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독성경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그리고 마태복음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신구약을 통으로 읽는 것이다. 이 메모는 신구약 1,189장을 4장씩 묶어서 298회분을 게재 할 예정이다. 매 성경 모두(冒頭)에 필요한 연대나 자료를 제시하여 성경 읽기에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성경의 매 장은 몇 개의 단락으로 나누었는데 성경 메모는 단락 별로 제시하였고 지방이나 성읍과 일부분이지만 인명은 간단한 각주로 처리하였다. 본문과 대조하여 읽기 바란다. 단락별로 필요한 경우 “적용과 기도”를 넣었다. 이 메모에서는 논쟁이나 비판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성경의 흐름, 맥락, 요의, 함의, 경우에 따라서는 내용 정리 등을 기술하였고 가능한 간단히 처리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적색으로 된 것은 모두 성경 본문의 각주(脚註)이다. 성경은 우리의 맛있는 양식이며, 성경을 읽음으로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행복해 진다. “맛있는 1189, 행복한 298”
누가복음 17장-20장 메모
<제 17 장> 강화(설교): 용서, 믿음의 힘, 종의 할 일, 하나님의 나라
[타자에게 범죄 하게 한 자의 화(禍)] (눅17:1-4; 마18:6, 7; 막9:42)
남에게 범죄 하게 하는 사람은 화가 있을 것이며 너는 네게 죄를 지은 자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성경에서 7번은 완전을 의미하니까 숫자의 문제가 아니고 완전하게 참고 즐거움으로 용서하라는 것이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라는 뜻이며 용서에 앞서 내가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있고 더 나아가 사랑의 사람으로 성화되어있으면 타자를 용서해 주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 된다. 고로 용서는 타자의 문제가 아니고 내 심령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의 힘] (눅17:5, 6)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앗이다.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비록 “그 믿음이 작다고 하더라도” 란 의미를 내포한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으면 뽕나무를 옮기어 바다에 심을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은 불가능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믿음의 사람은 불가능을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정보사회에서 믿음은 정말 한 사람의 인생사를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종의 할 일과 종의 자세] (눅17:7-10)
종은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다. 그가 일을 많이 했다고 대접을 받을 입장은 아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면 교만해지기 쉽다. 목사가 장로가 즉 교회 지도자들이 빠지기 쉬운 교만은 종의 신분을 망각해서이다. 오늘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이 되어 대접을 받는다면 그를 주님이 칭찬하실까? 아니다. 진노의 심판이 있을 뿐이다.
[낳음을 받은 10명 나병인 중 1명만 드린 감사와 찬양] (눅17:11-19)
나병 환자 열 명이 깨끗함을 받았다. 그 가운데 사마리아 인 1명만 나병이 낳은 것을 알고 예수님께 와서 감사와 찬양을 드렸다. 사마리아인을 부각(浮刻)하신 이유는 당시 사마리아인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유대인과 차별하여 말씀하신 것이고 유대인들의 오만과 배척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구원을 얻었어도 감사가 없는 백성들이 많음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나라: 메시아 왕국](눅17:20, 21; 마24:23-28; 막1:15)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천국 관이 다르다. 바리새인은 지상에서 이루어질 천국 즉 가시적, 공간적 천국의 개념을 가졌지만, 주님께서는 영적 천국 즉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천국 개념을 말씀하신다. 이는 메시아 관의 차이와 같은 의미가 있다. 천국을 인간의 관념의 세계에서 이해하면 아니 된다. 천국은 영적이며 차원이 다른 세계이다. 바리새인은 이 땅(공간)에 이루어질 눈에 보이는 천국이며 세속적 왕국의 건설을 염두에 두고 물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그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신다. 천국이 이루어지는 때에 대한 답변은 없으셨으나 말씀 속에 은유하는 바는 천국은 현재(시간) 내 심령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 바리새인이 물은 것은 언제(when) 천국이 임하는가? 인데 예수님은 가시적(visible)인 것이 아니라하신다. 이 대답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 바리새인이 물은 것은 언제(when) 천국이 임하는가? 인데 예수님은 공간적(space)인 것이 아니라 하신다. 이 대답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천국이 임하는 때가 있다. 즉 현재이다.
