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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쇼펜하우어는 현대판 석가모니인가? (3)
기독교 철학 이야기
 
정성민   기사입력  2023/11/22 [12:22]

1. 쇼펜하우어 철학의 사상적 배경은 무엇인가?

 

(2) 칸트 철학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사상의 절반이 칸트로부터 왔다고 진술한다. 즉 그의 철학은 칸트 철학에서 시작되었고, 그의 철학의 가장 중심적인 뼈대도 칸트 철학이라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독자가 이러한 칸트 철학을 이해할 경우에 엄청난 정신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므로 칸트 철학이야말로 여기서 사상을 펼쳐 보일 때 철저히 알아야 하는 전제가 되는 유일한 철학이다... 나는 이미 초판의 머리말에서 내 철학이 칸트 철학에서 출발했으며, 따라서 독자가 칸트 철학을 철저히 알고 있음을 전제로 삼는다고 설명했는데... 칸트 철학은 그것을 파악한 모든 사람의 머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데, 그 변화가 너무 커서 가히 정신적 거듭남이라 일컬을 만하다.

 

그렇다면 왜 쇼펜하우어는 칸트 철학을 그토록 위대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칸트가 1400년간 이어온 기독교의 교리를 옹호하는 스콜라 철학을 완전히 엎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기독교 초대 교부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해서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에 이르는 모든 기독교 사상가들을 스콜라 철학이라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 포함시킨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스콜라 철학은 기독교 신앙과 교리의 진실성을 증명하려는 사변철학이기 때문이다. 칸트 철학의 공헌은 이러한 기독교 신앙과 교리를 철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순전히 역사적으로 보자면 칸트의 위대한 업적은... 그는 철학에서 더없이 위대한 혁명을 일으켰고, 사실상 세계 철학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세 번째 시대를 시작하기 위해 상술한 보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14세기 동안 지속된 스콜라 철학을 종결시켰다.

 

이처럼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위대성을 스콜라 철학의 종말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찾았다.그렇다면 쇼펜하우어가 생각하는 스콜라 철학은 무엇인가? 그가 생각하는 스콜라 철학은 기독교 전통 신앙을 옹호하고 증명하려는 철학적 시도이다. 쉽게 말해 스콜라 철학은 신의 존재와 영혼의 존재를 믿으면서 이러한 사실을 철학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존재론적 증명과 우주론적 증명을 시도한 그 모든 기독교 철학을 말한다. 또한 스콜라 철학은 현상 세계 밖에서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인격을 가진 절대자가 자신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을 무에서 유로 창조하였다고 가르친다.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로 중세의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를 들 수 있다. 그는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섯 가지 과학적인 논리로 증명하려고 했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이러한 스콜라 철학자들의 시도는 고대 이집트에서 성행했던 원시적 연금술을 가지고 근대 화학에 도입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신의 존재와 영혼의 존재 증명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칸트가 철학적으로 밝혔기에 칸트는 새로운 시대를 연 위대한 철학자로 여겨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칸트는 현존, 즉 경험 속에서 일반적으로 깨뜨릴 수 없는 필연성으로 지배하는 법칙들이 현존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 적용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칸트는 그의 가르침으로 소위 너무나 자주 입증된 교의의 증명 불능을 감히 보여주려고 했다.

 

칸트에 따르면, 신과 영혼과 같은 형이상학적 실재들(현존, 객관적 실재, 사물 자체)은 감각적이고 가시적인 현상 세계의 사물들과는 전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가시적인 현상 세계는 인간이 그의 신체, 즉 오감(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 사물들을 직관하고 인식하는 감각적인 세상이다. 현상 세계의 모든 사물은 시간, 공간 그리고 인과율이라는 현상 세계의 형식에 의해 유지된다. 그러므로 시간, 공간, 인과율은 현상 세계의 근거율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 세계의 근거율에 의해 형이상학적 실재나 세계는 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스콜라 철학이 주장하듯, 근거율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다. , 근거율은 모든 세계의 이전과 밖 그리고 모든 세계를 넘어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라, 공간이나 시간의 필연적 연관성으로 나타나거나, 혹은 인과율이나 인식 근거의 법칙으로 나타나는 것이어서, 단지 상대적이고 조건 지어진 현상에서만 타당한 것이다. 따라서 세계의 내적 본질인 사물 자체는 근거율을 실마리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이 명제가 이끌어 가는 모든 것은 항시 그 자신도 다시 상대적이고 의존적이라서 언제나 현상일 뿐 사물 자체는 아니다.

