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소나무 아래에 많은 솔방울들이 널려 있다. 하지만 어린 소나무는 찾아볼 수 없다. 어미 나무들은 자식들을 자기 품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어미 나무 아래서는 자식들이 제대로 자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무는 자식이 아무리 예뻐도 품에서 멀리 떠나보낸다.
소나무 아래 떨어진 솔방울에는 씨가 없다. 높은 가지에 달려 있을 때 바람을 통해 아주 멀리 날려 보냈기 때문이다. 나무들은 자식들을 가까이 두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 저들은 언어가 없어도 자식을 멀리 떠나보내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깨우친 것이다.
▲ 소나무는 자식을 품에 두지 않고, 바람을 이용하여 멀리 보낸다. © 공학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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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부모들의 자식 사랑이 유별나다. 자녀들의 숙제를 대신해 주기도 하고, 자원봉사도 대신해 주는 엄마들이 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애교 수준이란다. 지위가 높고 가진 자들은 제도적 허점들을 최대한 이용해서라도 자식의 진학을 돕는다. 그러고도 관행이었다며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한다.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품에서 떠나보내야 한다. 아직 어려서 공간적으로 함께 하더라도 스스로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도록 습관을 길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이 진정으로 자식을 위하는 일이다.
▲ 솔방울엔 씨가 없다. 씨앗을 멀리 떠나 보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품에 두려고만 한다. © 공학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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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양말과 속옷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 식후엔 자신이 먹은 빈 그릇을 씻을 수 있어야 한다. 자기의 이부자리와 책상은 정돈할 수 있어야 한다. 요리 한둘쯤은 할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것이 기본이다.
이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은 부모는 없다. 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은 부모마다 다르다. 바르게 교육하는 부모들도 있지만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버려 놓는다. 자녀들을 훈계하지 않음으로 옳고 그름의 한계를 모른다. 아이들의 요구를 잘 들어주는 것을 교육으로 착각하고 있다.
특히 학교 교육에 있어서 중대한 과오를 범하고 있다. 자녀들에게 학교 선생님의 권위를 존중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학부모가 앞장서서 선생님의 권위를 짓밟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선생님을 고발하는 일을 밥 먹듯이 한다. 교육의 현장은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이 되어 있다.
하나님은 질서를 중요시한다.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각 영역마다 지도자들을 세우시고 권위를 입혀 주셨다. 국가는 통치자에게, 가정은 부모에게, 학교는 선생님에게, 교회는 목사에게 권위를 주셨다. 권위에 순종해야 질서 있는 세상이 될 수 있다. 권위를 존중함이 권위를 입히신 하나님께 순종함이 되듯 권위를 무시함은 권위를 부여한 하나님을 무시함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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