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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7.21 [03:02]
당신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일까?
정성민 교수의 <신앙과 신학의 만남>
 
정성민

운명의 아이러니를 보여준 9.11 테러

2001년 9월 11일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아주 커다란 상처를 남긴 날이다. 그 당시 나는 뉴욕 롱아일랜드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9.11 당시의 상황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날 아침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엄청난 일이 미국에서 벌어진 것이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가루로 변해버렸다.

첫 번째 비행기에 공격당한 빌딩은 불타고 있었고 소방대원들은 불을 끄기 위해 계단으로 올라갔다. 소방대원들이 계단의 중간 쯤 올라갔을 때 그 빌딩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화재를 피하려고 계단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 계단은 삶과 죽음의 희비가 엇갈리는 운명의 길이었다. 과연 살 수 있을까 두려움에 떨며 계단을 내려오던 사람들은 무사히 살아났고,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겠다고 계단을 오르던 소방대원들은 빌딩이 무너지면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불을 끄러 올라가는 길은 바로 죽음의 길이었고, 불을 피해 내려오는 길은 생명의 길이었다.

그 누구도 쌍둥이 빌딩이 비행기 한 대로 인해 그렇게 폭삭 주저앉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날 테러를 주도한 테러범들조차도 그렇게 파괴적인 결과는 예측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튼 세계가 깜짝 놀란 사건이 바로 내 눈앞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가혹한 운명의 아이러니를 보여 준 사건이 뒤이어 일어났다. 또 다른 쌍둥이 빌딩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바로 옆 건물이 비행기에 의해 공격당하는 정말 믿을 수 없는 꿈과 같은 장면을 목격하였다. 사건을 직접 목격하던 두 번째 빌딩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스라치면서 일제히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일하는 바로 옆 건물에 정말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고 다행히 자신이 일하는 빌딩은 무사하다는 통화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또 다른 비행기가 정말 아주 정면으로 그  빌딩을 공격하였다.

그 때 어떤 사람은 자신이 무사하다는 전화를 거는 도중이었다. 그는 통화를 나누던 자신의 가족에게 “어머나! 어머나! 또 다른 비행기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어요! 정말 이럴 수가! 아~ 악!”하는 비명을 남긴 채 통화가 끊겼다.

첫 번째 빌딩은 비행기와 비스듬히 부딪힌 관계로 빌딩이 서서히 붕괴되어  많은 사람들이 대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빌딩은 테러범들이 비행기를  정면으로 충돌시켰기 때문에 사람들이 미처 대피하기도 전에 붕괴되고 말았다. 정말 자신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면서 옆 건물의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죽게 되었다.

과연 쌍둥이 빌딩에서 죽을 것 같던 사람들이 극적으로 살아나고, 정말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죽은 사건은 필연적인 일이었을까? 아니면 우연적인 일이었을까? 인간에게는 자신들이 모르는 또 다른 세계에 의해 미리부터 결정된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운명이냐 자유냐, 이것이 문제로다!

피조물 중에 하나님을 의식하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인간이다. 아름다운 지구와 태양계 그리고 수많은 은하계의 별들은 하나님의 신기하고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또한 지구의 수천만 가지의 생물들은 오늘도 그들의 호흡을 통해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하나님의 커다란 손길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에 비해 피조물인 인간은 너무나 무능하고 연약하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바꾸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한치 앞의 미래도 내다 볼 수 없는 그렇게 초라한 존재이다. 인간은 때때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삶을 한탄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전도서 기자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생기를 주장하여 생기로 머무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자도 없다.” (전8:7-8)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 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전 9:1)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인간의 무능함은 서로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이성과 의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또는 뜻하지 않던 곳에서 의외의 해결점을 찾아냈을 때 질문하게 된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애초부터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는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어진 운명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일까?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철학적으로 결정론이라 하고, 신학적으로 예정론이라고 한다. 인간의 미래는 필연적인가 아니면 우연적인가? 인간의 삶은 이미 예정되었는가 아니면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와 선택에 달렸는가?

지난 수 천년동안 필연과 우연, 예정과 자유라는 주제는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신학자들에게 있어서도 비켜갈 수 없는 필수적인 논쟁거리였다. 과연 ‘필연과 예정’ 그리고 ‘우연과 자유’라는 서로 극적이고 대립적인 주장은 서로가 만날 수도 화해할 수도 없는 영원한 평행선상에 있는 것일까?

운명적 만남

나는 대학시절 지금의 아내와 교제를 하였다. 당시 신학생이 연애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배우자인지 아닌지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왕이면 교제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고 하나님이 정해 준 사람과 순조롭게 만나 결혼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에게  운명적인 사건이 다가왔다.

