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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9.19 [12:02]
<영화평> 사랑은 기억보다 강하고
영화 <이터널 선샤인>
 
추태화
 
사랑은 자유의 다른 이름

여느 날과 같이 직장인 조엘(짐 캐리)은 잠에서 깨어난다. 꿈이라도 더 꾸고 깨어야 할 듯 뭔가 미진한 여운이 남는 잠이다. 모든 직장인이 그렇듯 아침증후군일 게다. 직장에 가기까지 천근만근 몸이 무거운 것은 말 못할 스트레스 때문이다.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마음이 더 산란하다. 생활의 기쁨을 쉽게 발견할 수 없다. 조엘은 여러 출근객들 틈에서 기차를 기다린다. 기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면 회사가 나를 맞이할 것이고, 동료들이 웃음으로 맞아주겠지. 그런데 이 썰렁한 계절의 냉기는 왠지 견딜 수 없다. 모자를 눌러 썼지만 견딜 수 없는 추위다. 발렌타인 데이에 사랑을 고백할 연인이 없기 때문일까.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한 장면     © 뉴스파워

그 때 맞은 편 플래트홈에 기차가 선다. 시내에서 시외로 나가는 기차다. 조엘은 무슨 스프링 튀어오르듯 갑자기 저 기차를 타야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충동이다. 조엘은 자신도 억제하지 못할 열정으로 맞은 편 기차로 향한다. 왜 내가 이 기차를 탔을까. 조엘은 그제서야 자신이 탈출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반복되는 도시의 일상에서, 친구할 이 없는 직장의 매너리즘 속에서, 나 자신이 누구라고 따스히 품어주는 사랑도 없는 생활 속에서 차라리 저항이라도 하는 것이 살 것 같다. 그것을 일탈이라고 비웃어도 좋다. 내가 이 순간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내 안의 충동에 무릎 꿇는 일이다. 한 순간만이라도 내 자신에 충실하는 일이다. 조엘이 탄 기차의 종착역이 바닷가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조엘의 무의식에는 깊은 숨을 한번 내몰아 쉴 수 있는 바닷가가 그리웠던 것이다. 조엘의 내면 속에 바다는 자유였다.

사랑과 이성

바로 그 바닷가에서 조엘은 한 여자를 만난다. 헐거운 배낭에 손가락 장갑, 헐렁한 바지에 싸구려 파커 윗도리. 뭔가 조작된 세련미하고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반면 너무 자유로워 보여서 부담스럽기도 하다. 블루 레볼류션으로 염색한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린다. 이름이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이다. 그녀는 조엘이 소심한 도시직장인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챈다. 그의 내면에 해소되지 못한, 억눌린 감정이 솟구치고 있다는 것까지 눈치 챈다. 모든 직장인이 회사 규칙에 고개 숙이고 출근해야 하는 시각에 바닷가에서 한적한 체 산책하는 부류는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시간이 남아도는 룸펜이거나 시간에 쫓기고 있으면서도 탈출을 시도하는 가여운 낭만주의자.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한다. 일말의 자존심이 함께 고개 숙인다. 노트에 그림을 그릴 지 언정 말은 하지 못하는 쑥맥이다. 그래도 마음이 편하다. 여자에게 끌린 것이다.

클레멘타인은 이 가여운 남자를 구출해 주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서 먼저 다가간 쪽이 클레멘타인이다. 그녀는 조엘 곁으로 가 앉는다. 조엘의 문을 열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 노래는 동요같이 잔잔하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외로움이 잔뜩 묻어있다. 클레멘타인도 외롭다는 속내일까. 사랑의 유혹일까, 사랑의 진지한 시작일까. 그들은 해변에서 만난 것을 핑계로 점점 서로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사랑을 확인한다. 그들은 내 속에 네가 들어오고 있어, 네 속으로 내가 들어가고 있어라고 느낀다. 사랑이 서로에게 공인되는 순간이다. 그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 곳곳에 둘만의 기억을 새긴다. 그들은 살갗으로, 호흡으로, 체취로, 추억으로, 작은 인형과 낙서 등으로 사랑의 흔적을 새긴다.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바닷가에서, 책방에서, 거리에서, 공원에서, 집에서, 그들이 거치는 공간은 사랑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모든 공간은 자신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모든 공간은 고유한 자신만의 냄새가 있다. 그것은 남들과 공유해야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들은 그 색깔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만의 색깔로 채색하려 한다. 사랑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 두 연인은 이 단계에 이르자 서로를 구속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사랑이 이성의 지배를 받을 때 초심은 흔들린다. 조엘이 그랬고, 클레멘타인이 그랬다. 조엘은 서서히 그녀가 버거운 상대라고 느낀다. 클레멘타인은 한 마디로 다혈질이다. 사랑을 해도 불같이 하고, 헤어지더라고 뒤끝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다. 반면 조엘은 착하면서도 소심한 스타일이다. 자신의 작은 영역을 소중히 여기고 누군가 그곳에 들어오려면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클레멘타인이라도 그 원칙은 지켜야 한다. 클레멘타인은 오히려 그런 이성의 규범을 무시하고 깨려했다. 물과 불, 이제 그들은 사랑의 달콤한 순간을 지나서 황량한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이성의 안경으로 서로를 진단할 때 장미의 꽃에 가려진 가시를 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사랑은 꿀맛만이 아니라 쓰디쓴 육모초, 아니 짜기만해서 얼굴을 찡그리게 되는 소금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성의 논리가 사랑을 경직시켰던 것이다.

