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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쇼펜하우어는 현대판 석가모니인가? (4)
기독교 철학 이야기
 
정성민   기사입력  2023/11/24 [12:43]

1. 쇼펜하우어 철학의 사상적 배경은 무엇인가?

 

 

(3) 스피노자의 범신론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실체의 개념에서 출발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신은 무한하게 많은 속성으로 된 유일한 실체이다. 그러기에 만물은 신의 속성이 드러난 양태이다. 이는 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고, 만물은 신의 필연성에 의해 생성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신은 곧 자연이고, 자연은 곧 신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을 동일 실체로 보았다. 그러므로 신으로서의 자연은 홀로 존재하고 영속하는 유일무이한 실체인 것이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자연관은 신과 동일한 하나의 실체로서의 자연이 지닌 영원성과 단일성을 주장한다. 쇼펜하우어는 자연과 신을 동일시하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대부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영원히 존속하는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이 스스로 느낄 수 있는 담담한 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순전히 인식 주관으로만 존재할 정도로 자연의 직관에 깊이 몰입하고 빠져 있는 사람은 바로 그럼으로써, 객관적 현존이 이제 그의 현존에 의존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므로, 자신이 그 주관으로서 세계와 모든 객관적인 현존의 조건, 즉 담당자임을 직접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자연을 자신 속으로 끌어들여 자기 본질의 우유성(偶有性)으로 느끼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바이런(George Gordon Byron)(1788~1824)은 이렇게 말한다.

, 파도, 하늘이 내 일부가 아닐까? 또 나와 내 영혼의 일부가 아닐까?

내가 그것들의 일부이듯. (바이런,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Childe Harold’s Pilgrimage)15 III,

75)

그런데 이렇게 느끼는 사람이 무상하지 않은 자연과는 달리 어째 자신을 절대적으로 무상하다고 느끼겠는가? 그의 마음은 오히려 베다우파니샤드에 나와 있는 말에 감동받을 것이다. “이 모든 피조물은 모두 나다. 나 이외에는 다른 어떤 존재도 없다”(우프네카트I, 122).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자연과 신을 하나로 보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견해는 앞으로 그가 전개할 신의 개념에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피노자가 자연이나 세상을 신격화하는데 멈출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자연의 질서와 정교함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영속성 등으로 자연이 신격화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자연의 속성 가운데 냉혹함과 잔인함, 더 나아가 자연의 한 구성원으로서 인간이 지닌 사악함이나 도덕적인 타락의 원인을 합리화하거나 설명해야 할 당위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입장에서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이 세상 속의 악의 문제나 그 원인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쇼펜하우어가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추상적이라고 평가한 이유가 막연히 자연을 신격화한 범신론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앞서 칸트가 구분한 현상과 사물 자체, 즉 현상 세계와 객관적 실재(형이상학적 존재)를 현상 세계와 현상 세계의 내적 본질로 전환시켰는데, 이는 스피노자가 말한 자연과 신의 관계와도 유사한 것이다. 결국 현상 세계와 현상 세계의 배후로서 세계의 내적 본질은 동일한 것이고, 이는 자연과 자연 전체의 법칙으로도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쇼펜하우어는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자연과 신의 동일성을 자연과 자연법칙, 내지는 자연과 세상의 내적 본질로 구분하여 신을 자연법칙 내지는 자연의 내적인 속성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더 나아가 세상의 내적 본질 혹은 자연 전체의 법칙은 우주적 의지라는 새로운 신적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막연하고 추상적인 스피노자의 신의 개념이 이제는 쇼펜하우어의 구체적인 신의 개념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바로 세상 속의 악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쇼펜하우어의 신의 개념, 우주적 의지가 그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이 현상계에는 진정한 손실도 진정한 이득도 없다. 존재하는 것이라곤 의지, 즉 사물 자체인 의지, 모든 현상의 원천인 의지뿐이다. 의지의 자기 인식과 그것에 기초해서 결정되는 긍정 또는 부정이 유일한 사건 그 자체인 것이다.