 

칸트가 1400년 동안 지속되어온 스콜라 철학을 끝내버린 방법은 감각적인 현상 세계와 형이상학적 관념 세계를 구분한 것이다. 쉽게 말해, 시간, 공간, 인과율이 지배하는 현상 세계에 속한 인간이 근거율로부터 자유로운 형이상학적 세계의 존재들을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물 자체나 현존으로 표현되는 형이상학적 실재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거나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신과 영혼과 같은 형이상학적 실재들이 존재하는지를 증명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인식할 수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칸트 철학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칸트의 가장 큰 공적은 사물들과 우리 사이에 여전히 지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증명을 토대로 현상을 사물 자체와 구별한 점이다. 그 때문에 사물들은 그 자체로 존재할지도 모르는 것에 의해서는 인식될 수 없다... 그럼으로써 이제 현상과 사물 자체의 구별은 무한히 더 큰 중요성과 훨씬 심오한 의미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에 따르면 현상과 사물 자체의 구별, 즉 이상과 실재에 관한 학설이 칸트 철학의 근본 특징이다... 파악된 현상과 사물 자체에 관한 칸트의 분리는 ...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그 자체로 전적으로 독창적이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측면으로부터 새 길을 발견하여 이미 플라톤이 지칠 줄 모르고 되풀이하며 자신의 언어로 대체로 이렇게 표현한 같은 진리를 개진했다.

 

사실, 칸트는 형이상학적 실재들(신과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실재들의 존재론적이고 우주론적 증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적 세계는 감각적인 현상세계의 근거율(시간, 공간, 인과율)에 의해 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칸트 철학은 불가지론이라 말할 수 있다. 감각적 현상세계에 사는 존재들이 신과 영혼과 같은 형이상학적 실재들을 인식할 수 없다는 칸트의 주장은 1400년 동안 지속되어 온 스콜라 철학의 그 모든 철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를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원칙들은 우리 지성의 단순한 형식에 불과하며, 사물들의 현존 법칙이 아니라 그것들에 관한 우리 표상의 법칙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원칙들은 단순히 사물들에 관한 우리의 견해에만 적용된다. 따라서 그 원칙들은 경험의 가능성을 넘어서는 미칠 수 없는데, 전제 1)에서 그러한 사실을 겨냥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선험성은 인식 형식들의 주관적 근원에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 형식의 선험성이야말로 사물들의 본질 그 자체의 인식으로부터 우리를 영원히 갈라놓고, 단순한 현상의 세계에만 우리를 한정시켜, 우리는 그 자체로 존재할지도 모르는 사물들의 선험성은 말할 것도 없고 후험성조차 인식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불가능하게 되고, 대신 순수이성 비판이 그 자리에 들어선다. 옛 교의론에 대해 칸트는 이 점에서 완전히 승리를 거둔다. 따라서 이후 등장한 모든 교의적 시도는 이전의 체계와는 전적으로 다른 길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이러한 칸트의 입장은 실제로는 플라톤의 철학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다. 비록 칸트가 가시적 현상 세계와 형이상학적 세계를 구별하고, 형이상학적 세계는 인간으로서는 직관이나 인식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지만, 그렇다고 칸트가 형이상학적 세계(사물 자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칸트의 사물 자체 (객관적 실재, 형이상학적 실재, 현존)의 개념과 플라톤의 이데아는 내용상으로 볼 때 거의 동일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런데 우리가 볼 때 의지가 사물 자체이지만 이념은 특정한 단계에서 의지의 직접적인 객관성이라면, 칸트의 사물 자체와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들에게 유일한 실재인 셈이다. 서양에서 가장 위대한 두 철학자의 두 개의 위대하고 애매한 역설은 사실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유사한 것으로, 하나의 유일한 규정에 의한 것이라는 점만 상이하다. 그뿐 아니라 두 개의 위대한 역설이 내적으로는 아무리 일치하고 유사하다 해도, 그것을 주창한 두 사람의 개성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설명하는 내용이 아주 상이한 것처럼 보인다. 두 역설이 하나의 목적지에 이르는 두 개의 아주 다른 길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한쪽이 다른 쪽의 최상의 주석이 된다... 이 두 학설의 내적 의미는 완전히 동일하고, 양자가 가시적 세계를 하나의 현상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명백하며 더 이상의 증명을 요하지 않는다. 현상이란 자체로는 공허하고, 현상 속에서 표현되는 것(칸트에게는 사물 자체, 플라톤에게는 이데아)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지며, 차용한 실재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칸트의 사물 자체와 플라톤의 이데아가 지닌 유사성은 무엇인가? 쇼펜하우어는 다음 다섯 가지로 이들의 유사성을 진술한다.

 

1) 현상세계는 형이상학적 실재(칸트의 사물 자체, 플라톤의 이데아)에 그 근거를 둔다.

2) 현상세계는 시간, 공간, 인과율이라는 현상세계의 형식, 즉 근거율에 따라 유지된다.

3) 형이상학적 실재는 이러한 현상세계의 근거율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4) 형이상학적 실재는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실재이다.