1989년 3월 1일 아침에 나는 수염을 깎기 위해서 면도기를 찾고 있었다. 그 전날 밤에 고향 집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신학대학교 기숙사로 돌아올 때 일회용 면도기 3개를 분명히 샀는데 이상하게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동안 면도기를 찾아 헤매고 있는데 기숙사에서 방송이 울려 퍼졌다.

“정성민씨! 면회 왔습니다.”

당시의 학교 기숙사는 남녀로 구별되어 있었고, 남자 기숙사는 금녀의 집, 여자 기숙사는 금남의 집이었다. 면회 장소인 1층 방송실로 나가보니 지금의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내게 전해주고 떠났다. 방으로 들어와 선물을 뜯어보니 당시에 매우 비싸고 귀한 면도기 “질레트” 세트가 들어있었다. 그 때 나의 몸은 전율에 감싸였고 하나님이 주시는 강력한 메시지가 전달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독교인은 이러한 놀라운 사건들을 경험할 때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섭리’ 내지는 ‘인도하심’이라고 말한다.

운명과 선택이 왜 중요한 걸까?

과연 인간의 운명은 정해진 것일까? 아니면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달렸을까?

만약 인간의 운명이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정해져 있다면, 인간의 삶은 참으로 비참해진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지 정해진 각본대로 움직여야하는 연극배우에 불과하거나 정해진 컴퓨터 프로그램대로만 움직이는 로봇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해진 운명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다.

반대로 정해진 운명이란 본래 없는 것이고, 인간의 미래가 인간 스스로의 불굴의 개척정신과 노력에 의해 좌우된다면, 과연 인간의 삶은 비참한 상태를 벗어나게 되는 것일까? 정해진 운명이 없다는 것은 이 세상은 단지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다.

정해진 운명이 없는 우연한 세상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인간은 불안하게 되고, 더 나아가 사후세계에 대한 보장도 사라지면서 인간의 삶은 단지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허무한 존재가 된다.   

이 책을 읽는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과연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와는 반대로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가?

이제부터 기독교적 운명론을 살펴보도록 하자. 

<성도의 운명은 미리 정해졌는가?>

기독교적 운명론은 예정론이다. 예정론은 하나님이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를 미리 선택하셨다는 신앙이다. 예정론은 성도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기독교 교리 중 하나이지만 기독교 신앙의 모든 교리 중 가장 당혹스럽고 난해한 교리이기도 하다.

성도들에게 있어 예정론은 애매모호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때론 괴상하게도 여겨진다. 신학자들에게조차도 “예정이냐 아니면 자유의지냐”며 신학적으로 따지는 것이 탁상공론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왜냐하면 예정론은 인간이 알 수도 그리고 이해할 수도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영역을 다루기 때문이다.1)

뭐!? 벌써 결정 됐다구?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천국에 가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가르친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따라서 기독교의 예정론은 하나님이 예수를 믿을 자들을 미리 정해 놓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다루는 영혼구원에 관한 운명론으로 좁혀진다. 그렇다면 예정론은 비신자가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예수를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다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는 예수를 믿고 싶지 않아도 자기의 뜻과는 달리 예수를 믿게 되고, 반대로 하나님에게 선택받지 못한 자는 예수를 믿고 싶어도 자기 의지와 달리 믿을 수가 없는가?”라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 바로 예정론이다.

과연 하나님은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를 미리 선택하셨는가?

성경에 나타난 예정론

과연 하나님은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를 미리 선택하셨을까?
이제부터 성경에 나타난 예정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을 믿는 사람들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인간의 구원을 전개해 나가신다. 하나님은 세상만사를 자신의 뜻대로 이끌어 갈 능력과 권한을 갖고 있는 분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에 기초한 하나님의 권한은 무제한적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권한을 우리는 하나님의 주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주권은 구원받을 자를 미리 선택하실 수 있는 권한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을 통해서 예수를 믿을 자와 믿지 못할 자를 미리 정하실 수 있다. 우리는 성경 곳곳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이러한 예정론을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요한복음 6:44)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15:16)

이러한 예정론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서도 발견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가지고 예수를 믿을 사람들을 미리 선택하신다는 선택사상을 주장하고 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4-5)

그런데 우리는 ‘선택받은 성도들의 입장으로는 기쁘고 감사할 일이지만,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찌 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요 편애하시는 분이다.

특정한 사람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은 불공평한 하나님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을 내세운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주권은 구원받을 자를 미리 예정할 수 있는 충분한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9장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그로 인한 선택을 가르친다.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0-13)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0-21)

이러한 바울의 선택과 주권사상은 출애굽기 33:19절에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과 일치한다. 이는 또한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하신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 20:13-15)

이제 우리는 예정론이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성경적인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예정론 사상은 위대한 초대교부이며 서방신학자인 어거스틴2)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종교개혁자 칼빈3)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예정론이 좋다?!