 

쇼펜하우어에게는 알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는 현상 세계의 배후, 즉 칸트가 말하는 사물 자체(초월적이고 객관적인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오직 인간의 신체를 통해 직관할 수 있는 감각적인 세계만이 유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 세계의 원리이며 내적 본질인 우주적 의지만이 현상계의 원천으로 남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이렇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하나의 동일한 의지의 객관성이다. 이것은 물론 그 내적 본질의 측면에서 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쇼펜하우어의 우주적 의지는 스콜라 철학이 말하는 유일신의 존재를 대체할 뿐만 아니라 플라톤이나 인도철학이 말하는 불멸의 절대적 존재(이데아 혹은 브라마)를 대체하는 신적 개념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우주적 의지는 곧 현상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본질을 말한다.

 

그런데 세계의 측정 불가능성을 고찰하는 경우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 그 현상을 세계라 할 수 있는 본질 그 자체는그것이 무엇이든 간에그 참된 자기(Selbst)를 그 같은 무한한 공간에 펼쳐서 잘게 나누어 놓았을 리 없고, 이 무한한 외연은 전적으로 그 본질의 현상에만 속하지만, 이와 반대로 본질 자체는 자연의 어떤 사물이나 생물체 속에도 분할되지 않은 채 온전히 존재하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어떤 개별적 사물에 머물러 있더라도 아무것도 잃어버리는 것이 없다. 그리고 참된 지혜 또한 무한한 세계를 측정함으로써, 또는 보다 합리적으로 말한다면 끝없는 세계를 몸소 돌아다닌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참된 지혜는 개별적 사물의 참되고 원래적인 본질을 완전히 인식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려고 하면서, 어떤 개별적 사물을 철저히 탐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사물의 내적 본질을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인간의 신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신체만이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유일한 객관적 실체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인간의 오감(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서 직관하고 인식하는 것들만이 실재하는 참된 것이다.

 

내가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내 신체만이 내가 한 면, 즉 표상의 면뿐 아니라 의지라 불리는 제2의 면도 알 수 있는 유일한 객관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우주적 의지는 자연법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말한다.

 

그런데 자연법칙은 현상 형식에 대한 이념의 관계다. 이 형식이 서로 간에 필연적이고 불가분의 연관을 맺고 있는 시간, 공간 및 인과성이다. 이념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 무수히 많은 현상으로 다양화된다. 그런데 이 현상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면서 따르는 질서는 인과율에 의해 확고하게 규정되어 있다.

 

앞서, 칸트가 말하는 사물 자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 인도 베다 철학이 말하는 브라마는 현상세계와의 관계에서 본질적인 존재로서 언급되었는데,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현상세계에서 무수하게 다양하게 드러난 그 모든 현상들의 이념 내지는 본질은 우주적 의지, 곧 자연의 법칙이다. 우주적 의지는 현상세계를 통해 매우 다양하게 표출이 되지만, 그 의지의 동일성이나 단일성은 확고하다. 또한 우주적 의지는 현상세계의 형식, 즉 시간, 공간 그리고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다고 한다.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모든 자연적인 원인은 기회 원인에 지나지 않고, 하나의 분할할 수 없는 의지의 현상에 대한 기회나 계기를 마련해 줄 뿐이다. 의지란 모든 사물의 즉자태이고, 의지의 단계적인 객관화가 이 모든 가시적인 세계다. 이 장소와 이 시간에 나타나 가시적으로 되는 것은 원인에 의해 초래될 뿐이고, 그런 점에서 원인에 의존해 있지만, 현상 전체나 현상의 내적 본질이 원인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이 현상의 내적 본질은 근거율이 적용되지 않고, 따라서 근거가 없는 의지 자체다. 세계 내의 어떤 사물도 절대적이고 일반적으로 자신의 존재 원인을 갖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바로 지금 현존하는 원인을 가질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원인은 기회 원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식이 없는 자연에서 이런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 바로 그래서 여러 현상의 출현 시점을 규정하는 것이 더 이상 원인이나 자극이 아니라 동기인 경우에도, 즉 인간이나 동물의 행위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이나 동물의 경우에도 자연에서와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것은 동일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의지의 발현 정도는 현격히 다르고, 여러 현상 속에서 이 의지는 다양하게 나타나고 이 현상은 근거율에 종속되지만, 의지 그 자체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여기서 우리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스피노자의 범신론에서 이제는 유물론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우주적 의지가 현상 세계를 통해서 다양하게 그리고 영속적으로 생성하고 끊임없이 흐르는 것은 바로 물질을 통해서다. 만물이 신이라는 범신론에서 신적인 속성을 단지 영원히 지속한다는 영원성의 의미로서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면, 범신론은 곧 무신론이라 할 수 있고, 이는 다시 유물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만물은 홀로 존재하고 영속하는 유일무이한 실체로서 정의를 내린다면, 범신론은 유물론과도 매우 유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유물론은 객관에서 출발하는 여러 철학 체계 중 가장 일관성 있는 체계로서 물질과 더불어 시간과 공간도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물질을 그 자체로서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물론은 세상의 근거나 근원을 물질에서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스피노자의 범신론 그리고 유물론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1) 쇼펜하우어의 우주적 의지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의 영향 아래에 있다.

