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남의 심판자가 된다. 창세기에서의 아담과 하와처럼 사람들은 ‘네가 나쁘다. 네가 그랬다’ 시비를 한다. 도덕적 법정에서의 판사와 검사처럼 모두가 정죄자이고 비판자이며, 언론가이고 평론가가 된다. ‘어떻게 하면 남에게 좀 더 착하고 온유하며 겸손하고 의롭게 보일까'하여 결국은 도덕적 연극을 한다.
현대 문화는 거대한 극장 문화, 배우 문화이다. 이기주의를 위장하는데 현대인만큼 배우 역할을 잘하는 사람들이 없다. 종교적 배우, 도덕적 배우, 정신적 배우, 중세의 흑기사 같은 배우…. 자기가 연극 속의 주인공인 양 착각하며 흉내를 낸다.
현대인의 언어는 너무 지적(知的)으로 발달하여 레이저 광선적인 분석을 하는 비판안을 가졌다. 서로 질투하고 비판하고 평론하며, 또한 이들을 평론하는 초평론가들이 있다.
“네 눈에 티가 있는데 왜 네 형제의 들보를 보고 비판하느냐 네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마 7장 2, 3절)라고 성경은 말한다.
의사가 배를 째는 것은 치료하기 위해서이다. 아무 치료와 개선의 목적도 없이 시기심이나, 예리한 비판에 대한 영웅심, 또는 자기 방어를 위해 비판했을 때, 이것은 너무 큰 상처를 입히는 정신적 살인이다. 우리가 심판자 하나님의 법정, 절대 표준 앞에 섰을 때 남을 정죄했던 그 헤아림으로 우리가 정죄를 받게 된다.
하나님이 볼 때에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으며 인간은 모두 그릇 행하여 제 갈 길로 가버린 죄인 들이다. 단 한 번의 도둑질을 함으로 도둑이 되듯이, 십계명을 모두 범해야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만 범해도 죄인이 된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간음한 여인 같은 현장범이거나, 그녀를 향해 돌팔매질하는 바리새인이거나, 아니면 바리새인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초바리새인 이다.
도덕적으로는 속죄 받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로 살 길 밖에는 없다. 십자가의 정신은 죄와 증오심을 치료하는 용서의 정신이다. 간음 현장에서 끌려 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며 구원과 용서와 재생 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의 심정을 닮는 사람이 많아져야 하겠다.
*한 손에는 복음을, 한 손에는 사랑을’이라는 쌍손 선교를 실천한 한국CCC 설립자 김준곤 목사의 <예수칼럼>. 한국 기독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참된 신앙인인 저자의 선지자적 영감과 시적 감성으로 쓰인 잠언록이다. 민족과 역사,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외침을 담아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고백뿐 아니라,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우리 영혼을 전율시킨다. 출간 이후 최장기, 최고의 베스트셀러로써 수많은 젊은 지성인들의 영혼을 감동시키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킨 <예수칼럼>은 파스칼의 <팡세>에 필적할 만한 현대적인 고전으로 평가되며, 특히 문체의 간결성과 심오한 기독교 사상은 독자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안겨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