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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9.16 [14:02]
IV. 종교개혁의 불이 타오르다
- 종교개혁사 4 -
 
김의환

95개 조항 항의문과 세 개의 논문의 파문은 전 독일로 퍼졌다. 이에 로마 교황청은 1520년 6월 15일, 예상대로 루터를 파문(破門)하는 파문장을 발행했고, 12월에 교황의 사절들에 의하여 비텐베르크에 도착했다. 12월 10일, 파문장을 받아 든 루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학생 및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주저 없이 파문장과 교회법전을 불태워 버렸다.

황제에게 심문 받다

교황청은 2차의 파문장을 보낸 뒤 독일 국회에 압력을 가해 루터를 속히 정죄하여 처형할 것을 독촉했다. 당시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스페인,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일부 등 광범한 지역을 다스린 젊은 황제 찰스 v세(1500∼1558년)는 야심이 넘치는 로마 가톨릭인이었음으로 단번에 루터를 처리할 수 있었으나,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그리고 터키와의 싸움에서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지원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보름스(worms)에서 1521년에 국회를 소집하여 국회에서 루터의 문제를 처리하도록 했다. 결국 황제는 루터에게 1521년 4월 17일 보름스 국회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친구들이 가는 것을 만류하였으나 루터는 ‘원수들이 보름스의 기왓장만큼 많아도 나는 가리라.’고 굳은 결심을 내보인 후 보름스로 떠났다.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까지의 연변 도로에는 루터를 향한 격려와 환송의 행렬이 넘실거렸다. 루터가 보름스에 도착했을 때는 황제 이상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국회를 사회하던 황제는 루터에게 적의(敵意)에 가득 찬 어조로 심문을 시작했다.

“너는 이 책의 내용을 취소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고집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루터는 하루 동안 생각할 여유를 얻은 후, 다음 날 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굳게 여기 섰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 것입니다. 아멘.”(ich kann nicht anders sein. hier stehe ich. gott helfe mir. amen.)

동지들과의 결별과 개혁운동

황제의 정죄 선언 후에 회의는 끝났다. 루터는 귀로(歸路)에서 프레드릭 공(公)의 배려로 발트부르크(wartburg)에 안내되어 은신(隱身)했다. 그 성에 머물던 약 1년 동안 신약성경을 헬라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하여 종교개혁의 기초 작업을 했고, 1522년에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후부터 본격적인 개혁운동에 착수하였다.

그는 동료 멜랑톤(philip melanchton, 1497∼1560년), 암스돌프(nikolaus von amsdorf, 1463∼1565년) 등과 개혁운동에 관한 전략을 협의하고, 강단에서 말씀 선포를 통한 점진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루터의 이러한 온건한 개혁운동에 반기를 들고 칼쉬탓(a. b. karlstadt) 같은 동지들이 루터를 떠났다. 실망한 루터는 그를 ‘새 가룟 유다’라고 비난하고 과격파를 배격했다.

이어서 1525년에 일어난 농민 반란은 루터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다. 농민들의 지원으로 종교개혁의 분위기 조성에 크게 도움 받은 루터일지라도 반란의 양상이 극단적으로 전개되자 농민들을 비난하여 당국에 농민 탄압을 진정하였다. 루터는 이로 인해 많은 오해를 받게 되고, 그를 따르던 많은 동조자들이 재침례파(再洗禮派, anabaptists, 재세례파라고도 하는, 종교개혁에 수반하여 출현한 프로테스탄트계의 종파. 비자각적(非自覺的)인 유아세례를 비성서적이라 보고, 세례 지원자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었다. 이들의 행동은 모든 국가 권력의 간섭을 부정하는 등 지나치게 과격하여서 가톨릭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쪽에서도 배격당하였다.- 편집자 주)로 넘어갔다. 그러나 다행히도 당국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유리한 기회를 제공했다.

종교의 자유를 얻다

찰스 황제가 교황과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국회는 종교개혁을 관용하는 법령을 내려(1526년) 영주(領主)의 선택에 따라 신교와 구교를 따를 수 있게 하였다. 영주의 신앙에 따른 신앙 자유의 원칙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평화회의에서도 채택되었다. 이로 인해 개혁운동이 호전되자 1529년에 모인 국회에서는 관용령에 의해 1526년에 루터파 신앙이 관용된 지역 이외의 개혁운동은 허락할 수 없음을 결정했다. 이 결정에 반대하여 항의하는 무리를 가톨릭 교회에서 항의자(protestants)로 부르면서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확산을 두려워한 가톨릭이 군사동맹을 결성하여 신교의 팽창을 저지하려 하자 신교의 영주들도 ‘신교 동맹군’을 결성하여 일전(一戰)을 불사할 대비를 하기에 이르렀다.

마르부르크 회의의 비극

이 무렵 신교도간의 성례관에 관한 이견(異見) 조정을 위해 헤세(hesse)의 필립(phililp) 공에 의하여 1529년에 마르부르크(marburg)에서 루터파와 스위스의 개혁파 신학자들의 회의가 열렸다. 15개 조항의 토의에서 14개 조항까지는 합의했으나, 15번째 조항, 곧 성찬의 그리스도 임재관에 대한 견해 조정에는 실패했다. 루터는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고, 츠빙글리는 상재설(symbolism)을 고수함으로써 회의는 결렬됐다.

마르부르크 회의의 결렬은 신교운동의 비극이요, 개혁운동의 커다란 오점이 아닐 수 없다. 밖에서 신교 동맹의 진을 치고 있는 동안, 안에서는 신교 지도자들이 서로 싸우는 우(愚)를 범한 것이다.

성례관뿐만 아니라 루터는 예배 의식에 있어서도 스위스 개혁파와 의견을 달리했다. 루터는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한 가톨릭의 의식을 버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스위스 개혁파는 성경이 명하지 않는 가톨릭의 모든 잔재는 다 버려야 함을 주장했다. 십자가를 걸고, 촛불을 켜고, 제단은 강단 위에 설치하고, 예배를 위한 제동(祭童)을 앞세운 행렬 등을 루터파는 그대로 답습한 반면, 스위스 개혁파는 오직 강단과 강단 밑에 성찬대 이외의 장식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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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10/30 [09:45]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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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개
간추린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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