예정이란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대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말한다.
우리의 미래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은 피조물인 우리에게 안심과 평안을 가져다준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 16:9) 

전도서 기자는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라고 고백하면서 세상만사에 대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고백한다.

에스라 선지자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나의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스 7:28)”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 속에 있는 삶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를 고백한다. 더 나아가 험난한 삶 속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나 죄조차도 이미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개인적인 죄책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나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믿음은 나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부여해 준다. 더 나아가 이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 그 일을 성취하고자 하는 사명감까지 생기게 된다.

또한 예정론에서 말하는 선택사상은 하나님이 나를 특별하게 사랑하신다는 은총에  감격하게 된다. 아무나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사람만이 예수를 믿을 수 있는데, 내가 바로 그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우리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감격하며 감사하게 한다.

운명적인 늦잠

2001년 9.11일 뉴욕의 아침, 내가 섬기던 교회의 성도들은 예배당에 모여 울면서 기도하였다. 왜냐하면 담임목사님의 아들인 데이빗이 쌍둥이 빌딩에서 일하는데, 연락이 두절되었던 것이다. 당시 9.11사태가 벌어진 아침, 뉴욕의 맨하탄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전화도 불통이 되었다. 다행히 오후에 데이빗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때 목사님과 성도들이 안도의 한 숨을 쉬면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가 살아난 것은 그 날 아침에 늦잠을 잤기 때문이었다. 그는 평소와는 달리 그 날 늦잠을 자고 조금 늦게 출근했는데, 전철에서 내려서 쌍둥이 빌딩으로 향하는데 수백 명의 사람들이 정신없이 우르르 도망치는 것이었다.

데이빗은 순간적으로 사태의 긴급함을 느끼면서 정신없이 달리는 사람들에 밀려 자신이 왜 도망쳐야 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사력을 다해 뛰었다. 알고 보니 자신이 근무하는 쌍둥이 빌딩이 그 순간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5-10분 차이로 늦게 출근한 것이 그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 아니 그날따라 늦잠을 잔 것이 그를 구한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극적이고 기적과 같은 구원을 체험하게 된 사람들은 자신의 일생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안정감”과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예정론, 그럼 이건 어떻게 하나?

예정론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안정감”과 예수를 믿도록 선택받았다는 “자신감”을 주는 반면에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점도 아울러 갖고 있다.

만약 인간의 미래가 예정되었다면, 인간에게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하나님이 자신의 무한한 능력과 권세로 이 세상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계획대로 이끌고 계시다면, 인간 개개인의 운명도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정해진 운명에 갇힌 인간들은 하나의 로봇에 불과하다. 과연 인간은 정해진 각본대로 살아가야 하는 연극배우에 불과한 것일까?

인간은 주체적인 존재이다. 어린아이들은 밥을 먹을 때 엄마가 옆에서 거들어 주려고 해도 꼭 자기가 숟가락을 들고 직접 음식을 먹으려고 한다. 온 밥상이 어지럽게 난장판이 되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주체를 갖지 못하고 단지 주어진 각본대로만 움직여야한다면 주체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이 세상은 아무런 재미도 의미도 없는 삭막한 곳이 될지도 모른다.

또한 만약 세상만사를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예정대로 그리고 각본대로 진행되어진 삶인데, 어찌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나 잘못을 그들에게 탓할 수 있겠는가? 예정된 계획이나 각본의 문제가 아닌가?

만약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전적으로 예정되었다면 하나님은 이 세상의 무질서와 악의 문제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악이 만연되어 있고, 무질서와 불공평한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어디서 이러한 악이 왔을까? 예정론에 의하면 하나님이 세상의 악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인류가 경험하는 자연적인 재앙, 전쟁, 암과 같은 질병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책임을 져야한다. 예정론이 극단화되면 하나님은 결국 세상의 악과 죄를 만드신 분이요, 폭군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4)

또한 만약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예수를 믿을 자들을 선택하셨다면,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의 입장에선 불공평한 일이다. 결국 하나님은 불공평하며 편애하는 하나님이 된다. 특별히 칼빈이 말하는 “선택과 유기”라는 이중예정 사상이 문제가 되는데, 그 ‘선택’과 ‘유기’ 중에 유기에 관한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

어떻게 하나님이 어떤 이들은 구원하시고 그리고 어떤 이들은 버리시기로 작정하실 수가 있는가? 선택받은 자들은 기쁘고 감사한 일이지만, 버림받은 사람들은 억울하기 짝이 없다. 이러고도 과연 기독교의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칼빈의 추종자들 사이에서도 유기에 관한 문제는 아주 의견이 분분한다. 