홍성광에 따르면,스피노자가 말하는 일원론적 범신론의 신은 무한자, 즉 생산 혹은 생성하는 자연으로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궁극적인 힘이다. 이에 반해 무한자의 궁극적인 힘에 의해 생성되거나 생산된 자연은 유한자이다. 이 두 자연(무한자, 유한자)은 코나투스, 즉 힘을 가진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코나투스는 살고자 하는 욕구 내지는 의지로서 파악된다. 이런 면에서 쇼펜하우어는 스피노자의 신은 곧 자연이라는 범신론적 사상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듯하다. 그는 스피노자처럼 자연현상 속의 생산자(무한자)와 생산된 자(유한자)의 의지는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시간과 인과의 계열 속에, 즉 자연 속에 이 행위의 결과로서 하나의 새로운 생명이 현상한다. 생산된 자는 현상 속에서는 생산자와 다르게 나타나지만, 즉자적으로는 또는 이념에 따르면 생산자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생물들의 종이 서로 결합해 하나의 전체가 되고, 그 상태로 영속하는 것은 이 행위 때문이다... 사물 자체가 아닌 현상만이 개체화의 원리에 종속되므로, 사물 자체로서 생산자의 의지와 생산된 자의 의지는 서로 다르지 않다.

 

스피노자는 자연현상 속에서 드러나는 생산자와 생산된 자가 보여주는 힘을 살고자 하는 욕구 내지는 의지라고 말하였는데, 쇼펜하우어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이 지닌 살고자 하는 욕구나 의지를 우주적 의지라는 새로운 용어를 통해 표현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쇼펜하우어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뒷받침한다.

 

여태까지 의지라는 개념이 힘이라는 개념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반면 나는 이를 반대로 돌려, 자연 속에 있는 모든 힘을 의지로 생각할 작정이다.

 

그렇다면,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의 개념은 무엇이 다를까?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우주적 의지는 만물을 관통하는 모든 현상의 원천이요, 만물의 내적인 본질이지만, 그 속성이 매우 부정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객관적 실재는 우주적 의지라고 불리는 매우 상처 많고 깨어진 존재에 불과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요컨대 이것은 의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 의지는 허기진 의지이기 때문에 의지 자체가 자신을 먹어치우며 살아가야 한다는 데 기인한다. 추구, 불안 및 고뇌가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러 현상은 한없이 상이하고 다양하지만, 사물 자체인 의지는 단일하다. 이 인식이야말로 자연의 모든 산물이 놀라울 정도로 확실히 유사하다는 사실과, 함께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같은 테마의 변종이라고 볼 수 있는 친족 간의 유사성에 대해 진정한 해명을 해준다.

