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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 몸을 녹여 허다한 이의 눈을 밝히듯
- A.J. 크로닌(1896~1981)의 「천국의 열쇠」-
 
임영천   기사입력  2006/09/22 [14:14]

영국은 국왕 헨리 8세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뒤부터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에 피나는 싸움을 자주 해왔다. 그러나 그 싸움의 악습은 신*구교 간의 분쟁 형태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개신교 내와 청교도파 내에서도 장로파와 독립파 간의 분쟁 등 종파나 교파 문제로 인한 유혈충돌이 허다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종교를 구실로 반대파를 억압하고 적대자를 죽이는 잘못된 전통이 그 뒤의 영국 사회를 지배하였다. 결국 악순환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었고, 조상들이 물려준 증오의 피값은 죄없는 후손들의 대(代)에 와서 거두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대대로 물려가며 종교 문제로 서로 싸웠다.   

영국 작가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에 등장하는 주인공 프란시스 치셤 신부의 일생도 바로 그 조상들이 후손에게 물려준 종교전쟁의 영향권 안에서 지배되었다. 아마도 소년 치셤이 후에 신부가 된 것도 실은 부친 대(代)의 그 종교분쟁의 영향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치셤이 아홉 살 때의 일이었다. 그의 일생을 좌우하는 중대한 일이 이때 벌어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위험하다는 이유로 말리는 에탈로의 여행을 갔다. 그곳은 1백 년전(18세기 후반)에 개신교의 장로교파가 피의 박해를 받았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 가톨릭 교도들이 탄압을 받고 있었다. 타 지역의 가톨릭 신자는 에탈읍에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기어코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예정 시간이 많이 초과되어 불안한 심정으로 마중나간 어머니와 아버지는-밤새 기다린 소년의 간절한 소망에도 아랑곳없이-다음날 아침 서로 꼭 껴안은 시체로 모래 사장 가까운 물가에서 발견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렸다.

어른들의 종교분쟁의 희생자, 무죄한 어린 소년의 비극적 운명! 여기서 소년 치셤이 프로테스탄트에 대해 적개심과 복수심을 품는다 해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치셤은 그렇게 되지[하지] 않았다.

종교분쟁이 치셤의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은 종파는 아니면서도 서로 사랑하며 평화롭게 지낸 일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자기의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종파적인 토론 따위는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종교 문제로 서로 싸우고 미워해야만 하는가? 

종교전쟁의 결과 그에게는 고아란 칭호만이 남게 되었다. 졸지에 고아가 된 열두 살의 소년 치셤은 그 동안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어느 조선소의 공원이 되어 중노동에 혹사당하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소위 크리스천이라는 종파주의자들에 비하여 오히려 믿지 않는 불신자, 또는 무신론자들이 훨씬 인간적일 수 있음을 치셤은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였다. 조선소에 다니며 혹사당하다가 폐렴과 늑막염에 걸렸을 때 죽음의 위기를 넘기게 해 준 분도 불신자인 탈록 의사였다. 청진기를 치셤의 몸에 대어 보던 탈록 의사가 갑자기 말했다.  "지독한 놈들이야. 어린애를 군함 만드는 중노동에 부려먹고 탄광이나 방직공장에서 혹사시키면서, 뭐 기독교 국가라고?"

이 일 후, 치셤은 폴리 아주머니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의 건강도 좋아지고 뭐니뭐니 해도 치셤에게 있어서 가장 즐거운 일은 어렸을 적부터의 친구인 소녀 노라를 다시 만나게 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떠나 가톨릭 신학교가 있는 홀리웰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신학 공부를 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홀리웰을 졸업한 뒤 스페인의 산 모랄레스 신학교에 다시 진학하고 거기를 졸업해야만 신부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라에 대한 연정 때문에 그는 스페인 행까지도 포기해야만 할 판국이었다.   

그러나 노라로 인한 정신적 방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모든 기대와 소망이었던 노라가 치셤이 없는 동안 다른 남자와 관계해 딸 쥬디를 낳고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그를 잠시 절망의 늪 속으로 빠뜨렸지만,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굳게 결심한다.