그 외에도 예정론이 지닌 모순점은 더 있다. 예정론은 만약 구원받을 자가 정해져 있다면 전도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래서 전도의 열정이 사라진다. 전도대상자인 불신자조차도 느긋해진다. 불신자 입장에서는 만약 내가 예수를 믿을 것으로 예정되었다면 언젠가는 믿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예수 믿을 기회를 미루게 한다.

전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다면 굳이 힘써 전도하거나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기도를 하나 안 하나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 이끄실 텐데” 라는 생각 속에 기도조차도 소홀히 할 수도 있다.

<과연 인간은 예수를 선택할 자유가 없는가?>

풋내기 신학생의 고난

내가 다닌 신학대학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요시하는 웨슬리적인 전통을 갖고 있는 신학교였다. 대부분의 신학생들이 절대적 예정론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하였다. 그런데 나는 신입생 시절에 로마서 9장에 나타난 바울의 예정론에 심취해 있었다. 이제 어설프게 예정론적인 생각을 하게 된 초보 신학생으로서 내가 겪어야할 강력한 저항과 그로 인한 격렬한 논쟁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에 내가 속한 취미그룹은 선교를 위해 영어와 독어를 함께 공부하는 “세계선교회”이었다. 당시 3학년 선배가 우리 1학년생들을 맡아서 독일어를 가르쳐주었다. 어느 날 오후 외국어 공부를 마치고 나서 그 선배와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예정과 자유의지에 대해서 토론하게 되었다. 선배는 예정론이 지닌 문제점과 인간이 소유한 자유의지의 중요함에 대해서 말했다.

나는 비록 풋내기 신학생이었지만 이에 질세라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그로 인한 예정론의 정당성을 피력하였다. 이제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점차 싸늘해져만 갔다. 결국 그 선배는 내가 갖고 있는 신학적 위험성을 비난하며 공갈 협박의 수준에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래도 그것으로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주먹으로 나의 등짝을 힘껏 때렸다. 그리고 그는 이 한마디를 던지며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래! 이것도 예정되었다. 됐냐?”

전투는 시작되고

하지만 내가 거쳐야 할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생활하던 기숙사에는 신입 대학원생 한명, 신학교 2학년생 한명, 신입 신학생 한명, 그리고 역시 신입생인 내가 함께 생활을 했다. 문제는 나를 제외하고 다른 3명 모두가 웨슬리의 자유의지를 신봉하는 신학생들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심심하면 라면을 끓여먹으려고 옆방에서 가끔 오는 신입생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역시 열렬한 자유의지 신봉자였다.

이제 다섯 명의 초보 신학생들은 제대로 칼빈도 웨슬리도 모른 체 열정적으로 밤마다 예정과 자유의지에 관한 난상토론을 벌이게 되었다. 토론의 내용은 전혀 신학적일 수도 없었고, 단지 자신들의 신앙체험을 통한 막연한 주장들이었다. 나의 기숙사 생활은 점차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라면 먹으러 오던 옆 방 신입생은 나와의 논쟁 중에 과도하게 흥분한 나머지 자신의 검은색 뿔테 안경을 떨어뜨려 깨먹었다. 며칠 후 신입대학원생도 나와의 논쟁을 한 후 화가 난 나머지 일주일을 몸살로 앓아 누었다. 이제 네 명의 초보 신학생들은 나를 마치 이단처럼 취급하는 듯했고 기숙사는 전투적인 분위기로 변했다.

이제는 그 모든 다툼이 귀한 추억이 되었다. 당시 나와 논쟁을 벌였던 그들은 지금 어엿한 목사님들이 되었다. 이제는 함께 모이면 신학생시절 예정론과 자유의지를 잘 알지도 모르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서로 싸우기만 했던 그 때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웃곤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왜 예정과 자유의지 사이의 논쟁은 서로 비인격적인 말다툼과 논쟁으로까지 치닫게 되는가? 아마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만을 말하는 칼빈의 예정론이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명백한 결정론 내지 운명론”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자유의지

예정론이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자유의지 역시 그러하다.  예수를 영접하는 데에 있어 인간의 의지적인 선택이 필요하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진술한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회개치 않아서 멸망당할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말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9)

바울도 이와 똑같은 주장을 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전서 2:4)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제안하시는 구원은 인류를 향한 우주적인 초대임 알 수 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사야 55:1-2)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이사야 55:6-7)

예수님이 제안하시는 구원의 초청에도 아무런 제한이나 제약이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만약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약속의 말씀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하나님의 초대는 진실하지 못한 것이 된다. 또한 만약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초청에 응답할 수 있는 의지적인 자유가 없다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초대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에 응답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나 능력이 인간에게 없다면, 하나님의 초청은 거짓으로 판명되고, 인간은 구원을 선택할 의지의 자유가 없이 외부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로봇이나 기계로 전락해버린다.

