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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9.16 [12:02]
마침내 개혁의 봉화가 오르다
종교개혁사 2
 
김의환

교회가 신약의 표준에서 탈선될 때마다 새로운 개혁운동이 일어났고, 교회는 신약 교회적 면모를 새롭게 갖추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이런 개혁운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1517년을 계기로 일어난 북유럽의 ‘종교개혁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루터나 칼빈의 운동만은 아니었다. 종교개혁 이전부터 교황의 무오설을 비롯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탈선된 교리에 대하여 누누이 지적해 오던 선구자들의 터 위에서 계속된 것이다.

종교개혁의 갈망

그 중에서도 위클리프(john wyclliffe)와 후스(johannes huss)의 신학적 도전은 중세 교회의 기초에 균열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신비주의 개혁자들의 집단적 운동은 점차 하나의 범시민운동으로 번져서 중세 교회의 단일 체제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거기에다 교회의 위신은 교황청의 분열로 땅에 떨어졌으며, 교황청의 지나친 과세 및 면죄부 판매는 일반 시민의 원성을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특히 이러한 부조리는 16세기의 유럽 중에서 독일의 경우가 제일 심하였다. 그러나 독일은 연방제였으므로 교황의 세력이 왕권을 통하여 직접 미치기가 힘들었고, 르네상스를 통한 인문주의의 영향이 지성인들 사이에 컸기 때문에 어느 곳보다도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루터의 개혁운동을 보다 폭넓은 동기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종교적 관심에서 출발했던 교회 개혁운동으로만 보아져야 할 것이다.

항의자도 놀란 큰 반향(反響)

1517년 10월 31일, 무명 수도사에 의하여 던져진 항의는 항의자 자신도 놀랄 만큼 커다란 반향(反響)을 전 유럽에 몰고 왔다. 끝내는 교회사의 전환점이 될 만큼 역사적인 사건이 되고 말았다. 위기 의식은 이내 16세기 초엽 전 유럽에 퍼졌다. 특히 독일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그 이유는 성서적 인문주의(人文主義)의 발달, 교회 과세의 중과에서 오는 불만, 수도원의 치부(致富), 성직자의 타락이었고, 이런 것들이 가장 심한 불평의 원인들이었다.

위기의 축적은 항상 폭발구를 찾는 법이다. 교회 타락의 상징인 속죄권 판매에 대한 도전으로 항의문을 게재한 것이 드디어 폭발의 계기가 된 셈이다. 종교개혁의 계기로서 항의의 봉화를 올린 사람은 바로 마틴 루터였다.

낙뢰가 삶을 바꾸다

그는 당대의 종교 지도자도 아니었고, 조직과 정치에 탁월한 인물도 아니었다. 다만 깊은 종교적 체험과 신학적 확신으로 신앙적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시골의 수도사요, 무명의 신학자였다.

그는 1483년 10월 10일,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시골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루터는 어릴 적 음악과 철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음악 박사’,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버지는 장차 법률가로 만들기 위하여 아들을 명문 에르푸르트(erfurt)대학에 보냈다(1501년). 거기서 인문주의 학자 베셀(john wessel)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쾌활하고 적극적인 루터의 생애에 갑자기 큰 변화가 왔다. 그는 갑자기 어거스틴파 수도원의 수도사로 들어간 것이다. 그로 인해 친구와 가족은 크게 놀랐고, 무엇보다도 출세를 기대했던 아버지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런 급격한 생의 방향 전환은 비오는 날 친구와 비를 피하려 나무 밑에 있다가 낙뢰(落雷)로 친구가 죽는 것을 보고 종교적 고민을 하게 된 데서 생겼다. 1505년 7월 2일, 그런 참사를 겪은 후 보름 동안의 고민 끝에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s) 감독이 원장으로 있는 수도원에 들어간 것이다. 거기서 원장의 신임을 입어 교육을 받은 후 1507년에 신부 안수를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성경 연구의 기회를 얻었고, 또 어거스틴 연구를 통하여 은혜의 교리를 접했다.

얼마 후 슈타우피츠의 추천으로 비텐베르크(wittenberg)대학의 교수 준비를 하였다. 그 무렵 1510년 11월에서 1511년 4월까지 로마 여행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반 년도 못 되는 여행길에서 로마 교회 중심부의 타락을 느끼고 돌아왔다. 로날드 낙스(ronald knox)가 지적한 바 ‘경험이 없는 선원은 기관실에 가지 않는 게 더 낫다.’는 말이 루터의 로마 여행의 경우에도 적용되리라.

마침내 진리를 발견하다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로 취임한 이래 1513년에서 1517년은 성경 연구, 특히 시편과 로마서, 갈라디아서 연구에 열중하였으며, 주변 11개 수도원을 순회하며 설교하였다. 그런 가운데 루터의 내면에는 점차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어거스틴 신학을 통해 은총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고, 슈타우피츠의 권면에서 힘을 얻었으며, 성경 연구에서 새로운 진리를 깨달았다. 벼락을 때리는 무서운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여지기 시작했다.

수도원에서 기도와 금식과 고행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 수 있을 줄로 알았던 루터는 점차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는 새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됐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시편 강의에서 그는 ‘하나님과의 새 관계’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임을 알게 되었다. 용서받은 죄인으로 변화되는 신비로운 변화의 축복을 타울러(johann tauler)의 글을 읽는 중에 더욱 동감하게 되었다. 이 확신은 로마서 강의(1515~1516년) 중에 더욱 굳혀졌다. 루터의 이런 새로운 신학은 동료 교수들 중에서도 받아들이는 자가 점점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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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3/24 [19:31]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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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개
간추린 교회사
연재이미지1
사회참여로 이어진 청교도 영성
애정적 영성을 공급한 청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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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개혁을 추구한 청교도 경건운동
청교도운동, 지펴진 개혁의 불씨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V. 루터의 종교개혁, 그 업적과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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