 

쇼펜하우어의 신의 개념인 우주적 의지가 부정적인 이유는 아마도 세상이나 자연현상 속에서 발견되는 설명할 수 없는 악과 고통의 문제를 풀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악의 원인을 결핍과 맹목적 충동에 사로잡힌 우주적 의지에 둠으로써 왜 세상이 고통스러운가와 그리고 왜 세상이 이리도 악한가에 대한 의문이 풀리게 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신적 존재, 즉 우주적 의지의 개념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자력적인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전혀 초월적이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인 새로운 종류의 윤리학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자력적인 구원의 길은 바로 우주적 의지의 부정적인 속성을 잘 이해하고 인식하여 우리 마음 가운데 주어진 이러한 우주적 의지(본능, 욕구, 욕망)를 버리거나 포기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구원은 다음과 같다.

 

마지막으로 제4권에서는, 이런 종류의 인식을 통해 인식이 의지에 도로 영향을 미치면 의지의 자기 포기가 일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그것이 모든 덕과 성스러운 것의 최종 목표, 그러니까 가장 심오한 본질이며 세계로부터의 구원인 체념이다... 삶에의 의지 부정은 의욕이 지금 말한 인식으로 끝나는 경우에 생긴다. 그럴 경우 인식된 개별적 현상이 의욕의 동기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을 파악해서 생긴, 의지를 반영하는 세계의 본질에 관한 인식 전체가 의지의 진정제가 되고, 그리하여 의지가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을 포기하게 된다.

 

인간의 살려는 의지 혹은 욕망을 포기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우주적 의지의 부정적 속성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에 적용한다면, 우리가 우주적 의지를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은 악한 것이고, 만일 이러한 우주적 의지를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은 선한 것이다.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앞에서 우리는 증오와 악의란 이기심에 의해 조건 지어지며, 이기심은 인식이 개체화의 원리에 사로잡혀 있는 것에 기인한다고 보았듯이, 정의의 기원과 본질로서, 더 나아가 사랑과 고결한 마음의 기원과 본질로서 최고 높은 정도에까지 이른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 개체화의 원리를 간파하는 것이다. 이 원리에 의해서만 자신의 개체와 다른 개체의 구별이 없어짐으로써, 타인에 대한 더없이 비이기적인 사랑과 더없이 고결한 자기희생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선한 마음씨가 가능해지고 설명된다. 순수한 사랑과 연민은 같은 것이며, 자신의 개체에 대한 연민으로 방향을 되돌리면 그 징후로 나타나는 것이 울음이라는 현상체란 설명을 하면서 주제에서 벗어났다. 그런 뒤 삶에의 의지의 부정이라고 부르는 것도 결국은 모든 선의, 사랑, , 고결한 마음이 생겨나는 같은 원천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행동의 윤리적 의미에 대한 설명의 실마리를 다시 붙잡고자 한다.

 

결국 쇼펜하우어가 신의 개념을 결핍과 맹목적 충동 가운데 사로잡혀 있는 우주적 의지로 규정함으로써 그의 구원론과 윤리학은 완성됨을 볼 수 있다. 이로써 그는 그 모든 초월적인 종교들이 추구하는 타력적 구원과 그리고 더 나아가 신의 계율 혹은 사후세계의 보상을 위한 덕과 윤리적 요구를 따돌리게 된다. 이런 면에서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말하는 신, 즉 객관적인 실재(혹은 사물 자체)는 꿈에 나타나는 괴물에 불과하며 이는 철학적으로 볼 때, 단지 현혹하는 빛이라고 혹평하면서 이러한 추상적인 실재에 근거한 칸트의 윤리학은 현실적인 삶과는 괴리가 있는 옹졸한 도덕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가 이렇게 칸트 철학을 비판하는 이유는 칸트가 말하는 객관적 실재가 현상세계의 근거율에 근거하지 않고 단지 그의 합리적이고 추상적인 사고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쇼펜하우어는 우주적 의지라는 그 자신의 신적 개념에 칸트가 도달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사실 칸트는 현상이 표상이고 사물 자체는 의지라는 인식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칸트는 내가 곧 보여 주는 것처럼 사물 자체를 올바른 방식으로 추론하지 않고 모순에 의해 추론했다... 그는 의지 속에서 사물 자체를 직접 인식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우주적 의지는 현상 세계의 내적 본질이며, 현상 세계에 나타나는 그 모든 다양한 현상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우주적 의지는 형이상학적이지 않고 초월적이거나 신비적 존재가 아니다. 우주적 의지는 자연현상의 근원으로서의 자연법칙일 수도 있고 자연의 근본적 속성으로 자연의 힘일 수 있다. 이러한 우주적 의지 자체는 근거율의 법칙에 자유로울 수 있으나 현상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에 의해 직관되고 인식될 수 있는 객관적 실재이다. 단지 우주적 의지의 속성이 결핍과 맹목적 충동에 시달리는 허기진 의지라는 점이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신적 개념의 특징이다.