그래서 한때 칼빈의 추종자였던 알미니우스5)를 중심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장하기 위해 칼빈의 예정론을 반대하는 세력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알미니안주의는 후에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으로 이어진다.       

자유의지론이 좋다?!

구원의 초청에 응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자유의지는 하나님을 도덕적으로 의로우신 분으로 만든다. 자유의지론은 영생 얻을 자를 무조건적으로 선택하는 불공평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없앨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을 존중하시는 인격적인 분이 된다. 편애하시지 않는 인격적인 하나님은 그 분 자신의 속성인 아가페적인 사랑과 그 성품이 일치하게 된다. 결국 자유의지론은 가혹하고 무서운 하나님을 인격적인 사랑의 하나님으로 전환시킨다.

또한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책임감을 갖게 한다. 만약 예수를 믿을 자가 이미 예정되었다면, 불신자들은 그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하나님이 예정하신대로 예수를 믿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불신자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마지막 심판대에 세울 수 있겠는가? 자유와 책임은 언제나 함께 간다. 그러므로 인간을 심판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반드시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셔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자유의지론은 선교사를 보내고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의 열정을 고조시켜서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또한 자유의지론은 정해진 운명론을 믿으며 체념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며 개선할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다.

뒤바뀐 운명

나는 2001년 4월에 브라질 한인교회를 사임하였다.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미국으로 떠났다. 내가 브라질에서 받은 미국 비자는 관광 비자였기 때문에 미국 체류기간은 최대 6개월이었다. 그 6개월 동안은 어떻게 해서라도 논문을 끝내야만 했다. 사실 객관적으로 나에게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미국에 담대히 입국할 수 있었던 것은 박사학위 논문을 맡은 주심교수에게 내 논문이 훌륭하다는 칭찬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개월이면 논문이 완성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 3명의 논문지도교수 중에 한 명이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3명의 지도교수 중에 한 사람은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짙은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복음적인 성향이 짙은 사람이었고, 또 다른 사람은 중도적인 성향이었다. 바로 그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짙은 교수가 나의 논문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논문이 그 교수의 성향을 맞추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 교수는 다른 두 교수들에게 불만을 토로하면서 내 논문을 거부하였다. 결국 미국에 도착한 두 달 후에 나에게 운명적인 편지가 그들로부터 날아왔다. 그 편지 내용은 이렇다. “아직 논문이 완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년 5월에나 논문심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 편지를 밤에 이메일을 통해서 읽게 되었는데,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피가 역류하는 듯 했다. 나를 바라본 아내는 당시의 내 얼굴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였다. “얼굴이 사색이 되어 마치 죽을 것 같았어요.” 

그 교수에 대한 미운 마음이 가슴에 불길처럼 타올랐다.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뉴욕생활을 어떻게 앞으로 1년이나 더 버티라는 것인가? 그리고 미국 체류기간이 최대 6개월인데 5명의 가족이 한국에 들어갔다가 다시 미국에 나와야 하는가? 또한 그 비행기 값은 누가 치룰 것인가? 이것이 나에게 정해진 운명이라면 그냥 순응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그 때 나는 운명의 기로에 서 있었다. 나의 선택은 지도교수들에 대한 재도전이었다.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기필코 6개월 안에는 논문을 마쳐야 한다는 필사의 의지가 생겼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40일 작정 새벽기도였다. 그전에는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그렇게도 힘들더니 이제는 스스로 벌떡벌떡 일어나게 되었다. 불같이 타오르는 분노의 감정을 누르면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다.

30일 정도 작정 새벽기도가 지났을 때, 학교에 들렀다. 길을 지나다가 우연히 한국에 잘 알려진 donald dayton교수를 만났다. 전에 그의 수업을 들은 적도 있고 해서 나의 사정을 토로했다. 그런데 그는 아주 친절하게도 나의 논문을 그 자리에서 두 시간에 걸쳐 다 읽어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인상적이고, 멋진 그리고 자기가 본 논문들 중에 최고의 논문이다.”
“impressive, stunning, and the best dissertation i have ever seen."

이를 듣게 된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나를 지지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속으로 donald dayton 교수를 내 논문지도교수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관계성이 얽히고설킨 이 마당에 갑자기 나를 거부한 교수를 논문교수 명단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답답하고 초조한 일주일이 지났다. 다시 학교에 들렀는데 나를 흥분시키고도 남을 기적적인 소식이 들렸다. 그것은 바로 논문을 거부한 교수가 다른 신학교의 학장으로 발탁되어 간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운명을 뒤바꾼 기도의 응답이었다. 

