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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논어 읽기(6): 제2편 위정(爲政)
복 있는 사람은
 
정세민   기사입력  2021/05/17 [10:38]

2장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시 삼백 수를 한마디로 요약하겠다. ‘사악한 생각을 품지 않는다(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 ‘思無邪’.”)

 

공자는 시경(詩經)을 한마디로 요약해 사무사(思無邪), 즉 사악한 생각을 품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사악한 생각을 품지 않는다고 할 때 사()간사하다, 어긋나다, 기울다, 치우친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기울고 치우쳐 어긋나고 간사한 것이 사()이다. 그렇다면 기울고 치우쳐 어긋나 간사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중용(中庸)의 도를 지켜야 한다. 중용은 물리적 거리의 중간이 아니라 양극단이 화해되고 융합되는 균형을 말한다. 극단으로 치닫는 요즘 시대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중용적 균형이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 극단으로 치우치게 되면 균형의 상실로 인해 상황판단이 흐려지게 되고, 불행한 결과를 낳게 마련이다.

 

성경의 시편(詩篇) 150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이 될까? 우리는 시편이 성전예배에서 부르던 찬송이기 때문에 할렐루야(여호와를 찬양하라)’를 주제로 삼기 쉽다. 하지만 시편은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말하고 있다. 시편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는 1, 2편이 그렇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1:1,2)”,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2:12b)”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복이 아니며, 어떤 사람이 복을 받고 어떤 사람이 복을 받지 못하는지가 바로 시편의 주제이다.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고 나서 산상수훈을 전하면서 가장 먼저 말씀한 내용이 팔복(八福)이다. 예수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유교(儒敎)에서는 수(), (),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 복이다. 오래 살고, 부자 되며, 건강하고, 덕을 베풀고, 마지막에 편안하게 죽어야 복이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예수는 복자(福者)가 아니라 저주(咀呪)를 받은 자이다.

 

우리는 성경에 예수님의 전기(傳記)4권이나 가지고 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예수님의 전기를 복음(福音)이라 부른다. 복된 소식이란 뜻인데 여기에도 복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 그러고 보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복이 무엇인지 누가 복을 받는지가 주제가 될 수밖에 없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12:1~3)”

 

우리는 기독교가 기복신앙으로 전락했다고 개탄해 마지않는다. 설교든 기도든 그저 복 달라는 말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했듯이 기복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예 아브라함에게 복 자체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다만 우리가 비는 복의 내용이 문제가 될 따름이다
. 우리가 비는 복이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부자 되고 오래 사는 것이라면 과연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무엇이겠는가? 혹자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건강하고 부자 되고 오래 사는 것이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들어와도 복 받고 나와도 복 받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복의 원의(原意)를 따져 보자. 복이란 히브리어 바라크는 무릎을 꿇는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뜻에 무릎을 꿇고 순종할 때 임하는 것이 복이란 말이다. 아브라함이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무릎을 꿇고 순종했을 때 믿음의 조상이요 열국의 아비가 되는 복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복이란 애초에 건강하고 부자 되고 오래 사는 것과는 아예 상관없는 일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무릎을 꿇을 때 임하는 게 복이다. 그것은 우리 보기에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전5:16~18)”라고 권면했다.

 

공자는 나이 오십이 돼서야 하늘의 명을 알았다고 했다(知天命). 그만큼 하늘의 명이나 하나님의 뜻은 쉽게 알 수 없다.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깎이고 다듬어져야 한다. 그야말로 논어에서처럼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 한다. 그렇다고 마냥 수행만 하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란 요원해 보인다.

그래서 잠언은 이런 우리를 위해 방안을 마련해두었다. 과연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료하게 밝혀놓았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3:5,6)” 바로 내 생각, 내 판단, 내 주장을 내려놓고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게 잠언의 명령이다.

 

복을 받는 비결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면 그 실천방안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절대주권 앞에 나를 포기하는 일이다.

동양의 시경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악한 생각을 품지 않는다라고 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주장에 치우쳐 중용을 지키지 못하면 넘어지기에 십상이다. 삶의 균형을 잡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유교의 오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복도 비록 내가 옳고 내가 맞다 하더라도 나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나를 맡길 때 찾아온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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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5/17 [10:38]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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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우 목사는 1982년 로마한인교회를 부임하여 지금까지 목회하고 있으며, 1993년 유럽목회연구원을 설립하여 선교사와 목회자들의 영적 재충전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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