 

2) 쇼펜하우어의 우주적 의지는 유물론과 무엇이 다를까?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현상세계의 존재들, 즉 개체들이 경험하는 우주적 의지와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관계가 중요하게 인식되는 반면에, 오직 물질의 영속성만을 강조하는 유물론은 이러한 개체의 주관적 인식이나 직관 그리고 그로 인한 개체의 구원과 윤리학이 등장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유물론은 개체가 사물을 직관하며 인식하고, 그로 인해 사물 자체(객관적 실재)의 내적 본질(우주적 의지)을 깨달아서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애착이나 욕망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과정이나 개체와 사물 자체의 역동적이고 주관적인 관계를 간과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객관적인 방법은 본래적인 유물론으로 나타날 때 가장 일관성 있고 광범위하게 수행될 수 있다. 이 유물론은 물질과 더불어 시간과 공간도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며, 이 모든 것이 주관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데 유물론은 그 관계는 빠뜨리고 있다. 더구나 유물론은 인과율을 실마리 삼아, 그것을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의 질서, 즉 영원한 진리로 생각해서 그 실마리에 의거하여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따라서 유물론의 근본적 불합리성은, 유물론이 객관적인 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객관적인 것을 최종 설명의 근거로 삼는다는 데 있다... 유물론은 이 같은 물질을 그 자체로서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유기적 자연이나 인식 주관도 거기에서 생겨나게 하여, 이로써 이 물질을 완벽하게 설명하려 한다. 실은 모든 객관적인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인식 주관을 통해 인식의 여러 형태로 다양한 방식으로 조건 지어져 있고, 그것들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주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모든 객관적인 것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이런 면에서 쇼펜하우어는 사물 자체의 성격 혹은 우주적 의지를 인식하는 주최자로서의 개체가 없다면, 아무리 물질이 그 자체로서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물질 자체의 영원성이나 객관성조차도 그 의미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주관이 없으면 객관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즉 우리에게 드러난 객체는 주체에게 드러난 객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해, 물질 자체의 영속성이나 객관성을 개체가 인식하지 못한다면, 인식되지 않은 물질의 영원성은 그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정신이 영원의 관점에서 사물을 파악하는 한 정신은 영원하다라고 주장을 했는데, 이를 오히려 정신이 영원의 관점에서 사물을 파악하는 한 사물은 영원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영원의 관점에서 사물을 직관하고 인식하는 주최자로서의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는 것이다. 만일 쇼펜하우어가 중요시하는 인간의 직관이나 인식이 없다면, 물질의 영원성이나 객관성은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객관적인 실체를 직관하고 인식하는 주체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유물론에서는 우주적 의지나 사물 자체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통한 자기 구원이나 덕과 윤리가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다.

 

3) 결과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칸트 철학이 말하는 객관적 실재(사물 자체)의 초월성을 포기하였지만 그래도 칸트가 주장하는 정언명령, 즉 윤리성의 법칙을 수용한 듯하게 보인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유물론이 말하는 사물이나 물질의 영원성을 수용하지만, 현상세계에서 개체가 지닌 주관적인 직관이나 인식, 그리고 이로 인한 인식의 전환, 더 나아가 이러한 인식의 전환으로 인한 자기 부정이나 금욕,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그 모든 욕망이나 정신적인 고통에서 해방되는 개체성이나 주체성을 인정한다는 면에서 유물론을 넘어선다. 이런 면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칸트 철학과 유물론 사이의 중도적 선택을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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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3/11/24 [12:43]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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