5) 현상세계는 이러한 초월적인 실재의 요구로 덕이나 윤리를 강요받는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칸트와 플라톤은 둘 다 초월적 이원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칸트와 플라톤의 사상은 무엇이 다를까? 그들의 차이는 인간이 형이상학적 실재(객관적 실재)를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본다. 임마누엘 칸트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실재(사물 자체)는 초월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의식 밖에 인간의 인식과 독립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시간, 공간 그리고 인과율의 자연법칙에 따라 감각적인 현상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이러한 현상세계의 근거율을 넘어서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세계와 존재들에 대해서 전혀 알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에게 사물은 우리 밖에 존재하며 우리 감각의 대상으로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 사물 자체가 무엇인지에 관해 전혀 알지 못하며 단지 그 사물의 현상만을 알 뿐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현상세계의 근거는 형이상학적 세계로부터 주어졌지만, 인간이 형이상학적 세계를 알 길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플라톤은 현상세계의 형식, 즉 시간, 공간, 인과율의 법칙이 그가 말하는 형이상학적 세계(이데아)와 연관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단지 형이상학적 세계(이데아)를 본질적인 것으로, 현상적이고 가시적인 세계를 비본질적인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말한다.

 

우리의 감각이 지각하는 이 세계의 사물들은 결코 참된 존재를 갖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항상 존재하지만,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물들은 상대적인 존재를 가질 뿐 전체적으로 서로에 대한 관계 속에서, 서로에 대한 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 때문에 이들 사물의 전체 현존재를 마찬가지로 비존재(Nichtsein)라 부를 수도 있다... 반면 유일하게 참된 존재자는 항상 존재하고, 결코 생성도 소멸도 하지 않으므로,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림자의 실재하는 원상이다. 그것은 영원한 이데아며 원형이다. 원상에는 다수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원상 그 자체이면서 본질상 하나이고, 원상의 모상이나 그림자는 모두 원상과 같은 이름을 지닌 같은 종의 개별적이고 무상한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모상과 그림자에도 생성과 소멸이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플라톤의 형이상적 실재(이데아)는 현상 세계에 사는 인간이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실재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칸트가 주장하는 사물 자체, 즉 객관적 실재(초월적인 존재)와 플라톤이 말하는 객관적인 실재(이데아)는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칸트와 플라톤 철학은 초월적 실재(신과 영혼)에 관해 5가지 유사성을 지녔기에 이들 철학의 의미와 지향점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실재(칸트의 사물 자체, 플라톤의 이데아)와 현상세계의 관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인다는 것이다. 즉 객관적 실재에 관한 인간의 인식 가능성에 관하여서 칸트는 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플라톤은 실체와 그림자의 관계처럼 어느 정도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는 인도의 마야의 가르침과 오히려 더 가깝다고 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플라톤과 인도의 철학자들은 가시적인 현상세계가 꿈이든 망상이든 간에 그림자의 실체나 혹은 객관적 실재를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직관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와 현실, 인도철학의 브라마와 마야, 칸트의 사물 자체와 현상은 모두 다 초월적 이원론으로 서로 유사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단지 칸트의 철학이 다른 점은 객관적 실재(사물 자체)와 현상의 관계가 불연속적이고 불가지론적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점을 쇼펜하우어가 칸트 철학을 위대한 철학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바로 가시적인 세상과 구별되어 따로 존재하는 초월적인 세계를 인간의 오감으로 직관할 수 없고 또한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칸트가 밝힌 것이 칸트의 위대한 공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1400년간 이어온 스콜라 철학의 명맥을 끊을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고, 더 나아가 인도 베단타 철학이나 플라톤의 초월적 이원론 내지는 범재신론적 신비주의를 부정할 수 있는 계기나 근거를 칸트가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 철학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궁극적인 반응은 무엇일까?

 

1) 쇼펜하우어는 칸트 철학의 불가지론에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원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실재(사물 자체, 객관적 실재)에 대하여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상세계의 사물 전체와 현상세계 배후의 객관적 실재(신이나 초월적 존재)는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있어서, 객관적 실재는 꿈에 나타나는 괴물이며, 현혹하는 빛에 불과한 것이다. 즉 쇼펜하우어의 입장에서는, 칸트가 현상세계의 배후로 알려진 객관적인 실재는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주장에서 더 나아가 그러한 존재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장하지 않았기에 너무나 불만족스럽고 답답하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쇼펜하우어는 칸트 철학을 가시적인 세계, 즉 현상세계를 뛰어넘어 공허한 허구의 무한한 영역에 도달하려는 헛된 시도로 평가한다.