[재림의 때] (눅17:22-25; 마24:36-51; 막13:32-37)
지금도 종말론을 말하며 몇 년 몇 월 며칠의 종말이 온다고 미혹하는 자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이들은 사교이며 돈을 빼앗아가는 도둑들이다. 미혹되면 아니 된다.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상 향락에 빠져있게 되고 죄를 짓고 무감각하게 지낸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처럼 놀라고 이를 가는 일이 생기게 된다. 때를 모르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세상과 짝하여 지내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매일 주님 오시는 날로 알고 살아가야 한다. 오늘이 종말이라 생각한다. 인생에는 종말이 3번 있다. 1. 우주적 종말 즉 예수님 재림으로 세상이 끝나는 날, 2, 개인적 종말 즉 개인의 죽음이다. 3. 시간적 종말이다. 현재는 내가 사는 시간이면서 종말이다. 이 시간을 주님 영접하는 시간으로 산다면 그는 착하고 신실한 종이 될 것이다.
[예수 재림하실 때의 징조](눅17:26-29; 마24:37-41)
앞 단락의 메모를 참조하고 노아의 시내에 홍수와 롯의 시대에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은 것과 같게 될 것을 말씀 하신다.
[예수 재림하실 때의 심판] (눅17:30-37; 마24:37-41)
구원 얻을 자와 얻지 못할 자가 구분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믿음으로 산 사람은 구원을 받아 재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고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불신앙)은 부활하여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은총이니 주의 은혜를 입은 자들만이 그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제 18 장> 고난 받으러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도정에서 일들
[과부와 재판장 비유] (눅18:1-8)
끈질긴 기도로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 믿음의 기도를 말씀하신다. 믿고 구하는 자는 절대 좌절하지 않는다. 끈질긴 간절한 믿음의 기도이다. 믿지 못하면 계속 기도할 수 없다. 재판장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도 귀찮아서 과부의 청원을 들어 준다면 의로우신 하나님이야 성도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겠는가!
[바리새인과 세리] (눅18:9-14)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세리의 비유이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겠는가? 깨끗하지 않으면서 깨끗하다고 생각한다면 외식이다. 바리새인은 자칭 의인이나 세리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죄인임을 자처하였다. 하나님은 이 세리를 의롭다 하셨다.
[어린아이들을 환영하시는 예수님](눅18:15-17; 마19:13-15; 막10:13-16)
당시 인구 계수에서 어린아이들은 제외한 상황으로 미루어 본다면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을 인격체로 인정하시고 아이들에게 안수하여 주셨다. 고대사회의 어린이 인권이 보장되지 않아서 우상의 제물로 아이를 드린 몰록과 같은 잔학한 일도 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아이들을 성인과 같은 인격자로 인정하신 일이다. 더 나아가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하늘나라를 받아드리는 자가 천국을 소유 할 것이다.
[부자 청년의 영생 문제] (눅18:18-30; 마19:16-30; 막10:17-31)
재물이 많은 청년이 지킨 율법과 예수의 율법은 개념의 차이가 있다. 부자 청년은 행위의 율법이요 주님은 사랑의 율법을 말 하신다. 부자 청년이 모든 율법을 지켰다는 개념은 주님의 개념과 다르다. 같은 내용을 다룬 마태복음의 19장 19절에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수준의 행함을 청년은 행했다 했을 것이다. 그러나 행함에 앞서서 그의 심령이 사랑의 사람으로 변해 있어야 하는 것이 선행조건이다. 설사 모든 재물을 팔아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 해도 청년의 심령에 사랑이 없으면 그는 율법을 지켰다 할 수 없다(고전13:3).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진정 사랑할 수 있는 심령이라면 그는 물질적 부자가 아니라 영적으로 부유한 자이며 주님의 제자가 될 것이다. 부자 관리는 사회 통념상의 계명을 지킨 사람이고 예수께서는 사랑으로 완성되는 계명을 말씀하신다. 이 두 사람의 대화는 미완성 대화라 할 수 있다. 청년이 중도에 폐기했기 때문이다.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심령의 변화 문제이다.