결국 나는 dayton교수를 논문지도교수로 영입하였고, 예상대로 내 논문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논문의 최종심사는 9.11사태가 벌어진 다음 달 10월 5일에 열렸다. 그리고 4일 후인 10월 9일은 우리 가족의 미국 체류기간이 종료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무진장 노력하면서도 진땀이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겨우 논문심사를 하나님의 은혜로 마쳤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이제야 철학박사이군요.” 내 입에서 감사의 찬양이 나왔다.

기적적인 미국 탈출

드디어 2001년 10월 5일 최종논문심사를 마쳤다. 그리고 10월 6일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짐을 쌌다. 10월 7일 주일예배를 드리고 평소 나를 아껴주셨던 목사님들께 인사를 드렸다. 10월 8일은 9.11사태로 인해 군인들의 경계가 삼엄한 뉴욕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였다. 나는 미국의 체류가 종료하는 바로 하루 전날에 그 곳 뉴욕에서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고국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것은 기적적인 미국탈출이었다.

나는 나를 가로막는 운명 앞에 굴복하지 않았다. 불굴의 의지로 나를 짓누르는 운명을 헤치고 나왔다. 하지만 내 자신에게 의지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다. 나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나는 하나님께 나의 운명을 바꾸어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성령이 이끄시는 데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마무리 지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 4:10)   

자유의지론, 그럼 이건 어떻게 하나?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과 같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놀이터의 시소와도 같다. 하나가 높아지면 하나가 낮아지게 되어있고, 또한 하나가 낮아지면 하나가 높아지게 되어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면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약해진다. 만약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역사가 진행되었다고 본다면,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사건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도 동시에 상처를 받게 된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만들 때 죄를 거부할 수 있는 강한 의지의 존재로 만들지 못했는가? 라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을 의심하게 만든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할 때에 우리는 우리자신이 결정한 과거의 잘못된 선택과 실수에 대해 개인적인 후회와 죄책감 가지게 된다. 이러한 후회와 죄책감은 자신이 결정한 선택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만 하는 자유의지론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자유의지론의 또 다른 부정적인 측면은 예정론을 믿는 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는데, 그 선택은 고독한 자기 혼자만의 문제이며 아무도 대신 결정을 내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조화를 이룰 수 없는가?>

우리는 영원한 평행선과도 같고 놀이터의 시소와도 같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이들의 영원한 함수관계를 풀 수 있을까?

만약 예정론자들이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들은 인간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만약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자들이 인간의 자유의지만을 강조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자유를 포기할 수도 없다.

두 가지 선택 중 한쪽으로 기우는 것은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다시 그 길로 돌아올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되어있다.6)

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리의 자유의지론의 갈등에 대하여 박창훈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존 웨슬리는 분명 예정론에 대항하는 노력으로 그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존 칼빈보다 200여년 후대의 사람이었고, 그 만큼 현대와 가까운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칼빈보다는 웨슬리가 이성을 강조하는 현대적인 사고에 가깝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의 글을 바로 대조하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훌륭한 개신교 전통을 세운 신학자들 모두에게 잘못하는 것이요, 혹시 아직까지도 남아있을 독선과 오류에 동참하는 일이 될 것이다.”7)  

불가능한 가능성으로서의 도전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 해답은 신앙적인 고백이기보다는 필자의 이성적인 제안이 될 것이다. 이제 나는 삶의 현실을 통해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영원한 함수관계를 풀고자 한다.

나는 이러한 시도를 “불가능한 가능성”이라고 부른다.

예정과 자유의지는 서로 다른 차원?!

예정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다. 하지만 자유의지는 인간이 자신의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정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다. 또한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이라는 차원 속한 것이고, 자유의지는 인간의 현재적 시간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와 예정은 서로 모순되거나 대립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예정은 영원 속에 숨겨진 비밀이기에 현실의 단면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그 비밀을 전혀 알 수 없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누구를 택하셨고 누구를 택하지 않으셨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은 영원히 감춰진 비밀문서다. (계 21:27)

전혀 알 수 없는 예정비밀문서는 우리에게 하나의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그 비밀문서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두통과 근심거리일 뿐이다. 오히려 그에 집착하는 것이 신앙에 독이 될 수도 있다. 죽을 때까지 밝혀지지 않을 비밀문서에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는 차라리 지금 현실 속에서 열심히 전도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자기 자신이 예정되어있는지를 고심하며 괴로워하는 자보다는 예수를 믿게 됨을  감격하여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하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예정된 자일 “확률”이 높다고 본다.8)

결과적으로 개인의 자유의지로 예수를 영접하는 자만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영생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예정비밀문서에 대해서 신경을 쓰기보다는,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예정하셨다는 사실만을 기억하고 열심히 기도하면 된다.

