정책에 순응하지 않는 300여 명의 개신교 지도자들을 처형했다. 헨리 시대에 유럽 대륙으로 피신했던 가톨릭 성직자들은 영국으로 돌아왔고 개신교 지도자들은 수난의 시대를 맞이했다. 메리의 탄압을 피해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은 유럽 대륙으로 피신했고, 이들을 제네바에 있는 요한 칼빈이 영접했다.


망명객이 된 개신교도들은 제네바 개신교회를 경험하며 칼빈의 신학적 영향을 받았다. 칼빈 가르침의 영향으로 성경과 개혁주의 신학의 진수를 습득했고 칼빈이 주도하는 제네바 교회의 모습을 보며 이상적인 교회 모습을 꿈꾸게 되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 이들은 특별한 관계로 결속이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공동운명체의 일원으로 생각했고, 같은 뜻과 목표를 가지고 영국 교회의 개혁을 위한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던 것이다.



청교도들의 영국 교회 개혁 요구

1558년 메리 여왕이 죽고 엘리자베스 여왕(통치: 1558∼1603)이 왕좌에 올랐다. 기다리던 때가 온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개신교였다. 그녀는 영국에 신수장령을 선포하여 영국 교회의 개신교 정체성을 회복하고 영국 교회를 다시 가톨릭 교회로부터 분리시켰다.


때를 기다리던 제네바 망명객들은 영국에 돌아왔다. 그들은 제네바 개신교회의 모습을 보았고 칼빈의 영향하에 교회의 참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고 돌아왔다. 이들은 영국 교회를 지대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 교회에는 많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잔재들이 남아 있었다. 영국 교회 성직자들은 아직도 가톨릭 사제의 성직복을 입고 있었고, 세례시에 십자가 징표를 남기고 있었으며, 성찬식 때에 수찬자들의 무릎을 꿇게 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 개혁에 뜻을 가진 성직자들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예식들에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그들에게는 ‘청교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청교도들에게 영국 교회의 예식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신앙의 부재였다. 청교도들의 눈에는 일반적으로 영국 교회 회중이 무지하고 비윤리적이고 부패하게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국 교회는 좋은 교사들이 턱없이 부족했고 많은 성직자들도 무지하고 부패했다.
영국 교회는 이상적인 교회상으로부터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고, 영국 교회의 많은 성직자들의 자세에 문제가 있었다. 이 세상의 교회는 이상적인 교회가 아니고 현실교회이기에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무형교회(이상적 교회) / 유형교회(현실적 교회) 구분의 신학적 논리는 영국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성공회 성직자들로 하여금 문제 많은 영국 교회의 현실에 안주하게 했다. 청교도들에게 이러한 자세는 용납될 수 없었다. 비록 이 세상에 있는 유형교회가 완전한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도, 성직자들은 이상적인 교회를 향하여 최선을 다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마음의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교회에 대하여 그와 같은 자세를 촉구하는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에 치리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치리가 되지 않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었고 교회의 개혁을 막는 것으로 보았다. 치리는 한 영혼을 귀히 여기는 것으로, 범죄한 한 영혼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단계적으로 그를 돌보고 권면하고 도전하고 채찍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18장 15∼18절에서 주님이 가르치신 치리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 치리를 위하여 주님께서는 천국 열쇠를 교회에게 주신 것이다(마 16:19). 청교도들의 요구는 점점 강해졌다. 그동안 영국 교회 감독들에 의하여 남용되던 유명무실한 치리권을 성도들을 일선에서 돌볼 수 있는 일반 성직자들에게 돌려주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교회의 진정한 개혁을 도모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왕정과 청교도 사이의 충돌

영국 교회는 국가교회로서 왕이 교회의 수장이고 감독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감독제도란 왕이 감독을 통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10년 기간 동안 이러한 청교도들의 주장은 여왕과 감독들의 귀에 거슬렸다.


왕정과 청교도 사이의 심각한 충돌은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였던 청교도,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가 1569년에 교회 정치의 민주화를 표면화함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성직자들의 근본적 동등성을 주장했고, 개 교회를 치리하기 위한 치리장로의 임명과 회중에 의한 목사 선출을 교회가 갖추어야 할 올바른 제도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제네바 교회의 모습이었고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는 감독제도에 대항하는 장로교 체제였다. 카트라이트는 교회와 정부의 분리를 주장했고, 성도들을 신앙적으로 부흥시키는 올바른 교회를 위하여 민주주의 형태의 대의정치 체제를 제창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의 교회정치 제도는 영국 왕정에 위협을 주는 것이었다. 왕정과 성공회 측은 카트라이트의 제안을 받아드릴 수 없었고, 오히려 그를 대학에서 직위해제시켰다. 이 사건은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동료들과 제자들을 동요시켰다. 그들은 영국 교회 개혁을 위하여 장로교 제도를 추구하며 카트라이트의 주장을 다시 정리하여 보급시키기 시작했다. 이것은 장로교운동이라고 일컬어졌고, 강한 반체제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영국 교회 감독들은 교회의 예배 형식과 정치제도에 순응하지 않는 성직자들에게 탄압을 가했다. 청교도들은 탄압의 대상이었고 정직과 투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로교운동은 약 20년 동안 진행되었으나 결국 탄압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청교도운동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단지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반체제운동은 중단되었으나 그 이후 더 강력한 청교도운동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개인경건 운동이었다.



원종천·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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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12/29 [13:18]  최종편집: ⓒ newspower
 
뉴스
연재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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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미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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