[3번째 예수의 죽음과 부활 예언](눅18:31-34; 마20:17-19; 막10:32-34)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여리고에서 그 제자들에게 자기 죽음과 부활에 관해 세 번째로 말씀하셨다. 첫 번째 예언(눅9:22; 마16:21-23)과 두 번째 예언(눅9:43-48; 마17:22, 23)에 이어 세 번째 예언을 열두 제자에게 이르신 것이다. 마태는 이 상황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올라가는 예루살렘에서 이 일이 일어날 것이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잡히실 것이며 이방인의 손 즉 로마 총독과 그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실 것과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세 번에 걸쳐 주신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그 제자들은 명료한 메시아 관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그래서 마지막 만찬에서 누가 높으냐? 라는 논쟁이 있었고(눅22:24-30) 겟세마네 동산에서 선생은 잡혀가는데 제자들은 모두 도피한다(마26:56). 왜 그들은 도망갔을까? 아직 그들은 메시아왕국을 알지 못하였다. 제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받을 때까지는 아직 기다려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죽음과 부활 그리고 갈릴리로 가실 것을 알렸으나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맹인의 치유] (눅18:35-43; 마20:29-34; 막10:46-52)
마태는 이때 고치신 맹인이 2인이라 기록하고 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서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맹인을 고치셨다. 병자의 고침의 바탕은 그들이 믿음을 갖는 것이다. 믿음이 구원을 얻게 한다. 그런 믿음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며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제 19 장> 예수님 예루살렘에 입성
[예수와 세무서장 삭개오] (눅19:1-10)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시기 전 여리고 성을 지날 때 일어난 일이다. 당시 세무공무원은 그 사회에서 백안시당했다. 그들은 백성을 착취하는 무리였다. 그래서 세리라고 하면 죄인 취급을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무서장인 삭개오의 집에서 유하시겠다는 것이다. 선지자인데 어찌 죄인을 못 알아볼까? 라는 것이 군중의 심리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을 구하러 오신 분이다. 죄인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삭개오는 주님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을 얻게 된다.
[백성들의 천국 관(觀)과 므나 비유] (눅19:11-27; 마25:14-30)
백성은 하나님의 나라가 공간적, 시각적으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과 동시에 지상 천국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입성이 곧 메시아 왕국의 건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천국 또는 왕권은 하늘의 영적인 것이어서 은 열 므나 비유로 그의 왕권과 백성의 신앙생활 자세를 일깨우시고 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하신 바가 있다(마25:14-30). 이 비유와 므나 비유는 성격을 좀 달리한다.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는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이르시는 말씀인데 이 므나 비유는 사람들의 능력에 따라서 그 임무를 수행하고 최선을 다하여 수행했다면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그러나 달란트 비유와 같은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게으른 자들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 1 므나는 100드라크마(노동자 100일분 일당에 해당)로 1/60달란트이다.
* 예수님 당시 세계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지역의 왕도 모두 로마가 임명한 왕이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예수님은 이런 비유를 하셨다. 헤롯 대왕, 헤롯 안티파스 같은 왕들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영광의 예루살렘 입성] (눅19:28-44; 마21:1-11; 막11:1-11; 요12:12-19)
예수님이 고난주간을 당하여 베다니로 내려오셨다. 베다니에서 안식일을 지키신 주님은 다음날(일요일) 벳바게에 제자들을 보내시어 어린 나귀 새끼를 끌어오게 하셨다. 그리고 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었다. 이는 스가랴에 의해 예언된 바이다(슥9:9). 어린 나귀 새끼는 사람을 태울 준비가 전연 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이 나귀는 곧바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메시아를 모시고 올라간다. 그렇다. 주님은 훈련된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니다. 그의 손에 잡히면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아도 아주 잘 쓰임을 받게 된다. 예수에 대한 백성의 기대는 로마를 제압하는 지상 국가를 건설할 메시아의 입성으로 여겨 그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그 길을 열었다. 그런데 주님은 백성의 기대와는 다른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계셨다.
* 고난주간 첫째 날(일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 이 사건은 70A.D.로마 티토 장군에 의해 이루어져서 예루살렘이 완전히 훼파된다. 이 전쟁을 유대전쟁(66A.D.-70A.D.)이라 하며, 이 패전으로 유다의 70인(산헤드린) 공회가 해산되었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 (눅19:45-48; 마21:12-17; 막11:15-19; 요2:13-22)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처음 행하신 일은 성전 정결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일이 있다(요2:12-25). 부패의 상징인 성전에서 타락 행위는 이스라엘 전체의 타락상을 잘 보여준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권위를 모르는 바 아니나 예수야말로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그를 인정할 수 없었다. 예수님이 성전 정결을 하신 이유는 예레미야의 메시지처럼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렘7:11). 장사하는 곳이 아니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따르며 호산나를 외치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는가?'라고 힐문하는 것은 예수를 참람(僭濫)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예언한 것(시8:2)이다. 형식화된 그들의 삶에서 메시아를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예수는 매일 가르치시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죽이려 모의하고 기회를 찾고 있었다.