 

우리의 철학은 칸트의 위대한 학설과는 달리, 근거율을 그 보편적 표현으로 하는 현상 형식을 높이뛰기의 장대로 사용하여, 그것으로 유일하게 그 형식에 의미를 부여하는 현상 자체를 뛰어넘어 공허한 허구의 무한한 영역에 도달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그 안에 있고, 그 세계가 우리 안에 있는 인식 가능한 이 현실 세계는 우리의 고찰의 재료인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 이 현실 세계는 내용이 실로 풍부하여 인간 정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연구조차 그 세계를 남김없이 파헤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인식 가능한 현실 세계는 앞서 행한 우리의 고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윤리적 고찰에도 소재나 실재성이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가 공허하고 소극적인 개념으로 도피할 필요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다음 가령 우리가 눈썹을 치켜 올리고 절대적인 것’, ‘무한한 것’, ‘초감각적인 것에 관해 말한다면, 이 같은 것이 단순한 부정 이상의 것을 말한다고 우리 자신을 믿게 만들 필요는 결코 없을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생각하는 객관적 실재는 초월적이고 무한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신체를 통해 경험하고 직관하여 인식할 수 있는 세상의 사물 전체인 것이다. 현상세계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 전체를 떠나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는 없으며, 우주적 진리를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는 그 모든 재료는 현실 세계 안에 모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세계와 그 배후인 객관적 실재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실체인 것이다.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과율은 경험에서 비로소 받아들여지는 것이기에, 경험의 실재성은 이제 다시 인과율에 근거를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두 학설에 먼저 객관과 표상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그다음으로 직관적 객관의 존재는 바로 그 작용이고, 바로 이 작용에 사물의 현실성이 담겨 있으며, 주관의 표상 밖에서 객관의 현존을 요구하거나 사물의 작용과는 상이한 현실적인 사물의 존재를 요구하는 것도 전혀 무의미하고 모순된 일임을 가르쳐야 한다. 따라서 그것이 객관, 즉 표상인 한, 그 밖에 객관에는 인식을 위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기에, 직관된 객관의 작용 방식의 인식이 객관 그 자체도 남김없이 파헤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므로 그런 한에서 순전히 인과성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공간과 시간 속에 직관된 세계는 완전히 실재하고 있고, 완전히 자신이 드러내는 모습 그대로다. 또 그 세계는 전적으로 아무런 뒷받침 없이 인과율에 따라 관계를 가지며 표상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세계의 경험적 실재성이다.

 

2)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불가지론을 통해 초월적 이원론을 부정하고, 일원론적 범신론(Monistic Pantheism)으로 나아갈 실마리를 찾았다. 물론 칸트의 불가지론이 초월적 이원론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쇼펜하우어가 생각하는 객관적 실재는 우주적 의지이기에, 이러한 우주적 의지의 개념에 도달하기 위해 이제는 일원론적 범신론의 근거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원론적 범신론의 대표적인 철학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신의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이다. 그는 실체를 유한과 무한으로 나누는 그의 스승,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일신론(Dualistic Monism)에 반대하면서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스피노자는 신은 곧 자연이다, 신은 곧 세계라고 주장하면서 신과 자연 혹은 신과 세계의 동일 실체론을 가르쳤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자연이나 세계를 홀로 존재하고 영속하는 유일무이한 실체로 보았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쇼펜하우어가 이제는 칸트의 불가지론을 넘어서 스피노자의 일원론적 범신론(Monistic Pantheism)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반면 나는 이 책의 부록에서 칸트 철학의 네 가지 이율배반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근거 없는 속임수임을 증명할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결국 필연적으로 생기는 모순은, 칸트의 말을 빌리면, 시간, 공간 및 인과성이 사물 그 자체에 귀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현상에만 귀속하는 데서 해결된다. 이때 현상의 형식이 시간, 공간 및 인과성인 것이다. 이를 나 자신의 말로 표현하자면, 객관적인 세계, 즉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세계의 유일한 면이 아니라 단지 한 면, 말하자면 세계의 외적인 면일 뿐이며, 세계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면이 있는데 그것이 세계의 가장 내적인 본질이자 핵심인 사물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객관화되는 가장 직접적인 단계에 따라 의지라고 부르며, 이것을 다음 권에서 고찰할 것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주장하는 사물 자체를 초월적인 존재로서 해석하지 않고, 이제는 사물 자체를 세상의 내적 본질로서 그리고 세상과 하나인 유물론적 실재로서 해석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칸트가 부르는 신적 존재, 사물 자체의 초월성을 포기하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사물 자체의 내재성만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쇼펜하우어의 입장은 현상세계의 기원이 무엇이며, 현상세계가 나아갈 방향이나 목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무엇이 세상의 본질인가를 찾으려는 것이다.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형이상학적 세계를 논하지 말고, 현실 속의 문제를 푸는데 전념하라는 석가의 가르침과도 유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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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3/11/22 [12:22]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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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우 목사는 1982년 로마한인교회를 부임하여 지금까지 목회하고 있으며, 1993년 유럽목회연구원을 설립하여 선교사와 목회자들의 영적 재충전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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