사랑의 기억 지우기

이제 그들은 사랑이 결코 영원히 아름답고 달콤할 수 없다는 현실론자가 된다. 해법은 간단하다. 기억에서 지워버리면 된다. 클레멘타인이나 조엘, 모두 아픈 상처를 지워주고, 사랑의 그늘진 기억을 제거해 준다는 라쿠나 사(社)를 찿는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스릴러 같은 분위기로 전환한다. 사랑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 두 사람, 그들의 기억을 재생하여 회로를 만들고 전자장치를 통해 기억의 줄기를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데, 작업이 순조롭지 않다. 조엘의 몸이 먼저 제거장치를 거부하고 있었다. 조엘은 이성적으로 자신의 사랑이 아픈 기억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라쿠나 사에 기억과 연관된 모든 것을 가지고 왔다. 기록, 사진, 물건 등과 연관된 모든 기억을 입력하여 뇌 안에 회로를 만들고 그 회로와 연관된 기억을 모두 지우는 작업이다. 의지로는 사랑의 기억이 아프다고 느꼈지만 어찌된 일인지 조엘은 다르게 행동했다.

조엘은 추적당하고 있었다. 기억제거 장치가 작동하면서 조엘은 기억 속의 주인공이 된다. 그 작업은 가공할 만하다. 함께 있던 해변의 집이 무너지고, 책방에서 책장이 사라지고, 거리의 사람들이 없어지면서 사랑의 기억은 점점 가물가물해진다. 클레멘타인에게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졌었다. 그녀도 기억제거 시술을 받았기에 조엘이 찾아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남자친구를 만났다. 알는 체도 하지 않았다. 조엘은 이중적 상황에 맞닿는다. 자신의 존재는 애인의 기억에서 사라졌고 자신의 기억에서도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완전히 잊게 될 곳까지 다가가고 있었다. 그것은 이성이 지시한 결과였다. 그러나 사랑의 모든 기억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조엘은 느끼기 시작했다.

사랑과 감정

조엘은 자신이 원했던 기억제거를 지금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랑의 기억이 모두 상처와 아픔이 아니라 행복과 기쁨이 들어있었다는 것을 다시 찾기 시작한 것이다. 조엘은 자신의 판단이 너무 성급했음을 깨닫는다. 그는 사랑의 기억에는 아픔과 기쁨, 슬픔과 행복, 애환이 모두 함께 내재해 있다고 믿게 된다. 아픈 기억 때문에 사랑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두 번 싸운 것 때문에 행복했던 더 많은 시간들을 내버릴 수는 없었다. 사랑으로 엮어졌던 시간과 공간을 단지 과거의 퇴적물로 여길 수는 없었다.

조엘은 기억회로를 타고 자신들의 사랑의 추억을 지우려는 작업에 제동을 건다. 기억이 하나 둘 사라지기 전에 그는 클레멘타인과 탈출해야 했다. 여기서부터 둘은 다시 손을 잡는다. 사랑은 단지 이성으로만 인식되고 판단되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지명을 삭제하고, 사랑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진을 불태워 버리고, 사랑의 느낌이 배어있는 물건을 없애버린다 해도 깊은 사랑은 영혼에 배어있는 것이다. 사랑의 기억이 복잡한 감정으로 얽혀져 내 몸에 꼭 맞는 옷 같지는 않더라도 사랑의 실체는 그보다 더 화려하고 우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이제 사랑이 합의가 아니라 운명이란 것을 알게 된다. 사랑은 손과 입술, 몸의 몇 군데 감각으로 남아있는 생물학적 개념이 아니라 영혼의 만남이라는 깨달음에 다다른다.

사랑과 영혼

그래서 탈출은 필사적이다. 회로에서 삭제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가야 하기 때문에 한 시도 놓칠 수 없다. 한 때 사랑 때문에 고민했고 불쾌했고 아파했던 감정들은 사랑하지 않아서 생긴 것이 아니었다. 거꾸로 사랑했기 때문에 생긴 감정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몇 가지 물건과 기억을 없애버린다고 자신들의 사랑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들의 사랑은 감각적인 수준이 아니라 영혼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비록 기억에서 모조리 삭제해 버린다고 해도 영혼에 새겨진 사랑은 다시 그 생명을 얻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기억을 삭제한 그 행동도 후회하게 될 것이었다. 사랑 때문에 생긴 아픔 몇 가지 때문에 사랑 전체를 거부하고 포기할 수는 없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에게 영혼이 되며, 클레멘타인은 조엘에게 영혼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행히 기억제거 장치에서 탈출을 성공하게 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두 연인, 차를 타고 가다 말다툼을 또 한다. ‘네가 나를 그렇게 봤어! 정말 기분 나쁘네, 그래 헤어져 헤어지면 될 것 아니야!’ 전 같으면 그렇게 반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단선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이 영혼의 만남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기억을 몸에서 지울 수 있다하더라도 영혼에서는 지울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다. 사랑은 이성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사랑은 관계 속에서 성장한다. 사랑은 기쁨과 아픔으로 함께 짜여져가는 양탄자 같은 것이고, 이성과 감성을 맺어주는 영혼으로 숨쉬는 것이다. 때묻지 않은 영혼들의 사랑은 지워지지 않는다. 어떤 기억도 그 사랑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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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11/21 [17:26]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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