* 고난주간 둘째 날(월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제 20 장> 성전에서 예수의 가르치심과 대제사장과 서기관의 음모
* 고난주간 제3일의 기록은 눅 20:1-21:38(마21:23-26:16)에 기록되어있다.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눅20:1-8; 마21:23-27; 막11:27-33)
고난주간 제3일의 일이다. 고난주간 제3일 즉 그 화요일에는 성전을 중심으로 많은 담론, 강화와 힐책을 하신 날이다. 이 단락에서는 예수의 권위를 두고 말하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의 행함이 어떤 권위에서 나오는가? 묻고 예수는 반문과 예문을 통해 설명하셨다. 말장난은 항상 올무로 예수님을 잡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의 지혜 있는 대답은 제사장들과 장로들로 더 논쟁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 고난주간 셋째 날(화요일)에 있었던 담론이다.
[고난 주간 강화: 비유; 포도원 농부] (눅20:9-19; 마21:33-46; 막12:1-12)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계속하여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다. 그들은 예수를 잡고자 한다. 주인의 종을 죽이고 쫓아 보내고 주인의 아들을 죽인 자들이 결코 포도원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들은 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예수가 자기들을 가르침을 알고 예수를 잡아 죽이고자 한다. 그들은 회개보다는 예수를 죽일 모의를 하게 된다. 악은 또 다른 악을 낳게 된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중단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지만 하나님은 그 버린바 된 돌을 모퉁이 돌 즉 초석으로 삼으신다.
* 고난주간 셋째 날(화요일)에 있었던 강화이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 (눅20:20-26; 마22:15-22; 막12:13-17)
여기 등장인물은 바리새인, 헤롯당 원(Herodian) 등이다. 이들은 예수를 올무로 잡으려고 로마에 세금(인두세) 내는 문제를 질문한다. 이스라엘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헬라(마케도니아) 등의 지배를 받아 오다가 지금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스라엘인에게 로마 지배는 긍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들에게 세금을 내라 하면 그들을 인정하는 것이니 백성의 감정과 장로의 유전에 어긋나는 것이고 내지 말라 하면 로마에 대항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로마 화폐(貨幣)를 쓰고 있으므로 실제로 그것을 인정하고 있음을 이용하시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성전 세)은 하나님에게 드리라고 답하심으로 그들을 놀라게 하셨다.
* 고난주간 셋째 날(화요일)에 있었던 담론이다.
* 데나리온(denarius)은 로마 화폐로 황제상이 부조되어있고 근로자의 하루 품삯이다(마18:28),
[부활 논쟁] (눅20:27-40; 마22:23-33; 막12:18-27)
사두개 인(Sadducees)들이 부활 후의 인간 관계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스라엘은 계대(繼代) 결혼 제도가 있다. 형이 자식이 없이 죽었을 때 그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가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한 여인이 7형제에게 시집갔다면 부활 후의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 차원(次元)이란 말이 있다.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 천국에서 세상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 앞에 평등한 존재들이다. 이 세상과 하늘나라는 차원을 달리하는 세계이다. 현세의 개념으로 하늘나라를 이해한다면 그 범주를 넘지 못한다.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심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 고난주간 셋째 날(화요일)에 있었던 담론이다.
[그리스도의 존재] (눅20:41-44; 마22:41-46; 막12:35-37)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에 관한 논쟁을 전개하시어 바리새인들을 잠잠하게 하시었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라 그의 직능 즉 기름 부어 세움을 받은 왕 권, 제사장 권, 선지자 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 질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존재를 부각하신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 대답했지만, 시편에서 다윗이 그를 주로 불렀으니 어찌 그 자손이 되겠는가? 반문한다. 그리스도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시었으나 영적으로는 성결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그의 우편에 앉아계시는 분이다.
* 고난주간 셋째 날(화요일)에 있었던 강화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외식(外飾): 행태] (눅20:45-47; 마23:1-36; 막12:38-40; 눅11:37-54)
바리새인과 서기관(율법사)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1. 행함이 없는 말만 하는 자들이다. 2. 무거운 짐을 남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끝도 움직이지 않는 자이다. 3. 남에게 보이려고 성경 구절을 옷에 붙이고 다니는 자들이다. 4. 잔치에서 윗자리에 앉는다. 5.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는다. 6. 시장에서 문안을 받는 자들이다. 7. 사람들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다. 이상 7가지 일들이 실재와 일치한다면 좋은 일이지만 모두가 허구이다. 그래서 외식하는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과부의 재산을 빼앗는 파렴치들이다. 즉 사회 약자를 터는 무뢰배들이다. 지도자의 타락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킨다.
* 고난주간 셋째 날(화요일)에 있었던 강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