예정비밀문서는 하나님의 예정이요, 하나님의 비밀문서요, 하나님의 권한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에 관여하는 것은 월권이다. 결국 예정과 자유의지는 함께 가는 것이고 그 길의 끝에 구원이 있는 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이 바로 해답!!!

예정과 자유의지 사이의 갈등은 하나님이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하신다는 믿음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대로 계획하시고 실행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동시에 하나님은 인격적인 사랑의 하나님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미래를 예정하셨지만 영원 전부터 영벌을 받을 자를 미리 선택하실 정도로 그렇게 잔인한 하나님은 아니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이나 기계처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신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다.

계획과 계획대로 진행하는 것은 항상 별개의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미래를 자신의 의지대로 계획하셨지만 인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계획을 완성해나가신다. 비록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시지만 인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위해 자신의 전지하고 전능하신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다.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위한 처방전, 예정론

예정과 자유의지는 우리 삶에 서로 달리 적용되어질 때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얽매여 산다. 예수님의 보혈로 과거의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다. 과거에 묶여 사는 성도들에게 필자는 예정론이 특효약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행했던 실수나 과오들조차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다. 과거에 이혼한 사실, 사업을 부도낸 사건들이 미래로 향하는 당신의 발목을 붙잡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주권과 작정하심 속에 당신의 과거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간은 미래를 염려하며 항상 걱정 속에서 살아간다. 기독교인들조차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불안과 걱정에 사로잡혀 산다. 이렇듯 항상 미래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는 또 예정론을 특효약으로 제시하고 싶다.

우리 성도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어떠한 특별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당신을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에 당신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하심을 확신하는 가운데 담대하게 미래를 맞이해야 한다.

자유의지론 -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는 오늘의 구원

그렇다면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편안하게 현실에 안주해도 되는 것일까?

이런 안일한 생각을 하는 성도들에게 나는 또 다른 특효약제시하겠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이다. 아무리 미래를 하나님께 내어 맡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현재의 삶을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 매순간마다 지혜롭고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를 살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택만을 해야 한다.

당신의 의지적인 선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을 슬프게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신이 처한 현재가 매우 중요하다. 지금 당신의 의지적 선택이 당신의 운명을 좌우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확신과 믿음은 과거와 미래에 적용하고, 우리의 현재적 순간에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로 인한 책임의식을 적용하면 된다. 그리할 때 예정과 자유의지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우리의 삶을 통해 조화로운 관계로 승화되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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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 칼빈, ‘기독교강요 제3권’, 김문제역, (서울, 세종문화사, 1976), 654-655.

2) 어거스틴(a.d.354-430)은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와 작정하심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구원받을 자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은 그들의 선행이나 자유의지에 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의지에 속한 것이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발전되어진다. 펠라기우스(a.d.354-418?)는 영국출신의 경건한 수도사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각시킨 신학자이다.

그는 인간에게 선이든 악이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만약 인간이 선이나 악을 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펠라기우스는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적 사건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로 동시에 원죄의 유전도 역시 거부하였다. 결국 그는 죄를 타락한 본성의 탓으로 보지 않고 의지에 대한 책임으로 보았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되고, 인류의 죄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도 아무런 쓸 모가 없어진다. 펠라기우스에게 있어 하나님의 은총이란 인간에게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의 도덕적 모범을 보이신 위대한 스승으로 전락시키게 된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전적으로 반대하였다. 어거스틴은 최초의 인간이 창조된 그 때에는 사람이 완전한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지만, 이러한 자유의지는 타락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었고, 결국 자유의지는 최초의 죄, 곧 원죄를 자초하고 말았다. 이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인 자유의지를 잃어버렸다. 이제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지를 상실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로 전락해버린다. 인간이 가진 유일한 자유는 죄에 대해서만 자유로운 것이다. 어거스틴은 원죄로 인한 타락한 마음은 그 자손들에게 유전된다고 보았고, 그로 인해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책을 공유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원죄교리는 아담 안에서 인류가 하나라는 주장을 전제로 한다. 인간 구원의 유일한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우리는 그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로 인해 인간이 가진 죄책은 제거되어지고, 이제 하나님과의 교제도 가능해진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회복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어지는 죄의 용서는 인간의 공로와 상관이 없는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 구원의 유일한 근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데, 이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의지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랑의 의지로서 하나님의 은혜는 전능성을 가지는데, 이는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와 작정에 달려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구원받을 특정한 인간들을 선택하셨다는 예정교리로 이어진다.