노라의 죽음이 치셤의 소명의식으로

산 모랄레스 신학교 생활 중에서도 치셤은 정신적 방황 때문에 큰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결국은 무사히 졸업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어느 탄광촌의 성당 보좌 신부로 부임한다. 그러나 그곳 키더 신부와의 견해 차이가 심하고 충돌도 잦아 그는 끝내 그 성당을 떠나게 된 후 가게 된 곳이 성 도미니크 성당이었다.

이 성당에는 옛날의 고향 친구요, 또 신학교 동창이기도 한 안셀모 밀리가 제1 보좌 신부로 있었다. 치셤은 제2 보좌 신부로 부임하였다. 치셤은 남이 꺼려하는 빈민 지역인 산드 거리의 노동소년회관을 맡게 되었고, 가난과 고통에 찌든, 연민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죄인들의 사회, 거기에 바로 자기의 소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생활도 주임 신부와의 충돌로 인해 오래 버텨나갈 수가 없었다.

그 후 새로운 부임지 중국에서의 36년 동안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낯선 동양의 이국 땅에서 그가 겪는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존의 성당 건물은 허물어져 있었고, 가톨릭 신도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부부 한 쌍이 겨우 신도라고 남아 있기는 했으나 그들은 오로지 돈밖에는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수녀 세 사람이 도착했으나 그를 돕기는커녕 정신적 고통만 더 안겨다 주었다. 

이들 중 특히 독일 출신 원장 수녀는 더욱 노골적으로 그에게 도전적인 자세를 취했다. 앞서의 그 부부 한 쌍이 직원들의 한 달 급료 전체와 다른 비품들까지 훔쳐 도망친 사건도 직접적인 책임은 이 원장 수녀의 고집에 있었던 것이다.

뒤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이 수녀들은 서로 자기 나라가 이기게 해 달라고 신께 비는 기도에 수녀원 학교의 재학생들까지 끌어들이는 추태마저 보였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프랑스 출신 수녀가 독일 출신 원장 수녀의 뺨을 갈겨대는 불상사까지 일어났다.

치셤 신부는 서로 적의를 품은 채 싸움에 휘말리는 세 수녀들을 보면서 씁쓸한 감회에 빠져들었다. 세계대전은 말하자면, 이 수녀원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페스트(黑死病)의 만연과 함께 비적 와이츄의 난이 발생한다. 전염병이 고개를 숙일 때쯤 해서는 환자들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하던 탈록(2세) 의사가 낯선 이국 땅에서 죽어간다. 그리고 어찌어찌 해서 겨우 다시 지어놓았던 성당은 홍수로 인해 무너져 버린다. 그것도 하필이면 출세가도에 있는 옛 친구 안셀모 신부가 이곳으로 시찰을 나오기 직전에 말이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치셤이 주워다 기른 고아소녀 안나가 배신하고 와이츄 병사를 따라가 버리고, 옛 애인 노라의 딸 쥬디가 죽는 등 그를 몹시 괴롭혔다.  가엾은 노라, 불쌍한 쥬디, 그리고 그녀의 남은 핏줄인 가련한 소년 안드레아. 앞으로의 치셤의 남은 생애는 이 가엾은 고아 안드레아를 위해 바쳐져야만 하게 되었다. 그의 삶은 이처럼 고달팠다.       

그러나 치셤은 사랑과 헌신 그리고 평화의 사도였다. 출세일로의 안셀모와는 달리 그는 표면적 실패를 딛고 일어선, 영원한 내적 승리자였다. 그는 종교, 국가, 인종, 교파간의 불목(不睦)에 저항하면서, 인류는 한 형제요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야만 세계의 평화가 이뤄진다는 점을 그의 생활로 역설한 희생과 봉사의 사도였다. 형제우애와 인류평화, 이 길만이 오직 진리에 이르는 길이요, 또한 천국의 열쇠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그는 그의 실천적인 삶으로 보여 주었던 것이다.

임영천 님은 1940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1․4후퇴 때 가족과 함께 남하, 광주(光州)에서 성장하여 조선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장신대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서울시립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5년 첫 평론집 「삶과 믿음과 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와 지금껏 문학평론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기독교문학평론가협회 회장이며,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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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9/22 [14:14]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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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우 목사는 1982년 로마한인교회를 부임하여 지금까지 목회하고 있으며, 1993년 유럽목회연구원을 설립하여 선교사와 목회자들의 영적 재충전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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