이는 어거스틴 자신이 경험했던 것처럼 선택받은 자들은 언젠가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또한 선택된 자들의 믿음을 유지시켜주신다는 견인의 은총도 그는 주장했는데, 이는 선택된 자들에게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 은총”이 임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거스틴은 교회 밖에서도 예정된 자들은 발견될 수 있다고까지 주장하였는데, 이는 그의 이중예정사상으로 발전되어졌다. 벵트 헤그룬트, 신학사, (성광문화사, 1989), 153-92 참조.

3) 칼빈은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더욱 심화시켜 완성하였다. 그는 전 인류가 죄로 타락해 있다고 보았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가 유전된 것으로 모든 인간은 너무나 죄악된 존재이어서 하나님의 어떠한 은총에도 반응을 보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즉 원죄로 인한 인류는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그로 인해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하다는 생각이 칼빈주의 예정론의 출발점이다.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사상에 의해 뒷받침되어진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것을 무엇이든지 자신의 뜻을 따라 자유롭게 행하실 수 있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은 특별한 은총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신다. 이러한 칼빈의 선택사상은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이라는 개념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개념에 의해 기초되어진다. 칼빈의 선택사상에서 우리가 가지는 주된 관심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영생을 얻도록 선택하셨는가 하는 선택의 문제이다. 밀라드 에릭슨, 조직신학개론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490-95. 참조

칼빈의 예정론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전적 부패 (total depravity)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  
 2.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인간의 아무런 공로나 조건을 초월하여 하나님은 그 분의 뜻대로 그 분이 원하는 사람들    을 선택한다.
 3. 제한된 속죄 (limited atonement)
   예수님의 죽으심은 오직 택함을 받은 자들을 위한 것이고,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단지 택함을 받은 사람들의 속죄를 위한 것이다.  
 4.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able grace) 
   택함을 받은 자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지 못하게 된다. 택함을 받은 자는 결국에는 예수를 믿게 된다.
 5.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택함을 받은 자는 일생토록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이러한 칼빈주의 예정론은 다음과 같은 5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로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거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하신 뜻이다.
둘째로 선택은 효력이 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분명히 예수를 믿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올 것이고, 또한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줄 것이다.
셋째로 선택은 영원 전부터이다. 특정한 사람들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그렇게 하시기로 의도하셨던 것이다.
넷째로 선택은 무조건적이다. 선택이란 선택된 사람들의 아무런 조건이나 근거도 없이 단지 그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택은 불변한다. 하나님은 선택된 자들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나 계획을 바꾸지 않으신다. 스텐리 그랜즈, 조직신학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3), 646-56. 참조
이러한 칼빈주의 예정론은 영어 단어의 첫머리 글자들로 만든 tulip 이라는 단어로 외우면 쉽게 기억된다.

4) 존 칼빈. op. cit., 700-702.

5) 알미니우스는 칼빈의 예정론이 하나님을 모든 죄의 근원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알미니우스의 자유의지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부분적 타락 (moral depravity)
예수님이 인류를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하나님이 형상이 부분적으로 회복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초청에 응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2. 조건적 선택 (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은 그의 전지하신 능력으로 앞으로 누가 믿을 자인가를 미리 알아서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를 선택하셨다.

3. 제한 없는 속죄 (unlimited atonement)
예수님의 죽으심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고, 그의 십자가의 보혈은 모든 사람들의 속죄를 위한 것이다.

4. 거부할 수 있는 은총 (resistable grace)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로 구원의 초청에 응할 수도 그리고 거부할 수도 있다.

5. 확신의 견인 (perseverance of assurance)
믿음의 확신이 없는 자는 비록 예정된 자라도 타락할 수 있다.

알미니우스의 자유의지론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개념이 웨슬리의 자유의지론의 출발점이다. 둘째로 모든 사람들은 구원의 초청에 응할 수 있는 능력, 곧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인간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이들은 선행은총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선행은총이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햇빛과 비를 차별이 없이 베푸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총에 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이 인간을 선택하시는 조건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예지)에 근거한 것이다. (롬 8:29, 벧전 1:1-2) 넷째로 알미니우스의 자유의지론은 이론보다는 실제적 차원에서 칼빈의 운명론을 거부한다. 알미니안들은 칼빈주의가 선교나 전도의 열정을 부정한다고 생각한다.

6) 이런 이유에서 인지 아니면 칼빈주의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한 동역을 의식해서인지 웨슬리는 그의 생전에 칼빈주의와 자신의 신학은 "머리카락 두께의 차이”라고 강조했다. 박창훈, “예정과 자유의 평행선,” 활천, 2005년 11월호, 61.

7) ibid., 58.

8) 존 칼빈, op. cit.,, p.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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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12/18 [17:49]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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